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서대구교회 청년이 1990년 10월 19일 이현주 목사님의 강연에 다녀온 내용을 나눕니다.
'변혁기에 처한 교회 갱생' - 1990년 10월 19일, 이현주 목사님 강연 정리
변혁기는 급히 변화되고 있는 때로, 때는 늘 변화하며 그 시대의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그 시대를 바로 살아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왜 시대의 징조를 잘 파악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우리가 처한 이 시대를 잘 파악해야 되며 그것이 교회 갱생의 지침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시기는 굉장히 절박한 때이며, 참지 못하며 내일의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때이다. 곧 현대인들은 사과나무를 심을 여유가 없으며, 절벽까지 와 있는 느낌을 본능적으로 느낌으로서 굉장히 초조해한다. 그 원인은 기계 문명의 역작용으로서 사람이 기계를 닮아 가기 때문이다. 기계가 사람을 닮기는 어렵고, 사람이 기계를 닮아 밥도 빨리 먹고, 성격도 빨라지고, 계산이 분명해져서 계산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도 계산을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정치, 경제, 교회 모든 사회 일면에서 비인간화되고 있다.
사람으로 살 것인가? 괴물로 살 것인가? 심각히 생각해볼 문제이다.
살아있는 생물체가 계속적인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죽게 되듯이 교회도 새로와지지 않으면 죽게된다.
그러므로 봄날 새싹이 얼은 땅을 뚫고 올라오듯, 교회도 누르는 힘을 뚫고 생명의 힘으로 뚫고 나와야 한다. 달걀 껍질은 단단해야 되지만 껍질은 언젠가 깨어져야 그 역할을 다하게 되고, 깨지지 않으면 썩게 된다. 병아리가 깨지는 아픔 속에서 태어나듯이 깨질 것은 깨져야 한다.
한국 교회가 새로와지는 모습이 보이느냐? 보인다면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가?
종교가 꿈꾸는 이상향은 까마득한 태고로서 기독교에서는 에덴동산일 것이고, 동양에서는 요순시대가 될 것이다. 따라거 기독교의 갱생은 우리들이 덧붙이고 나가는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모습과 그 교회를 어떻게 이 시대에 재현시키느냐?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에서 교권이 높은 자리의 사람을 통해 생생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껍질이기 때문이다. 성직자들도 마찬가지다. 갱생의 힘은 바닥으로부터 나온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은 밑바닥에 들어가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 누구도 예수님만큼 하느님을 믿고 완전하게 인간의 삶을 사신 분이 없었다. 또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수 없다.
그러면 왜 믿는가?
수학에서 합동은 안되지만 닮은꼴이 있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가시면 절뚝절뚝이더라도 그곳으로 가야 한다. 방향만 잡으면 100보를 가든 1보를 가든 제자리에 머물지 않ㄴ느 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23절에서 요한이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하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대답하고 있다. 만약 교회가 갱생하면 이 세상에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갱생의 기운은 바로 이 시대의 광야에서 불어야 한다.
광야의 의미란 '사람이 없는 곳, 황폐한 곳, 사람 살기가 힘든 곳'이다. 오늘날엔 현실적으로 많은 응달이 있다. 반면 조금만 먹으면 되지, 먹고 먹어 살찐 몸때문에 헬스클럽에 가서 비생산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의 광야란 배고픈 사람들이 사는 곳, 배앗긴 사람들이 사는 곳, 바로 한국의 농촌과 같은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선교하러 가는 제자들에게 신발도 옷도 두벌 가져가지 못하게 하시고, 뱀을 칠 지팡이만을 가져가게 하셨다. 그런데 지금의 성직자들은 좋은 자가용을 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한국 교회는 금덩어리를 지푸라기 보듯 하지 못하고 있다.
크리스챤들도 매 주일 기도하고 회개한 후 다음날 또 그 일을 하고, 매 주일 레코드 바는 돌아가듯이 하고 있다. 회개란 깨끗하게 돌아서서 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말씀에서 '소리', '외침'은 세례자 요한의 소리가 아니라, 그 외침의 주인은 내 속에 들어 있고, 남에게도 존재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바로 나에 의해서 귀먹고 눈먼 하느님이시다.
누가 하느님의 눈을 멀게 하는가? 광야에서 외치고 싶은데 누가 방해하나?
나, 성직자, 교회가 하느님의 음성을 막고 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 속에 존재하신다. 저 높은 곳에만 계신다고 생각하니 안 믿어지지, 하느님은 바로 내 몸 깊은 곳에 계신다. 나의 욕심 때문에 마음껏 하느님이 외치지 못하고 계신다.
과연 나는 하느님이 꺼리낌없이 일하시도록 내 육신을 비워 놓았는가?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손뼉이 부딪힐때 소리가 나듯이, 모든 소리는 만남에서 나온다. 요한의 소리는 만남이라는 사건 즉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에서 나온다. 교회 갱생의 외침의 소리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과연 나는 내가 외치고 있는가?
따로 누군가 외치고 있는가?
내가 고백할 수 있을만큼 참 주인을 모시고 있는가?
내가 주의 말씀을 막고 있나?
오늘날의 교회가 그분의 소리가 되는가?
우리의 소리는 과연 시끄러운 소리인가 외침인가?
우리는 죽고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