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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4:14-16 믿음의 고백의 실제
“아버지, 당신의 말씀은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와 자비를 얻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은혜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지금 나는 도움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존 오스틴 『믿음의 말씀 고백집』 김진호 옮김. p. 124.)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는 것이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우리들의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들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과연 어떤 고백들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기를 구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들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모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들이 마땅히 붙들어야 함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해서 붙들지 못하고 놓치고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이제 우리들을 위하여 “다 회복하였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것은 이루지 못한 것처럼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다 이루신 것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원수 마귀는 우리들의 신분이 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변화된 신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패배시켜서 무력화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에게 권세가 있는 것으로 성도들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음이 있어서 그 권리를 주장하면 할 수 없이 그들은 뒤로 물러가지만 믿음이 없으면 그들은 성도들을 속이고 자신의 자리를 주장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권리를 배우고 믿음으로 주장하여 우리들의 권리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주장해야 할 권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들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무엇을 고백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은혜의 보좌 앞에서 첫 번째로 고백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계시로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구약의 백성들처럼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개정)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왕의 왕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런 하나님과 교제의 문이 열리고 회복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떨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개정)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개정)
둘째로 우리들의 경영하는 범사가 형통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39대의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주를 상징하는 가시관을 쓰시고 고난을 받으시며 희롱을 받으셨습니다.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마 27:29, 개정)
(막 15:15, 개정)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막 15:16, 개정)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막 15:17, 개정)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막 15:18, 개정)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막 15:19, 개정)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막 15:20, 개정)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님께서 쓰신 이 가시관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저주로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 개정)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서 저주의 가시채와 엉겅퀴가 사라지도록 구해야 합니다. 이런 형통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신명기 28장에서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이와같은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서 우리들의 권리를 주장해야 합니다. 형통하고 잘되는 것은 우리들의 권리입니다.
(신 28:1, 개정)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2, 개정)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신 28:3, 개정)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개정)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개정)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6, 개정)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7, 개정)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신 28:8, 개정)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신 28:9, 개정)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어느날 기도하는데 신명기 28장 8절 말씀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들이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신명기 28장 4절에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우리의 자녀들이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행하는 것이 변변치 못하며 우리들의 자녀들이 잘되지 못하였을까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고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어느날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있을 때 귀신이 예수님과 해긴 목사님 사이에 끼어서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해긴 목사님은 예수님의 귀한 음성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귀신의 방해로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귀신을 꾸짖어서 쫓아버렸습니다. 그때 해긴 목사님에게 예수님께서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네가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 나도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씀하시자 해긴 목사님이 놀라시면서 예수님께 재차 묻고 듣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다루기를 거절하셨던 귀신
1952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상 가운데 제게 나타나셔서 약한 시간 반 가량 마귀와 귀신과 귀신들림에 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환상의 끝 부분에 가서 작은 원숭이나 난장이같이 보이는 한 악한 영이 예수님과 나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연기막이나 어두운 구름 같은 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귀신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야케티 약, 야케티 약, 야케티 약” 하면서 위 아래로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도 없고 그의 말씀하시는 것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이 전 과정의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내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주의 깊게 본다면 당신을 괴롭혀 왔던 많은 것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왜 그 귀신이 그토록 소란을 피우도록 내버려 두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내가 직접 들을 수 있도록 그 귀신을 꾸짖으시지 않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나는 몇 분간 잠자코 기다렸으나 예수님은 그 귀신에 대항하여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고 계셨으나 나는 그가 말씀하고 있는 바를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꼭 들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귀, 귀신들에 대해 어떻게 권세를 사용하는지에 관하여 내게 가르쳐 주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혼자 ‘주님은 내가 듣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는데 그걸 다 놓치다니…, 나는 거의 하얗게 질렸습니다.
나는 매우 절실하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더러운 영아,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멈출지어다!”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그 작은 귀신은 마치 소금자루처럼 바닥에 꼬꾸라졌고 검은 구름은 사라졌습니다. 나를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입을 닥칠뿐만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여기서 나가라!”고 명령하자 그는 도망가 버렸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아셨습니다. ‘왜 그 귀신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을까? 왜 그런 일을 허용하셨을까?’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나를 보시며 “만일 네가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 행동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할 수 없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게 정말 큰 충격이었고 나를 매우 놀라게 하였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 말씀을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지요?” 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아니다. 만일 네가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 행동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할 수 없었다”라고 주님은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부분에 대하여 강조하며“아니다. 내가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케네스 해긴 『믿는자의 권세(생애 기념판)』 김진호 옮김. 용인: 믿음의 말씀사, 2010. pp.88-90.)
이 환상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미 다 주셨지만 우리들이 행하지 아니하면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 28:4, 개정)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8, 개정)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우리들이 잘되는 것을 위하여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우리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쓰신 기도의 기술이란 책에 존 웨슬리의 기도에 대한 글을 인용하신 것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의 삶에 의해 제한을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케네스 해긴, 「기도의 기술」, 김진호 옮김, 믿음의 말씀사, 2000, p.13)
막연하게 구하면 안됩니다. 구체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전 세계 영혼을 구원해 주시옵소서.”하는 기도는 너무 막연합니다. 구체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일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손으로 붙잡고 있는 일들이 형통하고 잘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들의 자녀들이 잘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우리들의 자녀들이 잘되게 해달라고만 구하지 마시고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그 결과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찰스 캡스 목사님께 말씀하신 중요한 계시가 있습니다.
“내가 내 백성들에게 말했느니라. 사람은 자기가 말한 것을 가질 수 있으며 자기가 가진 것을 말하느니라.”
(찰스 캡스,『혀의 창조적 능력을 사용하라』, 오태용 옮김, 베다니출판사, 2010, p. 228.)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우리들이 이루고 싶어하는 일들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제가 크리스 오야킬로메 목사님이 쓰신 예언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믿음으로 말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예화가 2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일화이고 또 하나는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일화였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이야기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녀는 15세 된 자기 아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해긴 목사님께 기도 요청을 했을 때, 목사님은 그녀에게 자신의 기도가 전혀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이유를 물었고,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아들을 위해 기도해도, 당신이 그것을 무효화시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들이 결국에는 소년원에 갈 것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계속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해봤자 아무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간절한 심정으로 물었습니다.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러자 해긴 목사님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습니다.
“아드님이 구원을 받을지 걱정하기를 멈추시고, 그의 삶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하십시오. 그에게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대신, 그가 어디 있든지 돌보아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런 걱정은 아드님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주님, 저는 저의 모든 염려를 당신께 맡깁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저를 돌보시고 제 아들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 애는 바로 당신 손에 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배우기 시작했고, 몇 달 뒤에 다시 찾아와서 그렇게 한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거듭났고, 그 전까지 마귀를 위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던 것과 똑같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말하고,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것을 갖게 될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한 여인이 그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를 도와주세요! 제 딸이 가족 전체를 병들게 하고 있어요. 그 애는 아주 제멋대로이고, 악한 죄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해왔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조 목사님이 꾸짖었습니다.
“성도님, 당신 딸보다 당신이 훨씬 문제가 크군요! 당신은 단 한 순간이라도 아름답고 성공적이고 정직하고 단정한 딸을 볼 수 없습니까?”
그녀가 말했습니다.
“오, 아닙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제 딸을 몰라서 그래요. 그 애는 제멋대로에요.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 호텔에서 남자와 있겠죠. 우리 모두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 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조 목사님이 그녀를 다시 꾸짖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조 목사님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자, 당신이 당신 딸을 그렇게 보는 한, 당신 딸은 계속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딸이 집으로 돌아와서 거듭나고 성령 충만을 받고 놀라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보기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오, 그렇게 되면 참 좋겠네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조 목사님은 그녀가 그것을 보기 시작할 때까지는 기도해주지 않을 것이라 말하면서, 그녀에게 다음의 내용을 받아적고 매일같이 선언하라고 했습니다.
“나의 딸은 거듭난다! 나의 딸은 성령 충만을 받는다! 나의 딸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 나의 딸은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그 말씀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그 고백을 스스로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기를 매일같이 반복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드디어 그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후, 그녀는 조 목사님께 다시 찾아와서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목사님, 제 딸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애는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고요. 집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오, 나는 고대하고 있어요. 주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진정시키기 힘들 정도로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조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녀와 합심하는 간단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며칠 후, 밤늦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가 문을 열자 거기에는 딸이 서 있었습니다! 딸이 말하기를, 호텔 방에서 자기에게 뭔지 모르는 무언가가 엄습해왔고, 남자에게서 벗어나서 곧장 집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심령으로 예수님을 원했습니다.
그녀는 그날 밤 거듭났고,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렇게는 역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미래를 예언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입에 당신의 미래가 있습니다!
(크리스 오야킬로메 『예언: 당신의 미래를 다스리는 능력을 이해하기』 Paula Kim 옮김. 용인: 믿음의 말씀사, 2011. pp. 37-40.)
이처럼 우리들의 미래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우리들이 원하는 삶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삶이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존 오스틴 목사님은 그의 책 “믿음의 말씀 고백 기도집”에서 믿음의 고백에 대한 예를 들어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일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오, 할렐루야! 아버지, 나는 두려움 없이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나는 기뻐합니다!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의 고백(confession)이 나의 소유(possession)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나의 온 마음을 다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와 그분의 강한 능력 안에서 나는 강합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대로 내가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 번 내가 말한 것이 - 나의 잘못된 고백들 - 내 인생에 파멸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바꾸고 당신의 말씀을 고백한다면, 나는 내가 소유한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몸이 느끼는 것이나 내 눈이 보는 것 또는 내 감각이 말하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말한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알기에, 당신의 말씀을 담대히 고백하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들의 건강을 위하여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예수님의 치유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벧전 2:24, 개정)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구속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 53:5, 개정)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개정)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순히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몸이 약해졌을 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육신의 치유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육신의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신 일들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8:16, 개정)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마 8:17, 개정)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처럼 우리들도 병이 들었을 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치료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출 15:26, 개정)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또 말라기에는 치료의 광선이 비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 4:2, 개정)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들이 건강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삼 1:2, 개정)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 모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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