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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정화(마리아) http://cafe.daum.net/wolyacommunity |
제목 |
작은 고향사랑이 농촌 살리는 재능기부가 되다! |
이제 가면 고향땅에 언제 돌아올까?!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2월 눈보라 분패 치던 월야 언덕 터덜거리는 시골 버스에 오르며 정류장에 북풍의 맞바람을 맞으며 초라하게 홀로 서 계시는 어머니를 멀리 떠나오며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리는 것이 새삼 이 세상 가장 뜨거운 물인 듯이 느껴 더욱 흐느끼며 상경에 몸을 실었다. 88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만 해도 우리나라의 서민 실정이 그러하였듯이 큰 딸로서 살림밑천의 자리매김과 학구열의 의지로 더 넓은 세상으로 유학을 꿈꾸며 실업계로 입학을 결심하고, 엄마와 난 단단히 모사를 하여 여자애를 밖으로 보내지 마라는 아빠와 숨박꼭질 하듯 위채 아래채 세바퀴나 돌아가며 호랑이 무늬 밍크이불 보따리 엄마에게 바톤 이어받아 혁신의 정신으로 동네에서 가장 큰 종가 한옥 기와집을 빠져나와 들판을 가로지르며 문뜩 “이제 가면 언제가는 꼭 돌아와서 내 고향 지키며 살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세상은 나를 [의지의 한국인] 닉네임을 달아 주었다 상경 첫날부터 지하철 입구부터 6월 항쟁의 조짐이었던 최류가스란 것을 처음 맡게 되면서 시대적 흐름과 함께 주경야독과 틈틈이 야학을 겸하기도 하면서 ‘눈돌리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생활, 세상배우기를 하였다. 돌아보면 지금의 다문화 가족이나 이주 노동자의 생활과 비견이 될까 싶다. 열심히 돈 벌어서 고향가용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주고 한편으로는 세상에 홀로서기를 위한 향학열에 불타 최선에 최선을 다하며 [의지의 한국인]의 별명을 불리어 가며 학문에 대한 꿈을 이루어 갔다. 끝내 고향을 향한 나의 마음은 박사과정 준비로 미국 유학을 가서 최고조에 달하는 역설적 현상이 일어났다. 거기에서도 한인 천주교 성당을 다니면서 마더 테레사의 영화를 보면서 더욱 사회복지와 미국의 선진 빌리지 커뮤니티가 더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두 번째 얻은 나의 삶 “하느님 제게 한번의 기회를 주세요!” 결국 귀국을 하고 대학 때 파트타임으로 모셨던 환경학자 김명자 선생님의 강의자료를 준비하면서 더욱 “그린 거버넌스”에 관심과 집착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다문화 가족, 이주노동자와 비문해 어르신등 소외가족 정보화 문해 자원봉사 다니면서도 남편과 귀향을 협의하다가 결정적으로 사경을 헤매던 병원 침대에서 “하느님, 제가 이제 시작을 하려 합니다. 한번의 기회를 주세요! 하루를 살아도 의미있는 삶을 살아보고 가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제 작은 힘일지라도 그동안 쌓아온 달란트를 베풀고 갈수 있게 해 주십시요!” 했더니 거짓말처럼 내게 기회가 왔고 1년 후 내 고향에 농촌 소외 가족 지킴이 시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
내 고향의 상록수, [채영신]이라 불리어 졌다! 가족들의 배려와 본격적인 귀농의 장단기 계획으로 협의 하에 우선 봉고 하나를 사서 끌고 내려다 놓고, 매주 반반 안양에서 함평까지 직행버스로 오가며 3일의 오전은 시대적 억압에 있었던 여성 어르신들, 자식 내리사랑에 당신 몸엔 한 푼도 안 쓰시는 우리 어머님들, 팔순이 다되어도 소작 농사에 한 손 놀리지 않으려는 실버 전문 전업농 주부들 도어 투 도어 통학봉고로 싣고 한글교실 열어 못 배운 한풀이와 삶의 락을 느끼고 자아를 찾아보자고 ‘아자! 아자!’ 다짐해가며, 오후엔 다문화 결혼 이민자 집을 돌며 한국 농촌 생활과 가족관계 이해, 한국인으로서의 자리매김과 자존감으로 경제력 있는 진로 찾기 등을 함께하며, 일손 바쁜 청. 장년층 농가에 들러 컴퓨터 사용과 정보화, 인터넷과 농업과의 연계성을 인식시키고, 저녁엔 이주 노동자들의 아지트 집을 찾아 한국 회사 생활에서 소통과 이해, 밀린 급여 받기와 전직처리와 여권연장 등의 근로기준 속에서도 보다 나은 삶과 자아를 위한 학구열과 진로 상담을 해갔다. 농촌지역을 부흥하기 위해서는 농부 딸의 명예를 걸고라도 이 나라의 도시에서 넘쳐나는 젊은 인력들이 농촌을 한번이라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여력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더 광범위하고 작은 손 하나라도 구석구석 소중함과 책임감이 강해지면서 활동은 박차를 가해지고 처음엔 부모. 형제부터서도 이상하게 바라보더니 점차적이고 꾸준한 실천에 주위에선 [채영신]이라 불러주며 응원도 해주었다. 청년회, 농업경영인회에서는 단체 사무실인 컨테이너 박스를 한글 교실로 지원해주고, 성당에서 중고 칠판을 교실 한 내벽을 다 찰만큼 큰 것으로 가져오게 되어 어르신들의 노안에 맞게도 큰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었고. 투덜거리던 남편도 경기도에서 학교 중고 의자를 1톤 포토 한가득 실어다 주었다. 점차 소문은 퍼져 면에서도 관심을 갖고 현황 파악과 지자체 보고도 들어가게 되기도 하고 면장님이 친히 [만학의 꿈] 특강도 해 주시고, 면민회관의 작은 도서관에 학습공간도 얻게 되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내 삶의 지표가 되었다. 최용신의 “세상을 모르는 젊은 여자 하나쯤에게 무슨 큰 기대를 가질 수가 있겠어요?”의 역설적 후담처럼 내 작은 소망 고향사랑의 강이 큰 바다의 뜻을 만나 상록수 정신의 삶의 목표가 되어 아련했던 사춘기 시절 감성을 울렸던 문학작품 분석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브나로드운동을 가슴 저 밑바닥에 숨겨 놓았던가?! 군내 관공소마다 브리핑을 다니다 보니, 신설된 다문화 가족 센터의 한글 정보화 문해 교실, 취.창업 일환의 운전면허 교실 첫 강의를 맡기도 하고 군청 주민 및 공무원 정보화교실을 맡기도 하면서 그 동안 배워온 재능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
도시에서 배운 재능을 내고향 농촌 만들기에 쏟아붓다! 중학교 졸업후 20여년만에 내려온 내 고향 함평은 명절이나 방학때 다녀간 내 집. 내 동네만 그대로인 것 같았지만 많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었음에도 청정도를 지키고 있었으며 지역자원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꼬박 1년에 거쳐 함평답사를 하면서 그 동안의 학업 못지않게 현장학습을 하였다. 그러던 중 월야면 이장단 회의에서 사회복지센터의 필요성과 농촌 소외가족 시설 유치를 위한 홍보차 만났던 소재지 이장님의 농촌 현지의 가장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를 받게 되어 정보화의 비문해로 문서화되지 못했던 농촌 마을 만들기 위한 정책적 사업 계획서를 다행히 기획력의 정보방송학, 멀티미디어 활용력의 컴퓨터 통신학, 미국 선진국 커뮤니티 답습 등의 내 전공의 힘을 보태어 2년 동안 녹색농촌부터 도농교류, 체험마을 등의 기획의 행운으로 [거점면 소재지 종합정비사업]을 선정, 수행하게 되어 사회생활의 총력적인 시골의 인성과 학구열의 지성, 도외지의 도심을 읽는 능력과 친화력. 대처력 및 선진국의 문물 도입을 모두어 농촌 지역 개발로 확대되었다.
내 작은 재능기부 하나가 세상을 바꾸는 힘, 시너지효과가 되다! ‘재능기부’란 말을 최근에 알게 되었지만 삶 속에서 한국인의 정서상 베풀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은 늘 있었으나 마땅히 연계가 안 되어 제 몫을 더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추진되는 시책에 발맞추어 보다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 지역에도 여러 도심이나 인근의 재능이 연결되기를 바라면서 서로 서로 추천, 홍보도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도 정년퇴임한 전문 인력으로 또 하나의 커뮤니티 리더 구성이 되는 사례를 통해 우리 지역도 제 2의 재능 기부자들의 힘으로 사업 시설 운영을 해 나갈 힌트를 얻기도 한 바 있다. 우리 주민의 자발적인 베품, 나눔의 정신으로 농촌을 지켜 나간다면 어느 곳 못지않게 탄탄한 자주적 빌리지 커뮤니티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본다. 돌아 보건데, 농촌에서 정서적인 인성을 내리사랑으로 받으며 검소하게 살아가면서 삼시 세끼 밥이 주식인 한국에서 진정한 삶의 유희와 행복은 건전한 친환경적 공간속에 가족과 나의 건강이 뒷받침되기 위한 노력으로 가장 먼저 돌아 봐야 할 곳이 우리 농촌이고 또한 전 국민의 농촌 살리기 위한 작은 재능 기부 하나 하나가 몸과 마음이 부강한 우리나라를 만들어 가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부분이 농사짓는 부모님의 뒷바라지로 먹고 살고 교육 받고 다재다능한 재능을 갖춘 고 인력뿐만 아니라, 손, 말, 맛 재주 하나라도 좋은 작은 정성의 재능을 기부해 주는 마음가짐이 더불어 살아가는 인정을 베풀며 살아가는 인덕이요 애국의 시작이라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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