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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13 14:21 수정일 : 2018-01-05 10:10
함양박씨시조 및 함양박씨본관의 유래
신라 종성(宗姓)의 후예인 함양박씨(咸陽朴氏)는 경명왕(景明王 : 신라 제54대 왕, 재위기간 : 917~924)의 세째 아들 언신(彦信)이 속함대군(速咸大君)에 봉해졌으므로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고, 속함(速咸)이 함양(咸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貫鄕)을 함양으로 삼게 되었다.
함양(咸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속함군(速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함양군(咸陽郡)이 되어 합주(陜州 : 합천)에 속하였다가 함(含)을 함(咸)으로 고쳐서 함양(咸陽)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함양현(咸陽縣)으로 강등되었으며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군(郡)이 되었고, 1914년 안의군(安義郡)의 7개면을 병합하고 1957년에는 석복면(席卜面)을 함양면에 이속시켜 함양읍으로 승격시켰다.
그후 중시조(中始祖) 선(善 : 예부 상서를 역임)의 현손(玄孫) 신유(臣蕤)가 고려 고종(高宗) 때 김경손(金經孫)과 더불어 나주(羅州)에서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의 난(亂)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고, 슬하에 아들 6형제를 두어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 지문(之文)을 파조(派祖)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와 문원공파(文元公派 : 지빈)․함양군파(咸陽君派 : 지량)․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 지수)․어사공파(御史公派 : 지온)․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 지영) 등으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 장(莊)의 아들 충좌(忠佐)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폐신(嬖臣) 박 연(朴 連)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무고를 당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나와 개성부윤(開城府尹)을 거쳐 충목왕(忠穆王) 때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왕(王)에게「정관정요(貞觀政要 : 중국 당태종과 신하의 문답이나 군신사적을 분류 편찬하여 위정자의 참고로 했던 책)」를 시강(侍講)했고, 당대의 석학 역동(易東) 우 탁(禹 倬)과 쌍벽을 이루었던 역학(易學)의 대가(大家)로 명망이 높았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으로 불교의 배척을 상소했던 초(礎 : 문량공이의 손자)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세종(世宗) 때는 북변에 여진(女眞)의 잦은 침입으로 경원부(慶源府)를 남쪽 용성(龍城)으로 옮기려 하자 이를 반대하여 국토(國土)가 좁아드는 것을 막았다.
중추원사(中樞院事) 신(信)의 아들 안(安)은 창왕(昌王) 때 원수(元帥)로서 대마도(對馬島)에 잡혀 있던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하는 데 공(功)을 세웠으며, 조선태종(太宗) 때 경기도 수군도체찰사에 이르렀다.
세종(世宗) 때 전라도 수군처리사(水軍處理事)와 도총제(都摠制)를 역임했던 실(實)은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실(실)이 어릴 때 그의 아버지 안(安)이 전라도의 도안무사(都按撫使)로서 항복한 왜적들을 처리하였는데 그때 왜인에게 군사기밀을 알리는 말을 하였다고 하여 태조(太祖)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斬刑)을 받게 되었다.
이때 실이 경비가 삼엄한 궁궐 안에 잠행하여 태조의 대전 앞에서 뒹굴며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태조는 실의 효행(孝行)에 감동하여 구명사절을 보내어 형이 집행 되는 순간에 안(安)이 구명되었고, 실(實)은 보은의 뜻으로 나라에 충성하여 당상관까지 올랐다고 한다.
한편 태종(太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습(習)의 현손 세무(世茂 : 생원중검의 아들)는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을 거쳐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명종(明宗) 때는 내섬시정(內贍寺正)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했고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저술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일등공신(靖國一等功臣)으로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진 영문(永文)과 명종조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민헌(民獻)이 유명했으며, 현령(玄齡)은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아우 희령(希齡)과 함께 순절하여 가통(家統)을 세웠다.
돈령부정(敦寧府正) 세영(世榮)의 아들 대립(大立)은 조선조에서 가문을 일으킨 중흥 인물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중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 양주 교수(楊洲敎授)를 거쳐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올라 수십년 묵은 송사(訟事)를 해결하여 지평(持平)에 올랐으며, 선조조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와 판돈령부사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선조 즉위에 공을 세웠던 소립(素立), 호조 참판(戶曹參判) 정립(挺立), 주자학(朱子學)에 심오했던 지계(知誡) 등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올랐던 내정(乃貞)과 감찰어사(監察御使) 득겸(得謙),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승운(承運) 등이 뛰어났으며, 군수(郡守) 창(敞)의 아들 종부(宗阜)는 인조(仁祖)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과 헌납(獻納) 등을 거쳐 김제 군수(金提軍需)로 나갔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앞장섰다가 함북 안변(咸北安邊)에서 순절한 기봉(基鳳)과 학자(學者) 의병장(義兵將)으로 유명했던 기대(基大)가 뛰어났으며, 봉천감옥(奉天監獄)에서 순절한 찬희(燦熙)는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고, 일본 천황을 죽이려 했던 열(烈 : 영수의 아들)과 함께 함양 박씨(咸陽朴氏)의 전통(傳統)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양박씨(咸陽朴氏)는 남한(南韓)에 163,6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양박씨조상
역대인물(歷代人物)
박선(朴 善) 고려조(高麗朝)에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박인정(朴仁挺) 예부 상서(禮部尙書) 선(善)의 아들. 고려(高麗) 때 예부 상서를 지냈다.
박신청(朴信淸) 고려조(高麗朝)에 예부상서(禮部尙書)․검교신호위장군등을 역임하였다.
박윤정(朴允禎) 고려 때 판호부상서(判戶部尙書)를 지냈다.
박신유(朴臣蕤) 초명(初名)은 신보(臣寶), 시호(諡號)는 충질(忠質). 1237년(고종 24) 김경손과 함께 호남의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박지문(朴之文) 고려 때 검교군기시소감(檢校軍器寺少監)에 올랐다.
박지빈(朴之彬) 시호는 문원(文元). 고려 때 위위윤(衛尉尹)을 지냈다.
박지량(朴之亮) 1274년(원종 15) 여몽 연합군(麗夢聯合軍)이 일본을 정벌할 때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 휘하의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事)로 참전, 대마도(對馬島)를 공략하고, 일기도(壹岐島)를 쳐서 공을 세워 상장군(上將軍)이 되었으며 원(元)나라로부터 무덕장군관 군천호(武德將軍官軍千戶)의 벼슬을 받았다.
그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事)․전라도 순문사(全羅道巡問使)를 역임하였으며, 1289년(충렬 15)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1290년(충렬왕 16) 거란(契丹)이 침입하자 좌군 만호(左軍萬戶) 로 이천(伊川)에 진을 치고 거란(契丹)군을 격파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박지수(朴之秀) 고려(高麗)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박지온(朴之溫) 고려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하였다.
박지영(朴之穎) 고려조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박경(朴 冏) 고려조에 시강원 시학(侍講院侍學)을 역임하였다.
박장(朴 莊) 고려 때 군부 총랑(軍部摠郞)으로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박이(朴 理) 시호(諡號)는 문량(文良). 고려 때 국자좨주(國子祭酒)를 지냈다.
박겸(朴 謙) 고려(高麗) 때 선부 산랑(選部散郞)을 지냈다.
박계원(朴季元) 고려조(高麗朝)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박오(朴 汚) 고려에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다.
박안창(朴安昌) 고려조(高麗朝)에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박눌(朴 訥) 고려 때 사인(舍人)을 지냈다.
박충좌(朴忠佐) 1287 (충렬왕 13) ~ 1349 (충정왕 1)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庵), 시호는 문제(文齊), 군부 총랑(軍簿摠郞) 장(莊)의 아들. 충숙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로 나갔을 때 폐신(嬖臣) 박 연(朴 連)의 비행을 막다가 도리어 무고를 당해 해도(海島)에 유배되고, 뒤에 풀려나와 내서사인(內書舍人)․밀직 제학(密直提學)․개성 부윤(開城府尹) 등을 거쳐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가 되어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시강(侍講)했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이 되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박양계(朴良桂) 고려(高麗) 때 추밀원사(樞密院事)를 역임하였다.
박광실(朴光實) 고려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박인계(朴仁桂) 1362년(공민왕 11) 김 용(金 鏞)의 난을 평정하였고 예의 판서(禮儀判書)․양광도 안무사(楊廣道按撫使)를 겸하여 연해변에 침입한 왜구를 격멸하였으며,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공주 지방의 왜적을 맞아 개봉사(開奉寺)에서 격전을 벌이다 전사 하였다. 충의열사(忠義烈士)로 정려(淨侶)가 세워졌으며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박중휘(朴重徽) 고려조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역임하였다.
박현(朴 玄)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박민중(朴敏中) 조선 때 군사(郡事)를 지냈다.
박길중(朴吉中) 조선(朝鮮) 때 호부 시랑(戶部侍郞)을 역임하였다.
박정(朴 珽) 고려 때 찬성(贊成)을 지냈다.
박전(朴 琠) 고려 때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렀으며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박신(朴 信) 고려조에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박경(朴 瓊) 고려조(高麗朝)에 판서(判書)를 지냈다.
박번(朴 璠) 고려 때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박사직(朴斯直) 고려 때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박원렴(朴元廉) 고려(高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박성원(朴成遠) 고려조(高麗朝)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박덕상(朴德祥) 고려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초(朴 礎) 자(字)는 자허(子虛), 호(號)는 사헌(士軒).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고려말(高麗末)에 불교(佛敎)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려 불교를 국교(國敎)로 하던 당시 조야(朝野)를 놀라게 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등과(登科)하여 전라도 수군도절제사(全羅道水軍都節制使) 및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국방(國方)에 공(功)을 세웠다. 그후 함길도(咸吉道) 및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이조 판서 (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중국(中國) 또는 일본(日本) 통신사(通信士)로 외교(外交)에도 탁월한 수완을발휘하였다.
1424년(세종 6) 북변에 여진(女眞)의 침입이 잦으므로 조정에서 경원부(慶源府)를 남쪽 용성(龍城)으로 옮기려 하자 이를 반대, 부령(副寧)에 존속케 하여 국토(國土)가 축소되는 것을 막았다.
박부(朴 敷) 조선 태종(太宗)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박번(朴 蕃) 조선 때 교수(敎授)를 지냈다.
박헌(朴 軒) 고려말(高麗末)에 판결사(判決事)를 지냈고, 조선초 공조 전서(工曹典書)로 개국에 공(功)을 세웠다.
박언(朴 彦) 조선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박성관(朴成瓘) 조선(朝鮮) 때 대리경(大理卿)을 역임하였다.
박득시(朴得時) 조선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敎理)․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다.
박안(朴 安) 고려말 왜구(倭寇)를 수 차례 격퇴한 공으로 경기도 연해절제사(京畿道沿海節制使)가 되었고, 1389년(창왕 1) 원수(元帥)로서 박 위(朴 葳)와 함께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 포로가 된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하는데 공을 세웠다. 1400년(정종 2)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408년(태종 8)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서 전라(全羅)․충청(忠淸)․경기도수군도체찰사(京畿道水軍都體察使)를 겸하였다.
박성림(朴成霖) 조선 때 군사(郡事)를 지냈다.
박춘미(朴春美) 조선(朝鮮) 때 판윤(判尹)을 지냈다.
박거실(朴居實) 조선 태종(太宗) 때 좌윤(左尹)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박선(朴 鮮) 조선조(朝鮮朝)에 홍문관 동정(弘文館同正)을 지냈다.
박습(朴 習) ? ~ 1418 (태종 18)
태종(太宗) 때 관찰사․인녕부윤(仁寧府尹) 등을 지내고 1412년(태종 12)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부임, 김제(金提)의 벽골제(碧骨提)를 수축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1417년 경상도 도관찰사로 전직,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고,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전직했다가 병사(兵事)를 상왕(上王 : 태종)에게 품의하지 않고 처리한 죄로 사천(泗川)에 유배(流配) 되었다.
박실(朴 實) 시호(諡號)는 정효(정孝), 문하평리(門下評理) 안(安)의 아들. 세종(世宗) 때 전라도 수군처리사(全羅道水軍處理事)․도총제(都摠制) 등을 역임하였다.
박의손(朴義孫) 1403년(태종 3) 문과에 급제한 후 감찰(監察)을 지냈다.
박세영(朴世榮) 조선(朝鮮)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으며 독특한 필법(筆法)을 구사하였다.
박성양(朴成陽) 시호(諡號)는 정헌공(定憲公). 고려(高麗) 말 정포은(鄭圃隱)의 문인(門人)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으나 고려가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수 차레에 걸쳐 벼슬에 오를 것을 태조(太祖)가 권하였으나 사양하고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던 중, 왜구의 약탈이 심해지자 백성을 구제하고자 태종(太宗) 때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어 세종(世宗) 때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왜구를 격퇴하고 도총관(都摠管)에 올랐으며 그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무양(朴茂陽) 조선에서 전라도 수군절제사(全羅道水軍節制使)를 지낼때 왜구(倭寇)를 토벌하다가 순사(殉死)하였다.
박흥양(朴興陽) 조선(朝鮮)태종(太宗) 때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으며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박부(朴 富) 조선 개국(朝鮮開國) 후 상서(尙書)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판서(判書)를 지낸 사촌 형제인 박흥택(朴興擇)과 함께 함양(咸陽) 백운산(白雲山)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박환(朴 煥) 조선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박희문(朴希文) 조선 때 군사(郡事)를 지냈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박양손(朴良孫) 조선(朝鮮) 때 검상(檢詳)을 지냈다.
박수지(朴遂智) 조선 때 청백리(淸白吏)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찬(翊贊)에 이르렀다.
박숭탕(朴崇湯) 조선 때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를 역임하였다. 3대(代)가 높은 관직에 이르러 가문을 빛내니 후손들이 청주근교(淸州近郊)에 숭모단(崇慕壇)을 건립하여 3대 조상의 공덕을 추모하고 있다.
박중경(朴重慶)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박자경(朴子慶) 조선 때 생원(生員)을 지냈다.
박규(朴 規) 조선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박구(朴 矩) 조선(朝鮮) 때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박비정(朴庇禎)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계부(朴季阜)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안부(朴安阜) 1466년(세조 12) 문과에 급제한 후 장령(掌令)를 지냈다.
박이관(朴以寬) 자는 자용(子容), 호는 보옹(葆翁), 진사(進士) 수하(遂何)의 아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한(典翰)․보덕(輔德)을 거쳐 중종 때 담양 부사(潭陽府使)․홍주 목사(洪州牧使)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후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전심했다. 창평(昌平)의 유곡사(維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이량(朴以良) 조선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이홍(朴以洪) 호(號)는 월영당(月影堂),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組)의 문인(門人). 연주육현(連珠六賢)의 한 사람으로 당대에 칭송이 높았던 학자(學者)이다.
박숙옹(朴肅雝) 조선(朝鮮) 성종(成宗)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성건(朴成乾) 1473년(성종 4) 문과에 급제한 후 현감(縣監)에 이르렀으며 학문에 능통하여 농암집(聾巖集)을 남겼다.
박권(朴 權) 1496년(연산군 2) 문과에 급제한 후 현감(縣監)을 지냈고 중종(中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박조(朴 조) 조선(朝鮮) 때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를 지냈다.
박훈(朴 薰) 호(號)는 수심제(收心齊).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련된 신하로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학정서원(鶴亭書院)에 배향되었다.
박소조(朴紹祖) 조선조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경종(朴慶宗) 조선 때 방어사(防禦使)를 지냈다.
박희손(朴喜孫) 조선(朝鮮) 때 군사(郡事)를 지냈다.
박철산(朴鐵山)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박중호(朴仲豪) 1500년(연산군 6)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평(朴 枰) 조선 세종(世宗) 때 선교랑 교수(宣敎郞敎授)를 역임하였다.
박운준(朴云俊) 1506년(중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정자(正字)를 지냈다.
박사희(朴士熹) 호(號)는 묵재(黙齋). 조선 때 학자(學者)로 이름이 높았다.
박철(朴 徹)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평(朴 枰) 조선 문종(文宗) 때 선공봉사(繕工奉事)를 지냈다.
박윤검(朴允儉) 조선 세조(世祖) 때 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박명손(朴命孫)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한 후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박종녕(朴宗寧)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낼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인조(仁祖)를 호위하였고, 강화(講和) 후 세자(世子 : 효종)가 볼모로 연경(燕京)에 갈 때 호종하였다.
박문서(朴文瑞) 조선(朝鮮)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다.
박종무(朴宗茂) 조선에서 무과에 급제한 후 호분위 부호군(虎賁衛副護軍)으로 변방인 북청(北靑)을 수호한 무장(武將)으로서 북청파(北靑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박영창(朴永昌)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천령군(天嶺君)에 봉해졌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영문(朴永文) ? ~ 1513 (중종 8)
생원(生員)으로서 무과(武科)에 급제, 연산군 때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내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일등공신(靖國一等功臣)으로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506년(중종 1) 경상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있다가 류순정(柳順汀)을 따라 부원수(副元帥)로서 삼포 왜란(三浦倭亂)을 평정한 공으로 공조 판 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간관(諫官)의 탄핵(彈劾)으로 파직되었다.
박세무(朴世茂) 1487 (성종 18) ~ 1554 (명종 9)
자는 경번(景蕃), 호는 소요당(逍遙堂), 생원(生員) 중검(仲儉)의 아들. 1516년(중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기용되고, 여러벼슬을 거쳐 헌납(獻納)이 되었다. 1539년(중종 34)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을 지내고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나가서 잘 다스렸으며, 1544년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 이듬해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 안변 부사(安邊府使), 1548년(명종 3) 내자시정(內資寺正), 후에 내섬시정(內贍寺正)․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예조 판서에 추증(追贈), 괴산(槐山)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세옹(朴世翁) 1493 (성종 24) ~ 1541 (중종 36)
자는 경운(景雲). 1519년(중종 1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2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된 후 검열(檢閱)을 거쳐 1539년 당상관(堂上官)이 되고 예조 참의(禮祖參議)를 지냈다.
이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1540년 병조․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박영란(朴英蘭)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곤(朴 崑) 조선 때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박눌(朴 訥) 조선 때 찰방(察訪)으로 학행(學行)이 높아 추앙을 받았으며, 경북(慶北) 함창(咸昌)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고 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박거린(朴巨鱗) 1506년(중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장령(掌令)을 지냈다.
박대립(朴大立) 1512 (중종 7) ~ 1584 (선조 17)
자는 수백(守伯), 호는 무위당(無衛堂), 돈령부정(敦寧府正) 세영(世榮)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양주(楊州)의 교수(敎授)로 나갔다.
형조 좌랑(刑曹佐郞) 때 정실관계려 수십년 묵은 송사(訟事)를 판서(判書)에게 항변(抗辯)하여 종결(終決)을 지음으로써 영의정(領議政) 심연원(沈連源)의 추천으로 지평(持平)이 되었다. 1567년(명종 22)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고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대사간(大司諫)․함경도 관찰사․대사헌(大司憲)․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역임, 1579년(선조 12)에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서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특진, 이조 판서․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우참찬(右參贊)․호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으며, 1582년(선조 15)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 이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다시 우찬성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박제립(朴悌立) 조선 때 곡산 군수(谷山郡守)를 지냈으며 1628년(인조6) 영사공신(寧社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박홍선(朴弘先)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대기(朴大器)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고경명(高敬命)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금산 전투(錦山戰鬪)에 참전하였었다.
박소립(朴素立) 1514 (중종 9) ~ 1582 (선조 15)
자는 예숙(豫叔).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림(士林) 출신의 신진 관리로 촉망을 받아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이조 판서 이 양(李 樑)과 사이가 나빠 1563년 이양과 친근한 대사헌 이 감(李 戡)의 탄핵으로 파면, 1개월 후 이 양이 몰려나자 부교리(副校理)로 복직,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명종(明宗)이 후사 없이 죽자 이준경(李浚慶)․이양원(李陽元) 등과 함께 선조를 즉위케 하는 데 공이 많았다. 1571년(선조 4)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박정립(朴挺立)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형린(朴亨鱗) 1517년(중종 12)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박홍린(朴洪鱗) 1523년(중종 18)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나 153 7년(중종 32) 김안로(金安老)의 정변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박사백(朴巳百)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박민헌(朴民獻) 1516 (중종 11) ~ 1586 (선조 19)
자는 희정(希正), 초자는 이정(頤正), 호는 정암(正菴)․슬간재(瑟간齋)․의속헌(醫俗軒)․저헌(樗軒), 좌랑(佐郞) 유(瑜)의 아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이 되고, 이어 수찬(修撰)을 지낸 뒤 1553년(명종 8) 사가독서(賜假讀書)했다.
후에 해남 현감(海南縣監)․수찬․지평(持平)․교리(校理) 겸 지제교(知製敎)․대사헌을 역임, 그후 강원도 관찰사로 있었다. 한때 관작(官爵)을 삭탈(削奪) 당했다가 상주목사(尙州牧使)로 기용되었다.
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부승지(副承旨)․함경 북도 병마절도사․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역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냈다.
박령(朴 苓) 조선 때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박붕린(朴鵬鱗) 1534년(중종 29)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설서(設書)에이르렀다.
박종린(朴從鱗) 1533년(중종 28)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박사립(朴思立) 조선 때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였다.
박희립(朴喜立)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한 후 길주 목사(吉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박승원(朴承源) 1562 (명종 17) ~ ?
자는 계유(季悠), 호는 설파(雪坡), 직장(直長) 대기(大器)의 아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함께 의거(義擧),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도 또다시 의병을 일으켜 임 환(林 懽)과 함께적을 격파, 이어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계원도유사(繼援都有司)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에 다시 의병을 모아 싸웠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75세의 노령으로 조행립(曺行立)과 함께 의병을 모아 군량미의 수송에 힘썼다. 뒤에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박성오(朴省吾) 조선(朝鮮) 때 북청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를 지냈으며 인조 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이 괄(李 适)의 난때 왕을 호가(扈駕)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왕을 호위하는데 공을 세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존오(朴存吾) 형(兄) 성오(省吾)와 같이 이 괄(李 适)의 난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위하는데 공을 세웠다.
박란(朴 蘭) 1544년(중종 39) 문과에 급제한 후 풍천 군수(豊川郡守)를 지냈으며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생으로 시문(詩文)에 능통하였다.
박건원(朴乾元) 조선(朝鮮)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부장(部將)을 역임하였다.
박곤원(朴坤元) 호(號)는 옥계(玉溪). 성리학(性理學)의 연구에 전념한 학자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박문(朴 雯) 호(號)는 송헌(松軒). 불교(佛敎)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박명수(朴命壽) 조선 때 도검정(都檢正)을 지냈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전주(全州) 전투에서 순절(殉節)하였다.
박준(朴 駿)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로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순절(殉節)하였으며, 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박지형(朴之亨) 1564(명종 19) 문과에 급제한 후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박간생(朴艮生) 조선조(朝鮮朝)에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박현령(朴玄齡) 조선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동생 희령(希齡)과 함께 금산 전투(錦山戰鬪)에 참가하여 순절(殉節)하였다.
박사신(朴士信) 조선(朝鮮) 때 학자로 칭송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위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策錄)되었다.
박계천(朴繼天) 조선 선조(宣祖) 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으로 책록(策錄)되었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다.
박문필(朴文弼) 조선(朝鮮) 때 우승지(右承旨)에 추증되었다.
박혼(朴 渾) 임진왜란 때 조중봉(趙重峰)과 함께 백의 종군(白衣從軍)하여 금산(金山)전투에서 순절(殉節)하였다. 그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박 침(朴 琛) 조선(朝鮮) 때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박종정(朴宗珽) 조선조(朝鮮朝)에 별제(別提)를 지냈다.
박명립(朴名立) 조선 때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를 지냈다.
박지계(朴知誡) 1573 (선조 6) ~ 1635 (인조 13)
자는 인지(仁之), 호는 잠야(潛冶), 시호는 문목(文穆), 수안 군수 (遂安郡守) 응립(應立)의 아들. 1506년(선조 39)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나 사퇴했고, 1609년(광해군 1) 좌세마(左洗馬) 겸 서연관(書筵官), 이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사포(司圃)․지평(持平)을 거쳐 1632년(인조 10) 사업(司業)․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이듬해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을 깊이 연구했고,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을 종묘(宗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주창한 바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아산(牙山)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지겸(朴知謙) 조선조(朝鮮朝)에서 별좌(別坐)를 지냈다.
박지양(朴知讓)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지경(朴知警)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박득겸(朴得謙) 조선(朝鮮)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하였다.
박득신(朴得新) 조선 때 사재소감(司宰少監)을 지냈다.
박승윤(朴承尹)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승운(朴承運) 조선 때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사성(朴斯聖) 조선 때 금오위 중랑장(金吾衛中郞將)을 지냈다.
박상진(朴相進) 조선 때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였다.
박여지(朴汝祉) 조선 때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희안(朴希顔) 1601년(선조 34)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박유충(朴由忠) 조선 선조(宣祖) 때 장악첨정(掌樂僉正)을 지냈다.
박수서(朴守緖)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종부(朴宗阜) 1600 (선조 33) ~ 1645 (인조 23)
자는 자후(子厚), 군수(郡守) 창(敞)의 아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설서(設書)․사서(司書) 등을 거쳐 1636년 정언(正言)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다. 이 해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어사(御使)로 장수산성(長壽山城)의 이배원(李培元)의 군사를 독려했고, 강화(江華)에서 해전 (海戰)으로써 적을 맞아 싸웠으나 패전했다. 1638년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고, 교리(校理)․이조 좌랑(吏曹佐郞)․헌납(獻納) 등을 거쳐 김제 군수(金提郡守)로 나갔다가 곧 병으로 사임했다.
박정저(朴廷著) 조선 인조(仁祖)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성인(朴成仁)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낼 때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박경후(朴慶後) 1644 (인조 22) ~ ?
자는 휴경(休卿), 호는 취옹(醉翁)․만오(晩悟). 1675년(숙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수찬(修撰)․정언(正言)을 거쳐 1682년 통신사(通信士)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690년 승지(承旨)․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글씨를 잘 썼다.
박정설(朴廷薛) 1651년(효종 2)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신지(朴身之) 조선 숙종(肅宗) 때 부사(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세신(朴世身) 조선 숙종(肅宗)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박희민(朴希閔) 조선 숙종(肅宗) 때 정언(正言)을 지냈다.
박성의(朴性毅)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예조 정랑(禮祖正郞)을 역임하였다.
박린(朴 璘) 조선 경종(景宗)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중경(朴重慶) 조선 영조(英祖)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박지경(朴趾慶)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박사형(朴思亨) 조선 영조(英祖)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박진우(朴鎭宇)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박서량(朴瑞良) 조선 영조(英祖)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우규(朴禹圭) 조선 정조(正祖)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박명화(朴鳴和) 조선 순조(純祖)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박주종(朴周鍾) 자는 문원(聞遠), 호는 산천(山泉), 첨정(僉正) 필녕(弼寧)의 아들. 학문이 깊었고 문장이 뛰어났다.
박성형(朴成珩) 1727년(영조 3) 문과에 급제한 후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시립(朴時立) 조선 때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다.
박재(朴 材)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박기조(朴起祖) 조선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박성로(朴聖輅) 1705년(숙종 31)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내정(朴乃貞) 1728(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박태휘(朴泰彙) 호(號)는 삼성당(三省堂). 1719년(숙종 45)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위원 군수(渭原郡守)를 역임하였다.
박현보(朴顯輔) 1783년(정조 7)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으며 송환기(宋煥箕 : 성담)의 문하생으로 학행(學行)이뛰어났다.
박원묵(朴元黙) 호(號)는 석하(石下). 조심암(趙心蓭)의 문인으로 도정(都正)을 지냈다.
박재화(朴載華) 호(號)는 관재(觀齋). 송연재(宋淵齋)의 문인으로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박주운(朴周雲) 1820 (순조 20) ~ ?
자는 목경(穆卿), 호는 경당(鏡塘), 필녕(弼寧)의 아들. 생원(生員)을 거쳐 1852년(철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문장이 능하고 수학에도 밝았다.
박시순(朴始淳) 조선 고종(高宗)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박기봉(朴基鳳) 한일 합방(韓日合邦) 후 조국의 광복운동(光復運動)에 가담하여 함북(咸北) 안변(安邊)에서 순사(殉死)하였다.
박기대(朴基大) 구한말(舊韓末)의 학자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으며 의병장(義兵將)으로 일제(日帝)에 항거하였다.
박찬희(朴燦熙) 한일 합방 이후 독립군(獨立軍)에 가담하여 활약하다 체포되어 봉천감옥(奉天監獄)에 투옥되었다가 옥사(獄死)하였다.
박열(朴 烈) 1902 (광무 6) ~ ?
본명은 준식(準植), 일명 혁(爀), 영수(英洙)의 아들. 경북 문경(聞慶) 출신. 함창(咸昌)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5세에 상경, 경성 제 2고등보통학교 사범과(師範科)에 다닐 때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퇴학당했다.
1919년 도일(渡日), 무정부주의 운동(無政府主義運動)에 투신하여 권력구조(權力構造)와 천황제(天皇制)를 반대하고, 이를 무력으로 타도하기 위해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다.
1923년 일본 천황 히로히또(裕仁)를 죽이려구 자기 애인 가네꼬(金子文子)의 협조를 얻어 거사하려던 직전에 발각, 체포되어 1926년 3월 대심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이 해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 1945년 해방으로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 일본에서 조선건설동맹(朝鮮建設同盟)을 조직, 이어 재일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고 1948년 정부수립으로 귀국했다가 6.25사변 때 납북(拉北)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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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여씨(咸陽呂氏),함양여씨시조,여어매(呂御梅),함양여씨유래,함양여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2 16:17 수정일 : 2018-02-06 16:03
함양여씨시조 및 함양여씨유래(본관)
함양여씨(咸陽呂氏)의 시조(始祖) 여어매(呂御梅)는 중국(中國) 내주(萊州) 사람으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는데,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877년(신라 헌강왕 3년)에 신라(新羅)에 귀화하여 경북(慶北)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에 정착하고 고려(高麗)에서 전서(典書)를 지냈다.
함양(咸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속함군(涑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함양군(含陽郡)이 되어 합주(陜州 : 합천)에 속하였다가 함(含)을 함(咸)으로 고쳐서 함양(咸陽)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함양현으로 강등되었으며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군(郡)이 되엇고, 1914년 안의군(安義郡)의 7개면을 병합하고 1957년에는 석복면(席卜面)을 함양면에 이속시켜 함양읍으로 승격하였다.
어매(御梅)는 두 아들 임청(林淸)과 광유(光有)를 두었는데, 임청(林淸)의 후손 자열(子列)․자장(子章)․존혁(存赫) 3형제와 광유(光有)의 계통 후손들이 함양(咸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어매(御梅)의 8세손 공계(公係)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고, 공계(公係)의 손자 칭(稱)은 조선(朝鮮)에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서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칭의 증손 자신(自新)은 뛰어난 무신(武臣)으로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두루 거쳐 중종(中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평안도(平安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청백리(淸白吏)에 오른 아들 윤철(允哲)과 함께 부자(父子)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순원(順元)의 아들로 산수(算數)를 잘했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유길(裕吉)과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를 지낸 우길(祐吉) 대(代)에서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가문은 더욱 번성하였다.
유길(裕吉)의 아들 이징(爾徵)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시문(詩文)에도 뛰어났으며 대사헌(大司憲)․도승지(都承旨)를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고, 인길(裀吉)의 아들 이재(爾載)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이량(爾亮)의 아들 성제(聖齊)는 인조(仁祖) 때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병조 판서
(兵曹判書)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한 말(韓末)에 와서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규형(圭亨)과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활약한 운형(運亨)이 함양 여씨의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양여씨(咸陽呂氏)는 남한(南韓)에 34,8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함양여씨조상인물
여광유(呂光有) 고려조(高麗朝)에 낭장(郎將)을 지냈다.
여자장(呂子章)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여온(呂 溫) 고려(高麗) 때 감무(監務)를 지냈다.
여상보(呂尙輔) 조선조에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여황(呂 黃) 조선 때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여위황(呂渭璜) 조선에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다.
여주빈(呂周賓) 조선(朝鮮)에서 판도정랑(版圖正郞)을 역임하였다.
여공손(呂公孫) 조선 때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여신수(呂神壽) 조선조(朝鮮朝)에 사과(司果)를 지냈다.
여득양(呂得陽) 조선에서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여의손(呂義孫) 조선 때 한성윤(漢城尹)을 지냈다.
여맹선(呂孟宣)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여득전(呂得全) 조선조에 한성윤(漢城尹)을 지냈다.
여보상(呂寶祥) 조선 때 보승 중랑장(保勝中郞將)을 역임하였다.
여칭(呂 稱) 1351(충정왕 3)~1423(세종 5)
자(字)는 중보(仲父), 호(號)는 화곡(樗谷), 시호(諡號)는 정평(靖平).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전법 총랑(典法摠郞)․전리 총랑(典理摠郞)․공주(公州)의 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양광․경상․전라도 조전부사(楊廣․慶尙․全羅道漕轉副使)가 되고 이어 판합문사(判閤門事)․승추부 우군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 등을 역임한 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使)가 되었다.
1402년(태종 2) 태상왕(太上王)이 된 태조(太祖)가 북행(北幸)할 때 동북면 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로 배종했으며, 1404년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겸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개성 유후사 유후(開城 留後司留後)․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 1412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서 흠문 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사직, 은거(隱居)했다.
여계(呂 稽) 조선조(朝鮮朝)에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여뇌 조선(朝鮮)에서 감찰(監察)을 지냈다.
여자근(呂自勤) 조선 때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다.
여문좌(呂文佐)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여우(呂 遇) 자(字)는 도행(道行). 1392년 조선 개국 때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호조전서(戶曹典書)․검교(檢校)를 거쳐 한성윤(漢城尹)을 역임하였다.
여형(呂 衡) 조선조(朝鮮朝)에 감사(監司)를 지냈다.
여종주(呂宗周) 조선 때 우후(虞侯)를 지냈다.
여종상(呂宗商) 조선(朝鮮)에서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여효보(呂孝輔)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여충보(呂忠輔) 조선에서 내자시 첨정(內資寺僉正)을 역임하였다.
여명보(呂明輔) 조선(朝鮮)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여호(呂 箎) 1460년(세조 6) 진사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장령(掌令)․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내고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지평(持平)이 되었다. 그 후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거쳐 황해도 도 사(黃海道都事)․자산 군사(慈山郡守)․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역임 하였다.
여승견(呂承肩) 조선(朝鮮)에서 호군(護軍)을 지냈다.
여승감(呂承堪)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여원보(呂元輔) 조선조에 충청도 절도사(忠淸道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여양보(呂良輔)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여자신(呂自新) 초명은 의보(義輔), 시호(諡號)는 정정(貞靖). 무과(武科)에 급제, 1479년(성종 10)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고, 이어 경기도․강원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1499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를 지내고 연산군(燕山君) 때 도총관(都摠管), 전라도(全羅道)와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거쳐 중종(中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 아들 윤철(允哲)과 함께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 았다.
여희화(呂希和)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여희령(呂希寧)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여윤걸(呂允傑) 조선 때 첨지(僉知)를 지냈다.
여윤수(呂允秀)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여윤철(呂允哲) 조선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내외직(內外職) 을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그가 병환으로 누웠을 때 왕(王)이 소식을 듣고 의원과 약을 내렸으나 죽고 말았다. 영변 판관(寧邊判官)으로 있을 때 모든 정사(政事)를 청렴결 백하게 처리했으므로 고을 백성들이 청백비(淸白碑)를 세웠다.
여윤무(呂允戊) 조선(朝鮮)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여대림(呂大臨)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여중온(呂仲溫)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여세응(呂世應) 조선(朝鮮)에서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여세홍(呂世弘) 조선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여세강(呂世綱) 조선에서 사과(司果)를 지냈다.
여세평(呂世平)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여희경(呂嬉卿) 자(字)는 충경(忠卿). 조선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여문망(呂文望) 자(字)는 주경(周卿). 1552년(명종 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갑산(甲山)․동래 부사(東萊府使)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여담(呂 淡) 자(字)는 약수(若水). 조선 때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을 지냈다.
여경주(呂敬周) 자(字)는 성좌(聖佐). 조선(朝鮮)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여계선(呂繼先) 1586년(선조 1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여윤신(呂潤身) 조선 때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을 지냈다.
여영원(呂瑩元) 자(字)는 희백(希伯).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하였다.
여응빈(呂應賓) 자(字)는 사은(士恩). 조선조에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지냈다.
여정방(呂定邦) 자(字)는 언우(彦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왕(王)이 파천(播遷)할 때 수문장(守門將)으로 호종(扈從)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서훈(叙勳), 함원군(咸原君)에 봉(封)해지고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여순원(呂順元) 자(字)는 복초(復初), 호(號)는 신고재(信古齋). 1595년(선조 28) 사재감 참봉(司宰監參奉)이 되고,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거쳐 선공감역(繕工監役)․주부(主簿)를 지냈다.
후에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종친부 전적(宗親府典籍)․사직서령(社稷署令)․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 등을 역임하였으며, 1614년(광해군 6)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여지순(呂持順) 자(字)는 사현(士顯).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여영원(呂榮元) ?~1627(인조 5)
자(字)는 화백(華伯), 시호(諡號)는 양장(襄壯). 1617년(광해군 19)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을 지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後金)이 쳐들 어오자 대신들의 천거로 요충(要衝)인 벽동(碧潼) 수비의 책임을 맡고 현지에 나가 고군분투(孤軍奮鬪)하다가 정세가 불리해지자 자결 했다. 1796년(정조 20)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여수길(呂受吉) 자(字)는 봉서(奉瑞). 조선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여유길(呂裕吉) 1558(명종 13)~1619(광해군 11)
자(字)는 덕부(德夫), 호(號)는 춘강(春江),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순원(順元)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호조 정랑(戶曹正郞) 등을 거쳐 1593년 헌납(憲納)이 되고, 1599년 공주 목사(公州牧使), 1601년 장령 (掌令), 이듬해 사예(司藝)를 거쳐 양주 목사(楊洲牧使)를 역임하였다. 1604년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된 실록(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 1606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607년 사옹원정(司饔院正)․봉상시정(奉常寺正)을 역임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국장도감 도청(國葬都監都廳)이 되고 1610년 (광해군 2)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승진, 1612년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러 노부모를 위해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자청, 1618년 병으로 사직했다. 산수(算數)를 잘 했다.
여지길(呂祉吉) 자(字)는 수부(受夫). 조선에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여우길(呂祐吉) 1567(명종 22)~?
자(字)는 상부(尙夫), 호(號)는 치계(稚溪).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순원(順元)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1591년(선조 2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으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밀양 부사(密陽府使)를 역임했다.
1607년(선조 40)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일본에, 1614년(광해군 6)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18년(광해군 10)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여위로(呂渭老) 자(字)는 군보(君輔).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내섬시 봉사(內贍寺奉事)가 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병조 좌랑(兵曹佐郞)․비인현감(庇仁縣監)․호조좌랑(戶曹佐郞)․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지냈다.
여위량(呂渭良)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여이관(呂爾寬) 조선(朝鮮)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여영학(呂盈壑)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판관(判官)으로서 역전(力戰)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후에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여여충(呂汝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통영(統營)․한산도(閑山島) 싸움에서 많은 공(功)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그의 충성을 상소(上疏)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추증(追贈)되었다.
여이징(呂爾徵) 1588(선조 21)~1656(효종 7)
자(字)는 자구(子久), 호(號)는 동강(東江),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유길(裕吉)의 아들. 한백겸(韓百謙)의 문인. 1610년(광해군 2) 생원(生員)이 되고, 1616년 경안도찰방(慶安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양강(楊江)에 은거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에 사포서 별좌(司圃署別坐)에 임명 되었으나 사퇴, 1624년(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162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각각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兵曹)․예조(禮曹)의 참판 (參判)을 역임했다.
1636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1641년(인조 19)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뒤에 부빈객(副賓客)으로 기용되고, 대사성(大司成)․대사헌(大司憲)․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부제학(副提學)․도승지(都承旨)․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나 많은 묘비명(墓碑銘)을 찬(撰)했고, 천문(天文)․역산(曆算)․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여이재(呂爾載) 1600(선조 33)~1665(현종 6)
자(字)는 자후(子厚), 호(號)는 해옹(海翁), 시호(諡號)는 숙헌(肅憲), 총관(摠管) 인길(裀吉)의 아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1619년(광해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7년(인조 15)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이 되고 이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병조의 좌랑(佐郞)과 정언(正言)을 역임, 1644년 심기원(沈器遠)이 모반하자 구인후(具仁垕)를 도와 이를 토평하여 영국공신(寧國功臣) 3등이 되고 지평(持平)에 승진했다가 사직했다.
그후 오위장(五衛將)․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1646년 형방 승지(刑房承旨)로 류 탁(柳 濯)을 친국(親鞫)할 때 왕을 보좌한 공으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승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뒤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1662년(현종 3) 한성부 판윤(漢城府判 尹)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여성제(呂聖齊) 1624(인조 3)~1691(숙종 17)
자(字)는 희천(希天), 호(號)는 운포(雲浦), 시호(諡號)는 정혜(靖惠), 부사(府使) 이량(爾亮)의 아들. 참판(參判) 이징(爾徵)에게 입양. 1650년(효종 1) 생원(生員)이 되고, 1654년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해 가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검열(檢閱)에 등용되 었다. 1665년(현종 6) 북평사(北評事), 이어 집의(執義)․동부승지(同副承旨)․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고, 좌부승지(左副承旨)․대사간(大司諫)․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1678년(숙종 4) 강릉 부사(江陵府使)에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특진, 1680년 보사공신(保社功臣)의 추록(追錄)을 반대하다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앞서 현종(顯宗)의 국상 때 도감(都監)으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뒤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1684년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고, 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후 1688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해 남구만(南九萬)과 함께 동평군(東平君) 항(杭)에 대한 왕의 지나친 총애(寵愛)를 간(諫)하다가 경원(慶源)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하여 사직,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전임했다.
이때 남인(南人)들이 성 혼(成 渾)․이 이(李 珥)를 무고하여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하려 하자, 그 불가함을 진소(陳疏)한 후 앞서 성 혼․이 이를 문묘에 배향할 때 관계관이었다 해서 스스로 청죄(請罪)한 후 고향에 갔다가 이해 상경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 위(廢位)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여합제(呂合齊) 자(字)는 경삼(景三).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여규제(呂奎齊) 자(字)는 취오(聚五).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여익제(呂翼齊) 자(字)는 태서(泰瑞).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여겸제(呂謙齊) 자(字)는 백공(伯恭).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여회제(呂會齊) 자(字)는 여로(汝魯), 호(號)는 동은(洞隱). 1652년(효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후에 직강(直講)을 거쳐 예조(禮曹)․병조 좌랑(兵曹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장령(掌令),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으며,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여민제(呂閔齊) 자(字)는 여효(汝孝). 1648년(인조 26) 생원(生員)이 되 고,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 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집 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재령 군수(載寧郡守)․강릉 부사(江陵府使)․ 철원 부사(鐵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여윤제(呂尹齊) 자(字)는 임여(任汝). 조선(朝鮮) 때 철원 부사(鐵原府 使)를 지냈다.
여필중(呂必重) 자(字)는 대이(大而). 조선 때 장령(掌令)를 역임하였다.
여필관(呂必寬) 자(字)는 율경(栗卿). 조선조(朝鮮朝)에 금산 군수(錦山 郡守)를 지냈다.
여필용(呂必容) 자(字)는 휴경(休卿). 1683년(숙종 9) 증광문과(增廣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집의(執義)를 거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병조(兵曹)․예 조(禮曹)․공조 참의(工曹參議), 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 참판 (兵曹參判)을 역임하고 강원도 감사(江原道監司)를 지냈다.
여필희(呂必禧) 자(字)는 수경(受卿). 1685년(숙종 11) 알성문과(謁聖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시강원 설서 (侍講院說書)․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고, 암행어사(暗行御史)․ 관서 장시도사(關西掌試都事)․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를 지냈다.
여광주(呂光周) 자(字)는 사중(師中). 1709년(숙종 35) 알성문과(謁聖文 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교리(校理)․장령(掌令)을 지냈다.
여광세(呂光世)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여광헌(呂光憲) 자(字)는 사장(士章). 1721년(경종 1) 정시문과(庭試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여응주(呂應周) 자(字)는 사여(士餘). 조선(朝鮮) 때 금부도사(禁府都 事)를 지냈다.
여명주(呂命周) 자(字)는 사신(士新).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여필선(呂必善)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이 난(亂)을 일으키 자 도순무사(都巡撫使)의 막부록(幕府錄)으로 출정(出征)하여 공(功) 을 세워 공신(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현감(縣監)․군수(郡守)를 지 냈다.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여영조(呂榮祖) 자(字)는 술보(述甫). 1741년(영조17) 식년문과(式年文 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군수(郡守) 를 지냈다.
여선응(呂善應) 자(字)는 백언(伯言). 1739년(영조 12) 정시문과(庭試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조(兵曹)․이조 좌랑(吏曹佐郞), 병조 (兵曹)․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간 (司諫),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집의(執義), 시강원 사서(侍講院司 書)․보덕(輔德)․장악원정(掌樂院正)․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내 고, 춘천(春川)․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그후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 旨)․의금부 부총관(義禁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여선덕(呂善德) 자(字)는 민중(敏中). 1756년(영조 32) 진사시(進士試) 에 합격하여 원릉 참봉(原陵參奉)을 지내고, 1763년(영조 29) 증광문 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임명되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함경도 장시도사(咸鏡道掌試都事) 를 지냈다.
후에 병조 참지(兵曹參知)․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고, 문천 군수(文川郡守)․경원 목사(慶源牧使)․능주 목사(綾州牧使) 등을 지 냈다.
여선장(呂善長) 자(字)는 원백(元伯), 호(號)는 어은(漁隱). 1719년(숙종 45) 진사(進士)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문 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홍문관 수찬 (弘文館修撰)․교리(校理)․응교(應敎), 이조(吏曹)․병조 정랑(兵曹正 郞), 이조(吏曹)․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고, 승정원 승지 (承政院承旨)에 이르렀다.
여선형(呂善亨) 자(字)는 군회(君會). 1751년(영조 27) 정시문과(庭試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사간 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집의(執義),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필선(弼善)․보덕(輔德) 등을 역임하고, 사복시정 (司僕寺正)에 이르렀다.
후에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우윤(右 尹), 예조(禮曹)․호조 참판(戶曹參判)․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 등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후 외직으로 나가 부안 현감 (扶安縣監)․서산 군수(瑞山郡守)․홍주 목사(洪州牧使)․완주 목사 (完州牧使)를 지냈다.
여만영(呂萬永) 자(字)는 경뢰(景賴). 1771년(영조 48) 생원(生員)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 閱)이 되고, 대교(待敎)를 거쳐 병조 정랑(兵曹正郞)․병조 좌랑(兵曹 佐郞)․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등을 지냈다.
여춘영(呂春永) 자(字)는 경인(景仁), 호(號)는 헌적(軒適). 조선 때 오 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여동식(呂東植) 자(字)는 우렴(友濂), 호(號)는 만회(晩悔). 조선조(朝鮮 朝)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여동규(呂東奎) 자(字)는 군계(君啓), 호(號)는 만포(晩圃).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여규형(呂圭亨) 1849(헌종 15)~1922
자(字)는 사원(士元), 호(號)는 하정(荷亭). 풍섭(豊燮)의 아들. 경기 도 양근(楊根)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에 정진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지(承旨)를 거쳐 1895년(고종 32)에 제도 개편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
한일합방 후 제일고등보통학교(第一高等普通學校 : 경기중학교) 한 문교사를 지냈고, 시․서화․불경에 모두 능통해 살아있는「사문유 취(事文類聚)」로 일컬어졌다.
1916년 오세창(吳世昌)․장지연(張志淵) 등과 「대동시선(大東詩 選)」을 편집했다. 광대들이 부르던 「춘향가(春香歌)」를 중국의 「서상기(西廂記)」문체(文體)를 모방하여 희작(戱作)한 「춘향전(春 香傳)」이 전한다.
여태현(呂泰鉉) 한말(韓末)에 전서(典書)를 지냈다.
여운형(呂運亨) 1885(고종 22)~1947
호(號)는 몽양(夢陽), 정현(鼎鉉)의 아들. 경기도 양평(楊平) 출신. 배재학당(培材學堂)․흥화학교(興化學校)를 중퇴, 우무학당(郵務學堂) 을 졸업, 1909년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했고, 이 듬해 기독교에 입교한 뒤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했다가 중 퇴, 1914년 중국에 건너가 남경(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 학을 전공하다가 중단했다.
협화서국(協和書局)에 근무하면서 교민단 단장(僑民團團長)에 선임 되고, 1918년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개최된다는 소 식을 듣고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신한청년당 (新韓靑年黨)을 조직, 총무간사(總務幹事)에 선임되어 김규식(金奎植) 을 파견했고, 이듬해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수립에 참여 하여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이 되었다.
이해 겨울 일본이 조선의 자치문제에 대해 의견을 타진해 오자 장 덕수(張德秀) 등과 일본에 건너가 일본조야(日本朝野)의 각계 인사들 에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적극 역설하고 돌아왔다.
1920년 고려 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열 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遠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하고 돌아와 중 국의 손 문(孫 文)과 협력하여 중국혁명(中國革命)을 적극 추진했고, 1929년 영국의 식민 정책을 비판했다가 영국 경찰에 피체, 일본 경 찰에 인도되어 나가사끼(長崎)를 거쳐 본국에 압송, 제령위반죄(制令 違反罪)로 3년간 복역했다.
1933년 출옥하여 중앙일보(中央日報) 사장으로 있다가 사직, 1944 년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비밀단체 조선 건국연맹(朝鮮建國聯盟) 을 조직하여 위원장에 취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8월 15일 해방되자 건국연맹의 기반을 확대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이해 9월 조선인민공화국(朝鮮 人民共和國)을 선포, 스스로 부주석(副主席)이 되었으나 우익(右翼) 진영의 반대를 받은 위에 미 점령군 당국(美占領軍當局)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12월 인민당(人民黨)을 조직, 이듬해 29개의 좌익(左翼) 단체를 규 합하여 민전(民戰 :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 의장단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좌경(左傾)에 반대하고 이를 탈퇴, 근로 인민당(勤勞人民黨)을 조직하여 당수로서 좌파 온건세력을 규합, 정치활동을 하다가 한지근(韓智根)에 의해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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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咸陽吳氏) 시조 오광휘(吳光輝): 득관조의 휘는 광휘요 자는 유원(攸元)이며 호는 송천(松泉)이다
작성일 : 2017-04-24 14:30 수정일 : 2018-02-05 12:48
함양오씨(咸陽吳氏)의 약사(略史)
1)관향 함양(貫鄕 咸陽): 함양은 전북과 경계한 소백산맥 동부의 서부경남에 위치한 고을로 문헌상 최초의 이름은 속함(速咸)이다. 원래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완충지대로서 가야땅 이었으나 진흥왕의 정복으로 속함군이라 명명하였다가 경덕왕 때(757) 천령군(天嶺郡)이라 개칭하였다. 속현이 둘인데 운봉현(전북)과 안의현이었다, 고려 성종때(959)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되었으나 현종때(1012) 함양군(含陽郡)→인종때 “含“자를 ”咸“자로 고쳐 咸陽郡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4년 안의군 7개면을 합쳐 현함양군 영역이 되었으며 1957년 함양면과 석복면을 합쳐 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산수가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하며 인심이 순후하고 좌안동 우함양(左安東 右咸陽)이라는 말처럼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보사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도래한 동방오씨족이 처음으로 정거한 곳이 이곳 함양이다. 이런 연유로 시조공께서 함양부원군으로 봉군되고 또 이곳으로 귀거래하여 선화(仙化)하였으므로 함양을 관향으로 조종발상의 조토(祚土)로 삼게 되었다.
2) 동국오씨 소종래(東國吳氏 所從來): 오씨는 원래 토착성이나 사성(賜姓)이 아니라 중국에서 도래한 이주민의 성이다. 그러므로 분관(分貫)되기 전의 오씨를 총칭하여 동국오씨라 한다. 최초로 吳姓을 사성받은 사람은 오나라 마지막 왕 부차(夫差)의 손자 누양(縷羊)으로 위(衛)나라에 정주했을 때 위왕이 오나라에서 왔다하여 사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양 후에 전국시대 병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가 있고 오기의 후예(45세손)에 오첨(吳瞻)이 있었다.
중국의 5-6세기(418-589)는 5호16국→남북조시대(五胡十六國→南北朝時代: )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정치적 혼란을 피하여 한반도로 이주해 왔다. 그시기에 오씨족도 서해안 해남에 이주하여 반도의 서남부에 많이 살았는데, 추앙받을 대표적 상징적 인물이 강남지역에서 무역하다가 동래한(500) 오첨공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동국오씨의 상계(上系)는 오첨공을 비조로하여 연원하고 그가 동래한 지증왕(智證王) 원년(500년 庚辰)을 동래원년으로 삼고 있다. 신라에 귀속한 첨공의 아들(2세) 오응(吳膺)은 진흥왕이 가야지방을 정복한 560년대에 속함땅의 관백이 되어 현 함양땅에 정거의 터전을 잡았다. 이래 자손들은 함양을 중심으로 영․호남에 흐터져 살게 되었다.
동국오씨 상계는 무혜공(武惠公) 오첨의 한반도 서남방 동래설과 영호남 정거설을 바탕에 깔고 24세계(世系)로 계열화 되어 있다. 그중 역사상 활약한 현조들은 7세기의 오기(吳起: 三國史記 문무왕조: 화랑세기 필사본 위작논쟁에서 김씨설도 있음), 9세기의 오다련(吳多憐: 장화왕후 父), 10세기의 장화왕후(莊花王后 吳氏: 고려태조비), 11세기 여진정벌의 오연총장군(吳延寵: 예종조)등이다. 23세 오수권(守權)의 아들(24세) 현보(賢輔; 海州君), 현좌(賢佐; 高敞君), 현필(賢弼; 寶城君)공에 이르러 12세기경 각관 오씨로 분적하게 되었다.
3) 함양오씨 시조 오광휘(吳光輝): 득관조의 휘는 광휘요 자는 유원(攸元)이며 호는 송천(松泉)이다. 고려 명종조에서 고종연간에 활약하였으나 생졸년은 미상이다. 문과에 장원하여 유학진흥에 공헌하였으므로 벼슬이 상서성 좌복야(左僕射)에 이르고 흥위위(興威衛) 상장군이 되어 활약하였다. 고종초 명주(溟洲)와 삼척등지의 반적을 토멸하여 평화를 얻고 북쪽 거란의 침입을 무찌른 공적으로 추충정난광국공신(推忠靖難匡國功臣) 일등훈에 책록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진 문무겸전 입상출장(入相出將)의 대인풍이었다.
그러나 만년 치사(致仕) 낙향하여 임천(林泉)간에서 시서로 자오(自娛)하다가 천년(天年)을 다하였다. 군남(郡南) 화장산(花藏山) 남록 자자원(子坐原)에 예장하고 文度의 시호가 내리니 이로부터 자손들이 보성오씨에서 분적하여 함양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연면하였다. 묘소는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뒷산 화장산에 보존되어 있고 시조공의 신도비와 재사(齋祠) 즉, 영화재(永華齋), 회동사(晦洞祠) 및 묘정비(廟庭碑)등이 마련되어 있다.
시조공은 아들 넷이 있었는데 백(伯) 열(列)은 산관(散官)이요, 중(仲) 홍예(洪芮)는 함양군(咸陽君)울 습봉하였으며, 숙(叔) 양예(良芮)는 한림학사이고, 계(季) 완(完)은 흥양으로 분관되었다. 음덕입어 창성한 예손들은 오늘날 40여종파로 분파되어 영호남에 산거하고 있다. 2015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함양오씨는 남한에 35,8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함양오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오홍예(洪芮: 2世): 고종조 정의대부로 비서성소감(秘書省少監)을 거쳐 금자광록 대부 개부이(開府儀)로 훈업을 계승하고 함양군(咸陽君)을 습봉하여 명문의 터전을 다졌다.
오현석(玄碩: 4세): 호는 삼세당으로 충렬왕조 문과에 등제, 은청광록대부로 이부 상서를 역임하였다.
오일악(一鶚: 5세): 호는 휴재(休齋)로 공민왕조 예부작랑(禮部直郞)에서 누진하여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문장이 뛰어나 많은 발원문(發願文)을 국왕에게 받치는 국왕 측근이었으나 신돈파로 몰려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향리로 은퇴하였다.
오상덕(尙德: 6세): 호는 두암(杜菴)으로 공민왕조 소부사소감(少府寺少監)을 역임 하고 유학진흥과 풍속교정에 힘써 대유로 추앙되었으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남원으로 은퇴하여 불사이군하엿다. 조선시대 아들 7형제가 외숙 황희(黃喜)의 인도로 높은 관직에 나갔으므로 이조판서가 증직되고 남원 술산사(述山祠)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 인물
오치선(致善: 7世): 호는 수심재(修心齋)로 외숙 황희의 권유로 세종때 출사하여 소윤(少尹)때 아우 치행(致行)과 함께 좌익원종공신에 훈록되었으며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오경지(敬之: 7世): 판서공 봉길(逢吉)의 아들로 호는 성와(惺窩). 세종2년(1420) 대과(大科)에 등제하여 왜국 회려사(回禮使)의 서장관으로 활약하였으며 누진하여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오응(凝: 8세): 호는 금남재(錦南齋)로 세종3년(1421)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을 떨쳤다. 부승지, 한성좌윤, 함길도․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한후 남원에 금남재를 지어 수장처로 삼았다.
오상문(尙文: 7세): 자는 선찬(先贊)으로 문종1년(1451) 문과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흥양현감, 의정부 사인(舍人)을 역임한 후 향리 거창으로 은퇴하여 시문에 열중하였다.
오능(凌: 8世): 자는 허수(虛受)로 성종14(1483) 문과등제, 사간원 헌납, 선산부사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선산부사시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다.
오건(健; 12世): 호는 덕계(德溪)요 자는 자강(子强)으로 산청(山淸)에 살았다. 극 진한 효성으로 명종으로부터 복호(復戶)의 은전을 입었다. 남명 조식(曺植)의 수무인이요 퇴계 이황(李滉)의 고제(賜祭文 제찬)로 명종13년(1558) 대과에 급제하였다. 삼사(三司) 및 이조정랑(吏曹正郞)등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知制敎 兼 經筵侍講官)으로 도학정치를 실현코자 학문과 도덕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명종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마지막으로 치사하였다. 이조정랑 때 김효원(金孝元)을 후임으로 추천하였으나 외척들에 의하여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이 좌절되자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남명․퇴계가 서거한 후 향리에서 문인들의 교학에 여생을 받쳤다. 문인 한강 정구(鄭逑)등이 산청에 서계서원 (西溪書院)을 창건하여 배향(1620)하였는데 숙종3년(1677)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덕계선생문집」 6책과 「역년일기」(歷年日記)등이 남아 있다.
오한(僩: 12世): 오건의 종제로 호는 수오당(守吾堂)이다. 조식선생의 고제로 “안성이 간결하고 행위가 간결하여 남주제1인(南州第1人)”이라 칭송반은 학자이다. 향인의 추중으로 서호사(西湖祠)에 제향하였으나 훼철된 후 서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수오당실기」가 전한다.
오희남(希南: 1543-1593): 자는 열초(悅初)로 거창의 충렬사이다. 문무를 겸비한 걸인으로 용사(龍蛇)의 난때 창의하여 진주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자 그곳으로 가 수문장으로 용전분투하다가 성의 함락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하고 병조참의를 증직하였으며 진주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하였다.
오빈(玭: 1547-1593): 호는 성산(聖山)으로 선조23년(1590) 문과 증광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기 되었다. 임란이 발발하자 창의하여 고경명(高敬命)휘하에서 싸우다가 계사년 진주성전투에 참전하여 혈투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조정에서는 충신 장사랑(忠臣將仕郞)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고향에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 진안의 대한이산묘 영모사(大韓이山廟 永慕祠)에 배향되어 있다.
오익창(益昌: 1557-1640): 호는 사호(沙湖)로 고창군 무장(茂長)에 살았다. 무장에 서 창의하여 피란민과 민간선박을 동원하여 이순신통제사에게 군량미, 의복등을 공급하는 등 큰공을 세웠다. 발탁되어 형조․공조좌랑을 역임하고 익사원종공신(翼社原從功臣)이 되었으나 만년 향리에서 학문에 힘썼다. 향유의 추중을 받아 무장 죽산사(竹山祠)의 주벽으로 배향되었으며 「사호선생문집」 2권이 있다.
오극성(克成: 1559-1617): 호는 문월당(文月堂)으로 영양(英陽)에 살았다. 무과출신인 공은 임란이 발발하자 두아우 윤성(允成), 득성(得成)과 함께 창의하였다. 선전관으로 특제되어 권율장군 휘하에서 활동하고 황간(黃澗)현감으로 선정을 베풀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통제사 막하에서 분전하였다. 군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영양 임고서원(臨皐書院)에 배향, 또 대구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봉안되어 있다.「문월당선생문집」상하권이 있다.
오장(長: 1565-1616): 호는 사호(思湖). 산음(山陰)의 절기지사로 문장과 글씨의 대가이다. 임란이 발발하자 당숙 오현(吳俔)과 함께 산음의 기병유사(起兵有司)가 되어 800의병을 소모하고 초유사 김성일 막하에서 군기를 협의하고 진안현감으로 발탁되어 호남 10군열병을 인솔하여 진주 제석산성(帝錫山城)을 쌓는 활약을 하였다.
광해2년(1612) 대과에 등제하여 정언(正言)이 제수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영창대군의 증살을 규탄하던 절기지사 동계 정온(桐溪 鄭縕)이 제주도로 유배당하자 영남유림을 대표하여 신구동계소(伸救桐溪疎)란 상소문을 제찬하였다가 적신을 두둔하였다는 죄명으로 황해도 토산(兎山)으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원사하였다. 인조반정후 좌승지가 증직되고 산청 서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또한 대구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봉안되어 있다. 사호선생문집(思湖先生文集) 4권이 있다.
오찬조(纘祖: 1572-1630): 호는 영회정(永懷亭)으로 남원에 살았다, 선조26년(1593) 무과에 등제한 공은 임란때 동관(潼關)을 사수하고 정유재란때 남원이 함락되자 의병장 조경남(趙慶男)과 함께 중군선봉장이 되어 호남 각처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의 포양장계로 공은 어모절충장군에 오르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케 되었다,
오전( 전 :1581-1630): 호는 절암(節菴)으로 무장에 살았다. 광해7년(1615) 대과에 급제하여 광양현감, 의정부 사인(舍人)을 역임하였으나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곡을 모아 충의를 다하였다. 친환으로 인하여 경직에서 용담현감으로 나와 효성을 다하니 공의 충효행을 추앙한 향인들이 죽산사(竹山寺)에 배향하였다.
오세웅(世熊: 1633-1685): 호는 운담(雲潭)으로 운봉에 살았다, 호남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문인들의 교학에 힘썼다. 공의 학행과 효행을 추중한 향인들은 덕림사(德林祠)를 세워 제향하였다. 「운담집」 상하권이 있다.
3)근대인물
오석준(錫浚: 1864-1859): 호는 물와(勿窩)로 영양의 항알 독립토사이다. 1911년 파리장서운동(長書運動)에 참여하고 1919년 영양의 3․1만세운동을 선창주도하다다 군민 136면과 함꼐 체포되어 안동, 대구, 서대문형무소를 옮겨가며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는등 평생을 조국광복애 투신하였다. 옥중에서 집필한 음설록 물와유고등이 있다. 건국훈장 애국장과 독립운동유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오기열(基烈: 1889-1950): 호는 둔암(遯菴)으로 진안의 독립애국지사이다. 약과의 나이로 정미호남창의동맹(1907)에 참여, 1919년 진안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생활, 1921년 전북군무총장(軍務總長)으로 독랍청년군을 조직하였다가 다시 1년의 옥고를 치르는 형극의 길을 걸었다. 광복후 진안의 제헌국회의원이 되어 반민특위 조사․ 징계위원으로 활약하였으나 6․25동란때 광주에서 순국하였다. 국민훈장무궁화장과 독립운동유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오재균(栽均: 1908-1982): 호는 포상(浦上)으로 고창사람으로 풍미양행(豐美洋行)을 경영한 실업가이다. 목포신문사장, 6․25동란시 목포해상방의대장등을 역임. 부산에서 풍미양행을 경영하며 문화재위원으로 학술지 발간과 종사(宗事)성취에 전력을 쏟았다.
오규환(珪煥: 1916-1993): 호는 소광(昭光)으로 산청에 살았다. 인간문화재요 대유학자이다. 선고와 함께 향교재단을 설립하여 산청명륜중학(山淸明倫中學校)을 설립하고 산청문화원 이사장을 역임. 지리산평화제 문화상과 평화대상을 수상하였다. 「인생궤도」, “덕계 오건의 인간상” 등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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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와 代. 世孫과 代孫, 世祖와 代祖에 대하여 – 3
daum blog ’함양박씨 정랑공파‘에 게재되어 있는 세와 대에 대하여 사례를 들어 자세히 설명된 글입니다.
원문은 【...............】 로 나타내고 아래에 소견)은 올린 자료에서 필자가 표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였습니다.
【 (10) 국역 증보문헌비고에서 함양 박씨(咸陽朴氏) 시조(始祖) 박선(朴善)
〔속함군(速咸君) 박언신(朴彦信)의 후손인데,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어떤 책에서는 박선의 후손 박인정(朴仁挺)을 시조라 하였다.〕
박인정(朴仁挺)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서 벼슬이 예부 상서(禮部尙書)였다.〕
*박인정의 6세손 박충좌(朴忠佐) 〔문과 출신으로 함양 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가 문제공(文齊公)으로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박충좌의 6세손 박영창(朴永昌) 〔공신으로서 천령군(天嶺君)에 봉해졌다.〕
박영창의 손자 박민헌(朴民獻)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판(參判)이었으며 호당(湖堂)에 뽑혔다.〕
박인정의 후손 박눌(朴訥)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박눌의 아들 박홍린(朴洪鱗)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었으며, 호당에 뽑혔다.〕
*박인정의 9세손 박습(朴習)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였다.〕
박습의 현손(玄孫) 박세무(朴世茂)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군자감 정(軍資監正)이었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박세무의 아들 박소립(朴素立)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였다.〕
박세무의 조카 박대립(朴大立)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찬성이었다.〕
박소립의 조카 박지계(朴知誡) 〔유일로서 벼슬이 승지(承旨)였다.
시호가 문목공(文穆公)인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박공비(朴公庇) 〔진사(進士)였는데, 한 파를 이루었다.〕
박하신(朴荷信) 〔벼슬이 소윤(少尹)이었는데, 한 파를 이루었다.】
【# 박인정의 6세손 박충좌
2세(인정), 3세(신청), 4세(윤정), 5세(신유), 6세(지빈), 7세(장), 8세(충좌)
여기서도 기준 인물(주격)인 인정 선조님은 제외 되었습니다.
즉, 6세손=6대손 의 증거입니다.】
소견)
2세 - → 3세 -→ 4세 -→ 5세 -→ 6세 - → 7세 --→ 8세
인정----신청----윤정----신유----지빈------장------충좌
(기준)---1세손---2세손---3세손---4세손---5세손---6세손
(기준)---1대손---2대손---3대손---4대손---5대손---6대손
*8세 휘 충좌는 2세 휘 인정의 6세손(=6대손)입니다.
【# 충좌의 6세손 박영창
8세(충좌), 9, 10, 11, 12, 13, 14세(영창)
역시 6세손과 6대손을 같은 의미로 파악한 증거입니다.】
소견)
8세 - -→ 9 - - → 10 - → 11 -- → 12 - → 13 - → 14세
충좌--------------------------------------------------영창
(기준)---1세손---2세손---3세손---4세손---5세손---6세손
(기준)---1대손---2대손---3대손---4대손---5대손---6대손
* 14세 휘 영창은 8세인 휘 충좌의 6세손(=6대손)입니다.
【# 박인정의 9세손 박습
2세(인정), 3세(신청), 4세(윤정), 5세(신유), 6세(지수), 7세(우), 8세(인계), 9세(원렴), 10세(덕상), 11세(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몇 대손'으로 표기하면 9대손 입니다.
9세손=9대손이며 세와 대는 동의이며 세손이나 대손이나 기준 인물인 주격은 계산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소견)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11세
인정---신청----윤정----신유---지수------우-----인계----원렴---덕상-----습
(기준)--1세손—2세손—3세손—4세손—5세손—6세손—7세손—8세손--9세손
(기준)--1대손—2대손—3대손—4대손—5대손—6대손—7대손—8대손--9대손
*11세 휘 습은 2세 휘 인정의 9세손(=9대손)입니다.
세와 대는 같은 뜻(同義동의)으로 읽는 ’동의론‘의 원칙은 아래와 같습니다.
◈ 세=대
– 세는 대와 같은 뜻으로 사용합니다.
1세=1대......5세=5대......20세=20대.....40세=40대
고조 → 증조 → 조 -→ 부 -→ 기(나)
(1세)----2세----3세--- 4세----5세 – 고조부를 1세(=1대)로 한 경우
(1대)----2대----3대----4대----5대
5세-----4세----3세----2세----(1세) - 나를 1세(=1대_로 한 경우
5대-----4대----3대----2대----(1대)
◈ 세손=대손
- 세손과 대손은 같은 뜻으로 조손간에 항상 윗대를 기준으로 하되 기준은 헤아리지 않고 기준의 아래를 1. 2. 3 등으로 순번대로 헤아려 읽은 수 뒤에 붙여 읽는 용어이자 단위입니다.
고조 - → 증조 --→ 조 ---→ 부 ---→ 기(나)
(기준)---1세손-----2세손----3세손----4세손 - 고조부의 '몇 세손'
(기준)---1대손-----2대손----3대손----4대손 - 고조부의 '몇 대손'
◈ 세조=대조
- 세조과 대조는 같은 뜻으로 손조 간에 항상 아랫대를 기준으로 하되 기준은 헤아리지 않고 기준의 위로 1. 2. 3....으로 순번대로 헤아려 읽은 수 뒤에 붙여 읽는 용어이자 단위입니다.
고조 -→ 증조 → 조 ---→ 부 ---→ 기(나)
4세조---3세조---2세조---1세조----(기준) - 나의 '몇 세조'
4대조---3대조---2대조---1대조----(기준) - 나의 '몇 대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