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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아픈 곳을
없이 할 수 있겠는가?
│박인근│
1958년생. 1984년 충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충남대학교 병원에서 외과 전공의 과정을 수련했으며 현재 순천의료원 외과 과장 및 진료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사람의 生老病死에 의사만큼 깊숙이 관여하는 직업도 없다.
그만큼 神性에 가까이 있는 직업이란 얘기이다.
그러나 내가 철들 무렵 겪은 의사에 대한 인상은 참담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소화성궤양의 증상이었지 싶은 심한 복통을 자주 앓았다.
그때는 의사도 귀하고 병원비도 비싸 웬만하면 그냥 견딜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복통이 너무 심해 아버님과 함께 어렵사리 병원을 찾았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두어 시간 기다린 후에야 보게 된 의사는 진찰대 위에 누워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간호사에게 내 증상에 대해 몇 마디 물어보고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을 아버님께 위압적인 자세로 반말을 퍼부었다.
아버님께선 죄인처럼 굽신거리며 돈 내고, 아들자식 주사 맞히고, 약을 받아 병원 문을 나서셨다.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의 나는 아버님이 새파란 의사한테 속절없이 능욕당한 것이 분했다.
철들며 처음 겪는 의사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품는 순간이었다.
滌除玄覽 能無疵乎 ( 척제현람 능무자호 )
“백성들을 섬기어 보듬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 백성의 아픈 곳을 없이할 수 있겠는가?”
老子의 道德經중 道經 제 10장에 나오는 구절로 군주의 도를 말하고 있지만
의사의 본분에 더할 수 없이 딱 맞는 말이다.
의사의 진료행위 자체가 권위를 갖던 60~70년대의 의사는 권위와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권위가 시민들에게서 자발적으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물론 그 당시에도 “滌除玄覽 能無疵 (백성들을 섬기어 보듬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 백성의 아픈 곳을 없이 할 수 있슴)”에 헌신적이었던 선배님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들 능력의 희소성과 일의 神性에 기대어
시민들과는 동떨어진,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권위와 부와 명예를 누리고 부풀려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60~70년대 ‘의사는 허가 받은 도둑놈’이란 인식이 팽배했었겠는가?
내가 외과의를 선택한 이유
박정희 시대가 끝나면서 의사의 전성 시대도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때 나는 본과 2학년이었다.
5공화국이 들어서며 의욕적으로 추진한 1980년대의 의료보험정책은 의사 전성시대를 끝내고
의사들을 사회 최상류층에서 상류 또는 중산층으로 끌어내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아울러 의대생과 의사들이 시민사회와 접촉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군부 통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의대에서도 대학 운동권의 주도로 사회 변혁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5.18광주민중항쟁이 군부에 의한 학살극으로 막을 내린지 몇 달 후,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광주에 사는 대학생들을 만나 당시 광주의 참극을 날 것 그대로 전해 들었다.
며칠간 머리가 띵하고 수시로 목이 메었다.
계엄군에 의해 부상당한 환자들로 넘쳐 났다는 전남대병원 응급실의 참상과
이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는 의사들 이야기,
그리고 감동적인 헌혈얘기는 내 삶에 각인되었다.
광주항쟁이 뇌리에 박힌 상태에서 학교에서 듣는 외과학의 외상학이나 쇼크에 관련된 강의는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고
전공의 과목으로 외과를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외과전공의 3년차 시절,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평전을 읽었다.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며 읽었다.
근로자의 생존을 위해 온몸을 불태우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던 전태일의 마지막 길에도
역시 사람의 生老病死에 깊숙이 관여하는 의사가 등장한다.
당시엔 화상을 외과에서 담당했는데, 외과 의사의 길을 걷고자 하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상상만으로도 한없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추워서 떨고 있는 아들에게 치마를 벗어 덮어주고는 의사에게로 갔다.
의사의 말로는 1만5000원짜리 주사 두 대만 맞으면 우선 화기는 가시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훗날 집을 팔아서라도 갚을 터이니 그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리자 의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면 근로감독관에게 가서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중략)...
어머니가 다시 의사에게로 가서 애원을 하니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그 약이 지금 여기에는 없으니 ㅇㅇ병원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까지 전태일은 간단한 응급치료만 받았을 뿐 서너 시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중략)...
ㅇㅇ병원에서는 그를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의사의 진단은 회생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입원실에서도 별다른 치료를 해보지 못하고 거의 환자를 방치해두다시피 하였다......(중략).....
“배가 고프다.”.....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전태일평전 2차 개정판 301~303 페이지에서 발췌]
그 당시 전태일의 담당의사는 한 개인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의 대한민국의료계 전체가 전태일의 마지막 길을 동반한 주치의였다.
그 글을 읽었던 1987년의 의료계도 사회적 책무라는 면에서는 1970년의 의료계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던 듯했다.
외과 의사로, 사회인으로, 자연인으로
“외과의사는 칼을 잡은 내과의사” 라는 명제는 아직도 유효하다.
유능한 외과의사가 되려면 손재주에만 의존하지 말고 의학을 끊임없이 수련하라는 잠언이다.
그러나 의료보험제도가 정착되면서 외과계는 극도로 위축되어 소위 ‘의료계의 3D업종’으로 전락하였다.
인기가 좋은 다른 과에 비해 고생은 더하고 의료사고 위험은 더 높고 상대적 박탈감은 더 심해져
아예 지원을 기피하거나 수련 중도에 하차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환자진료의 최일선에 서야할 외과 의사 부족에 따른 사회 문제가 가까운 장래에 불거질 것으로 우려된다.
비단 외과계열뿐 아니라 대부분의 의사들 수입이 보다 폭넓게 노출되고
그 결과 정부의 강력한 통제와 견제를 받음으로써 의사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급속히 중산층으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2000년도에 의약분업이 시작되기 전후의 ‘의권투쟁’은
의사들의 인술 또는 의사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관에 일대 변혁과 혼란을 초래했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의사와 사회의 상호관계의 성격과 범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시민단체는 의약에 관련된 여러 직능단체 중 유독 의사들한테 강력한 견제와 비판을 가해왔다.
이는 다른 의약 직능군에 비해 의사들의 사회적 책무가 상대적으로 중요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지만
의사들이 보건 의료에 대한 의제를 선점하지 못하고
보건의료정책의 수립과 시행과정에서 책임 있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데 대한 결과일 수 있다.
더구나 시민 사회와 의사소통을 하려는 노력이 다른 의약직능군에 비해 부족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
시민사회의 우호적인 시선을 받기가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다.
앞으로 의사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더욱 나빠질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의사의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고 시민사회와의 의사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의사 단체가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어느 집단도 개인의 양심에 우선하거나 개인의 양심을 대신할 수 없으므로
의사 각자가 자연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의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조화를 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의사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나 자신부터 나의 인격이 의사라는 특정 직업군에 얽매일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반성하고 노력할 일이다.
나는 대학 병원에서 한 분야의 실력과 권위를 쌓아온 통념상 최고수준의 외과 의사는 아닐지라도
내가 처한 의료 환경에서 나를 찾아온 아픈 이한테 최선을 다할 자세가 되어있는지 항상 반문하곤 한다.
나는 아픈 이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위해 몇 가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수화 공부도 그 중 하나이다.
공부해 둔 수화를 톡톡히 써 먹은 적도 있다.
30대 초반의 장정이 여기저기 째지고 터진 채 응급실에 왔다.
뭐라 뭐라 얘길 하는데 우리나라 말이 아니더란다.
한 간호사가 필리핀 말로 알아듣고 '필리핀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 환자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떡였단다.
간호사는 친절하게도 환자를 원무과에 모시고 가서 성명 미상의 필리핀 사람으로 등록해서는 일반외과 외래로 안내한 것이다.
나는 필리핀 사람이니 영어는 통하겠다 싶어 간단한 영어로 몇 가지 물었다.
어허~ 참. 그런데 그 환자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전형적인 청각장애인의 '소리'였다.
나는 수화로 “청각장애인입니까?”, “수화 할 줄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순간, 환자의 표정이 환해지며 능숙한 수화로 사연을 줄줄 털어놓기 시작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취했다가 아버님한테 많이 맞았다. 맞다가 넘어져서 유리창이 깨지고 여기저기 찢어졌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간단한 처치를 한 후 나는 수화로 “상처 다 나을 때까지 술 마시면 안 됩니다.”라고 일러주었다.
필리핀 사람이 아닌 우리나라 청각 장애인인 그 환자는 “잘 알겠습니다. 이젠 술을 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라며 수화 인사를 하고는 나갔다.
수화 공부한 보람을 뿌듯하게 느낄 수 있던 때였다.
나는 적십자 혈액원의 등록 헌혈 회원으로 가입해 지금까지 50회에 가까운 헌혈을 했다.
또 일제 치하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한 우리의 근현대사와
그에 따른 가치관의 전도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이진 못하지만 지속적인 성원을 보내고 있다.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의 표현인 셈이다.
책을 읽다보면 영혼을 울릴 만한 글을 드믈게 만날 수 있다.
10여년 전 생태주의 잡지인 녹색평론을 통해
미국 서부지역에 거주하던 인디언 두아미쉬-수쿠아미쉬族의 추장 ‘시애틀’이 미국인한테 그들의 거주지를 빼앗기며 남긴 연설문을 읽었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중략)...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평생 지속될 감동이었다.
이 글을 접한 후 생명과 생태계의 건강한 순환을 추구하는 생태(생명) 귀농 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고
사단법인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주관하는 귀농학교도 졸업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도 언젠가는 흙을 닮아가는 생태귀농인이 되어있을 것을 예감하고 있다.
의사들이, 의사가 되고 싶은 이들이 생명에 대한 강렬한 영감을 얻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첫댓글 어진 뿌리의 역사군요. 빨리 생태귀농인이 되시길...
감동을 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 찬사를 보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박인근 원장님, 민문연에 불어 넣어 준 원장님의 숨결은 역사와 현실을 바로세우고자 하는 전남동부지부 식구들의 열정을 불러들이는 귀한 바람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