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창 1장에서 한 욤, 새 언약에서 골방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문을 닫고 있으라 하신다.
2) 마음은 옥토 밭으로 개간하지 않으면 집착하고 화내는 일이 점점 더 심화한다.
3)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은 단순한 것으로 여겨야지, 집착하면 마음을 혼란케 한다.
4) 마음을 나와 동일시하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어나 나를 방편으로 삼게 된다.
나. 본론
1) 창 1장에서 한 욤, 새 언약에서 골방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문을 닫고 있으라 하신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한 욤(첫째 날로 오역)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언약에서는 골방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이외엔 모두 괴로움은 곧 죄다. 세상에서는 고난의 과정이 돌고 도는 것이므로 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몸과 마음이 ‘나’라고 한다고 가정하면 나에게 고통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은 실체가 없지만, 작용은 있다. 계속 태어나게 하는 마음의 실상을 알아서 반드시 버려야 할 대상이다. 이 실천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씀하신 ‘창세 이후’로 오역한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이며 ‘회개하라’로 오역한 ‘메타노에오’다.
2) 마음은 옥토 밭으로 개간하지 않으면 집착하고 화내는 일이 점점 더 심화한다.
마음은 옥토 밭으로 가꾸지 아니하면 집착하고 화내고 환희심(매우 기뻐하는 마음)을 내는 일이 점점 더 심화하게 된다. 마음은 영겁(永劫)을 통해서 정과 욕심의 방향으로 향하는 길이 이미 나 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안 되는 이유다. 마음은 길이 나면 쉽게 길들어져서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마음은 조건이 바뀌면 그대로 바뀐다. 요술쟁이 같아서 실체가 없다.
몸과 마음의 실체는 없으나 작용만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아이다. 내가 아니다. 나와 동일시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델라크토)이며, 새 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몸과 마음을 개간함이다)’이며, ‘메타노에오’다.
3)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을 단순한 것으로 여겨야지, 집착하면 마음을 혼란케 한다.
탐욕이, 성냄이, 어리석음을 그냥 일어나는 것으로 알아야지, 나는 왜 이리 어리석고 집착이 많은가? 생각하면 이것 자체가 우리 마음을 혼란케 한다. 모든 것은 나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은 없다. 모두 마음의 조화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창세기 1:1부터 술 취해 있는 나를 깨우기 위하여 말씀하신다. 마음의 그 하늘과 마음의 그 땅이 허상임을 알게(바라) 하신다. 왜냐하면 베레쉬트(근본)를 드러내기 위한 과정이다.
창세기 1:1에 ‘태초’로 오역한 ‘베레쉬트’는 근본, 근원, 본원, 본성으로 설명한다. 비유다. 성경 첫 단어부터 ‘베레쉬트(여성)’가 등장하는데 이는 나의 원래 성품인 하나님이다. 나의 원래 성품이란 없지만, 방편(方便)으로 이야기할 뿐이다. 방편(方便)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접근하다, 도달하다는 뜻이다.
4) 마음을 나와 동일시하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어나 나를 방편으로 생각하게 된다.
마음을 나와 동일시하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어난다. 에덴동산 안에서의 선악과로 오역한 좋아하고 싫어함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탐욕이, 성냄이, 들뜸의 후회가 있다고 해야지,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나지 하면 그 마음에 이런 모습에서 싫어함이 일어나며 ‘나’라는 것이 생겨난다. 이는 ‘나(方便)’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 마음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또 다시 경수가 생겨나 그 남편에게 이끌려 노예가 되는 것이다.
경수가 흘러서 율법의 남편에 예속되면 간혹 경수가 줄어들어 그 남편이 싫어진다 해도 그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다. 경수는 조건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흘러넘치게 된다. 이 남편의 속성 곧 먼저 와 있는 멜론토스의 속성을 온전히 알아야 내가 자유하게 되는 길이 열린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업(까르마, 행위와 그 결과)에 의한 조건으로 생겨났다. 로마서에서는 ‘그 멜론토스의 투포스’로 설명하고 있다(롬 5:14). ‘업’은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성경에서는 ‘멜론토스 투포스(뱀의 渴愛)’로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