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교인들의 신앙적 모습에 놀라곤 한다.
그것은 찬송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상한 모습이다.
하나님을 노래하기 위하여 만들고 부르는 곡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되어지는 것인가?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선 빠른 곡조의 속죄에 대한 노래나 죄사함을 위한 노래가 자신의 죄를 돌아볼 여유없이 그렇게 흥겹게 부르는것은 무슨 이유엘까?(특히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보면..)
빠른 곡이 무었이든지 간에 우리를 흥겹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분의 속죄에 대한 보혈에 관한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가사를 통한 죄사함의 감격과 자신의 죄를 향한 분노는 간 곳 없고 흥겨운 박수소리와 더 빨라진 리듬만이 교회를 가득 체운다.
그리고는 수고의 즐거움에 들어간다.
무었인가를 열심히 한 사람들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그들은 강렬하게 느낀다.
설교는 그 속에 파 뭍일 정도로 너무 강렬해서 리듬만이 설교시간 내내 마음을 울린다.
마음은 찬양의 욕구로 가득차서 설교 후에 한번 더 부르는 찬양이 자신을 더 하나님에게로 가게 한다는 믿음이 물 같이 밀려온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최면일 뿐이다.
진정한 찬양은 그 찬양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어야만 한다.
진정한 찬양은 그 찬양이 자신을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찬양은 그 찬양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는것이다.
그래서 찬양에 대한 우리의 선조들은 리듬을 경시하고 가사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했던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결과 우리들에게 깊이 있고 은혜가 되는 찬송은 언제나 자신을 많이 위로 할 수 있는 곡으로 은혜의 순위를 따지기 시작 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은혜 받은 곡을 말하라고 하면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아픈 시절에 불렀던 곡이 18번이 되는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과 상황은 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18번이 바뀌어지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런것이다.
찬양이 이런것이라면 유행가가 훨씬더 유익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던 사람은 유행가도 은혜가 된다고 하는말을 하는것입니다.(찬양이 뭔지도 모르는사람입니다.)
찬양이 무었인지 안다면 우리의신앙은 한층 더 성숙하게 될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가 이 세대에 편승하는 우리의 마음에 거부되기 시작한것이다.
인간이란 본래 죄인이기 때문에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본성은 우리를 하나님과 사이를 내게 하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계속 공격의 대상이 되기때문읻다.
그 공격은 우리로 쉽게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죄를 받아들이기에 확실한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한것보다 악한것이 우리에게 훨씬더 빨리 습득되고 행해지는 이유이다.
자 그러면 말을 맺고자 한다.
진정한 찬양은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큰 위로를 얻는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의 이유이며 효과이다.
찬양은 찬양 받을자에게 찬양해야할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최고의 행위이다. 이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은 더 끼뻐하시고 그 기뻐하심을 입은 자 들에게는 마음에 평화가 임하게 되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