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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軒先生 年代記 -------------------
* 1913(계축)년 8월 29일 오홍탁(택)(吳鉷鐸)선생은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 401번지에서 父 在章(相宣) 공과 母 麗興 閔씨 松川사이의 1남5녀중 장남이자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복(同福)이고 승지공파 28세손으로, 명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해금문집을 남 긴 조선 후기 영조때의 실학자 해금(海錦) 오달운(吳達運)공의 후손이다. 호는 남헌(南軒)이고 자는 정용(禎鏞)이며, 이명(異名)은 오홍탁(吳洪鐸)이다. 중농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가친척을 보면 참지 못하는 부친이 친지의 빗보증을 잘못서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다.
* 1929년 (16세) 해남군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 1931년 (18세) 해남공립농업실수학교(海南公立農業實修學校)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에는 독서회를 조직하여 리더로 활동하면서 농촌계몽활동을 하였고, 졸업후 농업 에 종사하면서 사립강습소에 재학중 북평면출신 교사 박채민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상교육 을 받고 공동근로 · 공동분배라는 사회주의 사상에 흥미를 느끼고 신봉하여 여러명의 동 지를 포섭하였다.
* 1932년 (19세) 동지 박한배 등과 화합하여 사회주의사상 보급을 위한 경제활동을 목적으로 갱생계를 설 립하고, 동지양성과 포섭에 노력하였다.
* 1933년 (20세) 오양탁외 다수와 화합하여 사회과학 연구를 시작할 것을 협의하고,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교양을 행함과 동시에 무산대중을 지도·훈련하였다. 그리고 김홍배, 오문현, 황동윤 등과 함께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이라는 암자에서 대중계몽 과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사회주의 비밀결사 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하는데 주도 적으로 참여하여, 해남군 산이면 지부장으로 활약하면서 소작쟁의를 주도하며 항일운동 을 전개하였고, 그해 9월에 전남순사교습소에 입학하여 12월에 졸업하였다.
* 1934년 (21세)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며 비밀탐지 활동을 위하여 강진경찰서에 순사로 위장취직하고, 고 향인 해남과 강진을 오가며 경찰서내에서는 상관의 신임을 받는 모범경관으로, 고향에서 는 마을 사람들에게 칭송을 듣는 모범청년으로 인정받으며 활약하여 오던 중, 2월에 '전남 운동협의회사건'이 발각되면서 사건의 주역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 다.
* 1936년 (23세) 지금의 국가보안법의 모체라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 및 기관지 농민투쟁 발간에 의한 '출 판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에서 징역 1년형 언도받고, 갖은 회유와 혹독한 고 문을 이겨 내고 구류일수 포함하여 3년 10월의 길고도 험난한 옥고를 치르고 목포형무소 에서 12월에 만기 출소하였다.
* 1937년 (24세) 출소후 일경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끊임없는 감시와 핍박을 받던 중, 父 서산(瑞山) 류(柳) 씨 영철(永澈)과 母 김금천(金錦川)의 장녀인 류양임(柳陽任)여사와 혼인하였다.
* 1940년 (27세) 첫째아들 원록(元祿)이 출생하였다.
* 1942년 (29세) 둘째아들 희록(喜祿)이 출생하였고, 부친 재장(在章)공이 별세하셨다.
* 1944년 (31세) 셋째아들 화록(化祿)이 출생하였다.
* 1945년 (32세)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였고, 건준(建準 - 건국준비윈원회) 출범과 함께 전라 남도 해남군 초대 내무과장에 임명되었다.
* 1946년 (33세) 부인 류양임여사가 원인모를 병으로, 삼남 화록이 홍역으로 각각 사망하였다. 인물과 솜씨가 빼어났다고 이웃마을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던 부인과 세아들중 가장 인물 이 좋고 명석해서 주위사람들의 기대와 사랑을 독차지 했던 삼남의 죽음으로 남헌선생의 짧은 일생중 가장 상심한 시기를 보냈다.
* 1950년 (37세) 6·25가 발발하자 남헌선생은 일제시대에 사회주의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보도연맹 에 강제 가입되어, 진도에서 뱃길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갈명도(일명 갈매기섬)라는 무인 도로 끌려가 억울하게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되어 37세라는 젊고 아까운 나이로 요절하였 다. 남헌선생은 경찰에 끌려가서도 선생의 인품을 익히 알고 있던 경찰들이 일부러 물심부름 을 시키는 등 여러차레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선생의 인품상 동지들을 배신하 고 혼자만 살 수 없다는 곧은 절개와 굳은 신념으로 죽음앞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한 헌헌장 부의 모습을 보이셨다.
* 1964년 모친이 별세하셨다.
* 1965년 사망후 자유당과 5·16군사정권의 서슬퍼런 감시와 연좌제라는 족쇄때문에 유족들은 감히 시신을 수습할 엄두조차 못내다가, 한마을 사람들이 무려 8명이나 한날 한시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일가들이 모여 갈매기섬에 널려있는 뼈들을 추려와 각자 나누어 묘를 만들었 다. 현재 남헌선생의 묘는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신흥리 연박등 문중 선산에 부인 류양임여 사와 함께 나란히 모셔져 있다.
* 1993·2002·2006·2011년 4회에 걸쳐 유족들이 남헌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요구하였으나, 담당기관인 국가 보훈처에서는 독립운동 공적내용은 '건국훈장 애족장'에 해당하나, 남헌선생의 해방후 사회주의운동 및 6 · 25동란(한국전쟁) 당시 경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고 하는 사유로 계 속하여 독립유공자 서훈요구를 기각해 오고 있다. ['전남운동협의회사건' 관련자로 옥고를 치른 49명中 2009년 8월현재 27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그리고 2005년 12월 1일자 대통령 직속기구로 발족된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 회(위원장 송기인)'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피학살사건에 대하여 접수·조사를 시작, 남 헌선생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진도 갈매기섬 사건도 조사를 진행하였다. 또한 2006년 9월에 경찰청산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기관으로는 최초로 '보도연맹 사건'에 대하여 국가기관의 명백한 잘못을 인정하였다.
* 2007년 1930년대 무려 3,200여명이 관련되어, 신간회사건 이후 호남 최대의 항일결사인 '전남운동 협의회사건'이 전남도청으로부터 도비 2,000만원을 지원받아 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자료발 굴 등을 통해 후세에 귀감이 되는 뜻깊은 사업을 해 나갈 목적으로, 11월14일 '전남운동협 의회사건 기념사업회(공동대표 김연수·김재천, 유족대표 오원록)'가 전남 완도군 완도읍 개 포리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발족되었다. 그리고 11월27일 대통령 직속기구인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위원장 송기 인)'는 한국전쟁 전후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수만명의 민간인이 집단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서 첫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령사업 지원 등 명예회 복 조치를 권고하였다.
* 2008년 1월 24일, '울산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추모식'에서 노무현대통령은 현직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보도연맹사건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잘못 을 인정하고 공식사과를 하였다. 9월 19일(金),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위원장 안병욱)가 주최하고, 충북대 학교 유해발굴센터(중원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박선주교수)가 주관하여 남헌선생께서 안 타깝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진도 갈매기섬에 대한 해남보도연맹원 유해발굴 작업이 전라남 도 진도군 의신면 접도 수품항에서의 개토제를 시작으로, 약 2개월에 걸쳐 실시 되었다.
* 2009년 8월 25일,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전라남도 국민보도연 맹 사건3(함평 · 해남 · 완도군)'에 대하여, 「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 제 26조에 의거 진실규명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남헌 오홍탁선생은 사건번호 다-463호로 국가공권력에 의해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서거후 59년만에 밝혀졌다.
* 2012년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수차례 반복되는 남헌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지정거부처분에 대하 여, 법무법인(유한) 정평을 소송대리인으로 하여 국가보훈처장을 상대로 남헌선생의 "독립 유공자 지정거부처분 취소" 행정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제기하다.
* 2016년 10월 22일(土) 남헌선생이 모셔진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신흥리 510번지 '동복오씨승지공파송암공문중' 선영에서, 남헌선생 내외분의 묘앞에 선생의 일생과 가족관계를 기록한 묘비를 세우고 도내 신문사와 전국 각지에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참석해 준 내외 귀빈을 모시고 제막식을 거행 했다.
* 2021년 6월 8일 '1930년 해남에서 독립운동중 일제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실에 대한 오홍탁선생의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에 신청했다. * 2023년 2월 8일(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8조에 따라 '오홍탁선생의 전남운동협의회 항일독립운동 참여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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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나쁜경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