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는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일5장16-17절)
우리의 기도의 내용 중에 형제들의 죄를 위한 기도가 있습니다.
형제들이 사망으로 가는 죄를 제외한 죄가 있음을 보거든 구하라(아이테오)하십니다.
그러면 구하는 자에게 먼저 생명을 주신 다음 그에게 생명을 주리라는 뜻입니다.
고후 4:10-13절의 말씀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제가 하루에 7-8시간 강의를 하고도 거의 지치지 않고 강의 중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강의를 끝내면 혹자는 제 몸이 특별하게 건강한 줄 압니다.
그건 아닌데 저는 알레르기가 있어 코가 잘 막히고 콧물도 나고 간혹 기침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몸에 적용시킨 순간부터는 성령의 도구가 됩니다.
그로인해 원고 없이도 20시간 정도는 거뜬하게 강의를 합니다.
끝이 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와 몇 백 킬로 운전도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받아들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로
여기면 그 속에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므로 주의 생명이 우리의 몸과 육체에 나타납니다.
이 때에 설교를 하든지 기도를 하면 다른 사람의 사망을 자신이 감당하고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은 그 사람에게 건너가는 고도의 영적인 기술을 발휘하게 됩니다.
제가 2000년 초반에는 이런 영적 테크닉을 많이 사용하다가 그 후론 말씀사역만
하므로 말씀을 받은 분들이 새 언약을 깨닫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질 그릇 속에 보화가 담긴 것을 알고 능력이 육신에 있지 않고 그 안에서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고후4:7)임을 알고 설령 병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병까지 나을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을 고치니까 병만 고치려고 할 뿐 말씀을 듣고 구원에 이르려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동료 목사의 교회에 가서 고질적인 두통으로 고생하는 분에게
안수를 해 주고 왔는데 나중에 들으니 나았더랍니다.
근데 그 분이 교회를 안 나와 그 교회 담임목사가 가서 왜 교회 안 나오느냐고
물으니 아픈 병이 나았기 때문에 더 이상 교회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병자를 보면 손이 근질거리지만 오직 말씀을 전하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터득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나서 구원과 함께 치유를 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번 아르헨티나 선교여행 중에 마음에 안타까운 두 사람에게만 기도를 해 줬는데
제 속에 있는 주의 생명이 전해지는 느낌이 있었으므로 틀림없이 그 두 분에게
어떠한 형태이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기한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체험하든 병에서 낫든 둘 중 하나겠지요.
이건 주의 종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죄와 사망 아래에 놓여있는
죄인들을 향한 비밀스런 사역의 비결입니다. 이 비결을 전해 드릴 마음이 굴뚝입니다.
사실 신생아의 한 생명의 탄생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서이듯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한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일만 스승은 있지만 아비는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선생이 되어 가르치고 설득한다고 사람들이
듣고 거듭나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의 말씀은 영과 생명(요6:63)이라고 말씀하시듯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도를 터득하여 주의 영과 생명이 발출되는 레에마 사역을 통해
사망아래 있는 죄인을 주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빼앗아
의와 생명으로 옮기듯 생명으로 사망에서 그 사람을 탈취하여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아비는 낳는다는 의미이기에 말 많은 선생은 많지만 아비는 적습니다.
저의 이 말이 허풍이 아니란 사실을 아는 증인들이 많이 있기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보거든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로 졸라대지 말라는 뜻입니다(에로타이)
성령을 대적하지 않는 죄 곧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죄는 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셔야만 그리스도께서 의와 생명의 주가 되심에도
그리스도를 주로 안으로 모시지 않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안타까움으로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므로 빛을 보고 자신이 사망 아래 있음을
발견하고 회개와 세례로 그 자리를 엑스도스 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와서
죄 사함과 함께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를 지켜보며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약과 음식 먹기를 거부하는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치 않는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말씀을 영접하고
그의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살아야 할 사람이 죄를 계속 지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다윗처럼(시51편)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는 것이 엄청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하나 된 계명을 붙잡고 제 자리를 지킵니다.
이런 사람은 악한 자가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또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키십니다.
결국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이 스스로를 지켜 내게 됩니다.
그 분의 이김으로 죄와 사망과 어둠과 세상을 이깁니다. 치열한 싸움입니다.
이런 영적인 전투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자가 터치를 하지 못합니다.
고압선에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를 건드리지 마라’ 옛날 말로는 ‘촉수 엄금’ 이라고 써 붙여 놓는 겁니다.
첫댓글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주께만 영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