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의사의 침구학
1950년대 국민의료법이 제정된 이후 한의학의 제도화가 시작됐다. 한편으로서는 한의과대학을 설립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한의학을 체계화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법제에 따라 기존의 의생들에게 한의사 시험을 치르고 면허를 부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초기 한의사를 형성했던 또 다른 집단은 한약종상이다. 통계를 보면 1950년대 초에는 한의사 수의 2~3배에 달하는 한약종상이 존재했다. 그런데 한의사 검정시험 규정에 의하면 의생은 물론 10년 이상 한약판매 업무에 종사한 한약종상들에게도 시험자격을 부여하였다. 한약종상은 의료인력의 부족 때문에 정규 의료인이 없는 지역에서 약품판매업을 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한 직종으로 진맥이나 침구시술 등 진료행위는 할 수 없고 처방집에 따른 한약의 판매만을 하는 직종으로 ‘한약방’을 운영하던 직종이다. 이들은 한약재 유통에도 관계하였기 때문에 일부 ‘성공한’ 한약종상은 상당한 경제적 자산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의계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한의사 국가고시를 볼 수 있는 자격부여 검정고시에 매년 수십 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던 점을 생각할 때 적어도 검정고시가 시행되었던 63년까지 수백 명의 한약종상이 한의사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같은 동양의학 계열의 시술자였던 침구사에게는 한의사 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나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던 점이다. 한의사 형성과정에서 침구사를 배제한 결과 이후 침구사들과의 갈등이 조성되었다.
한의사는 제도권에서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고, 성장을 해 나간 반면에 침구를 업으로 하려고 하는 민간 침구인들은 무면허 침쟁이라는 사회적 위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한의사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커지고, 침구가 한방에 속한다는 보건의료 당국의 유권해석을 받아내기에 이르렀고, 대법원의 판례도 침구는 한의사의 업무영역이라는 판결도 얻어내게 된다. 그리고 한의사가 직접 정부의 전통의학에 관한 정책을 마련하고 시행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침구를 한의사의 주요업무로 편입시켜 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침구를 전수해 줄 사람이 제대로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주로 침과 뜸으로 병을 치료하는 침구인들이 전국 각지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들을 제도권 내로 체계적으로 수렴해 내는 과정이 없다보니 전통침구술을 전수해 줄 사람도 형성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의대에서 침구관련 교육은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통 침구학에 관심이 있는 한의사들은 무면허 침구인들을 찾아다니며 침구술을 배우는 등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90년까지 출간된 한의학 관련 석박사 논문목록을 보면 침구 관련 논문은 불과 5% 미만이다.
어찌됐거나 침구에 관심 있는 한의사들에 의해 침구학이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잡고 연구되고, 나름의 발전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대한한의학회의 회원학회인 대한침구학회는 한의사들로 구성되어 침구학 연구와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대한침구학회는 침구학의 이론 및 기술의 연구조사 사업, 침구학회지 및 침구학 서적의 발간 및 수집에 관한 사업, 전국학술대회 및 세미나 개최 등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① 침구전문 한의사
보건복지부 내 한방 관련 부서는 한의사 직능단체의 이해를 대변하여 침구사제도를 양성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침구사제도가 기존의 한의사제도와 중복운영 될 소지가 크고, 결과적으로 의료서비스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99년부터 ‘한의사 전문의제도’가 운영돼 침구사제도를 운영해야 할 필요성도 크지 않다고 한다. 한방 전문의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한의사 중에는 인턴(1년)과 레지던트(3년) 등의 과정을 거친 뒤 전문적인 침구행위를 할 수 있는 침구과 전문의가 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의사 전문의의 전문과목은 한방내과, 한방부인과, 한방소아과, 한방신경정신과, 침구과, 한방안·이비인후·피부과, 한방재활의학과 및 사상체질과로 8개과 이다. 한의사전문의는 한의대 교육과정 6년을 마치고 인턴과 레지던트를 4년을 거친 한의사를 말한다. 한의사 전문의 제도는 1999년 12월 「한의사 전문의 수련 및 자격인정 등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도입되었고, 매년 200여명의 한의사 전문의가 배출되고 있고, 이 가운데 2014년 현재까지 배출된 침구전문 한의사는 대략 500여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의사 전문의제도에 대해서는 한의계 내부적으로도 각 직역별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진통을 겪어왔다. 한의사 중 침구전문의의 경우는 ‘한의사 중에 침구전문의가 있으므로 침구사 제도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다’는 논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침구전문 한의사가 침구사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침구전문의가 아닌 한의사의 침구시술과 이들 전문의의 침구시술과의 갈등도 문제가 된다. 전문의 과목 가운데 내과 부인과 소아과 신경정신과 안이비인후피부과 재활의학과 사상체질과 등 다른 전문의와는 달리 침구의 경우는 이들 각 진료과목의 한방전문의가 모두 필수적으로 높은 수준의 침구술법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할 전통의학의 핵심기술이다.
그리고 10년 이상의 고학력의 침구전문 한의사가 어떠한 위상이고 얼마나 필요하며, 또한 실효성 있는 제도인가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재의 침구에 대한 의료수가로 10여년의 교육과정을 거친 전문의가 개원하여 침뜸을 위주로 활용하여 병을 치료하도록 한다는 데 무리가 있어 보인다. 침구진료만으로 전문의로서의 기대치만한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일선 의료현장에서 진료를 하며 침구에 대한 임상을 쌓아나가고, 침구학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켜나가기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침구전문인이 제도권에서 배출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는 침구학의 현대적 계승을 위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는 일이다. 이들이 침구를 연구하여 학문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데 한 몫을 할 중요한 인적 자원임에 틀림없다.
②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학연구원은 한의학, 한방의료 및 한약의 육성 · 발전에 관한 사항을 전문적 ·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 하고자 설립된 한의학에 관한 국가 거점연구기관이다. 이 기관 내에 침구학과 관련해서는 침구경락연구그룹을 설치하고, △ 기, 경락 등 한의치료 기초이론 연구 및 실체․기능규명 연구 △ 침, 뜸 등 비약물 치료기술의 표준화 및 메커니즘 연구 △ 침, 뜸 등 비약물 치료기술에 대한 EBM․비교효능 연구 및 신(新 )치료기술 개발 △ 기타 한의 비약물 치료기술에 대한 연구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이 중 침구경락연구그룹은 침구경락 치료기술의 표준화․과학화를 목표로 한 침구 표준 기술 개발 사업, 민간요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다면적으로 검증해 국민 홈 케어 기술을 개발하는 민간요법활용기반구축사업 등을 주로 수행하고 있다.
침구경락연구그룹은 침구에 관한 임상연구, 작용기전 연구 , 경락기전 연구, 민간요법 연구 등을 추진하는 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한의학, 신경과학, 통계학, 중의학, 생물학, 보건학 등의 다양한 전공자들로 구성되어 다학제 융합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가령 침구의 작용기전 연구에서 시작하여 임상연구 및 경제성평가, 침ㆍ뜸ㆍ부항 등 의료기기 관련 실험, 침구임상정보시스템 연구, 민간요법 발굴 보존 및 DB구축을 위한 지식자원화, 전통의료 문헌연구 및 발굴조사 및 보존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에 걸쳐 체계적으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주목되는 사업으로 침구경락 표준치료기술개발 사업이 있는데, 이는 침의 다양한 효과 및 안전성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다.
한의학연구원에서는 특히 제도권 내의 의료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민간의술을 포괄한 전통의료 전반에 관해 조사하고 연구하여 발전시켜나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www.heoim.net) 대표이사 손중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