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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 언약으로 바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증가할지어다(벧전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비밀하게 구별하심으로 순종함과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증가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대해서, 새 언약으로 바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관해서 말씀드리겠다. 언약은 언제나 피를 통해서 세워졌다. 그러므로 언약이 바꿔지려면 피도 바꿔져야 한다.
히브리서 9장 18절에는 옛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유월절의 언약도 역시 피로 세워졌다.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고 하셨고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하셨다. 이것이 유월절의 언약이다. 피로 세운 언약이다. 그리고 죄사함에 대한 언약도 마찬가지인데 레위기 17장 11절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죄사함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피를 통해서 약속을 해서 죄사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잘못했다고 하면 인정상 “그래. 알았다.” 하고 용서해 주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안된다는 것이다. 피를 사이에 두고 피로 언약을 세워야 그 언약 안에서 사함이 있다는 뜻이다. 율법으로 언약을 세울 때도 마찬가지로 피를 통해서 세우게 되었다. 출애굽기 24장 8절에는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하였다.
왜 언약을 세울 때는 피를 통해서 세워야 하는가? 언약이라는 것은 서로 간의 약속이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저렇게 하겠다는 약속이니까 서로 간에 보증이 있어야 한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은 은행과 나 사이의 일종의 언약이다. 그러니까 은행에서 그냥 돈을 빌려주지 않고 담보를 요구한다. 집을 담보하거나 땅을 담보하라고 한다. 집이나 재산이 보증이 돼야만 은행에서 돈을 빌려준다.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 너희를 돌보아 주겠다. 너희의 죄를 사해주겠다.” 하실 때 그냥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보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피로 세워지는 보증이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지키고 그 약속에 대한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의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내 것은 내 것대로 지키면서 하나님 것은 그것대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관한 계명 하나를 지키려고 해도 날짜만 지키는 것이라면 지킬 수 있다. 그것도 요즘은 장사하는 사람이 안식일 날 문을 닫으려면 장사해서 얻는 이익금을 포기해야 한다. 이익도 챙기고 안식일도 지킬 수는 없다. 그래서 요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일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만큼의 손해가 나지만 그 손해보다도 안식일에 관한 축복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생명 이상의 것을 받는다면, 우리 생명 이상의 어떤 것을 지킨다면 우리의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생명을 붙들고는 우리 생명 이상의 것을 받을 수도 지킬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면 내 생각을 가지고는 안되는 것이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니까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을 지키려면 내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은 그것대로 지키고 또 하나님의 생각은 그것대로 따르려고 생각한다. 자기는 자기대로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려니까 어려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보려고 한다. 자기는 자기대로 유지하고 하나님 말씀은 말씀대로 들으려고 하니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아무리 들어봐도 적막강산이고 첩첩산중이다. 10년을 들었어도 꼬리가 안잡히고 어렵다. 왜 이렇게 잘 안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두 가지를 다 잡으려니까 안되는 것이다. 하나를 버려야 되는데 둘 다 가지려니까 안되는 것이다.
모세는 피를 취해서 제단에 뿌리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했다. 생명을 내놓음으로써만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다. 손해가 없이는 약속을 지킬 수 없다. 친구와의 간단한 약속을 지키려 해도 내가 손해를 봐야 한다. 손해를 전혀 보지 않으려고 하면 약속을 지킬 수 없다. 다른 사람과 약속 시간을 내려면 내 시간을 희생해야 한다. 내 시간을 그대로 지키면서 약속 시간을 내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작은 일도 그러한대 하물며 우리의 생명과 운명에 관계된 것을 우리 생명을 내려놓지 않고 그냥 지킬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기 것을 내려놓지 않으니까 힘은 힘대로 들고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담의 생명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생명이다. 개에게 짖지 말라고 해도 개는 그 말을 지킬 수 없다. 개 짖는 소리가 없어지려면 개가 없어져야 한다. 개가 있으면 개 짖는 소리가 없을 수 없다. 요즘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려고 개가 짖지 못하도록 성대 수술을 한다는데 너무 잔인한 짓이다. 개는 키우고 싶고 개가 짖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그렇게 하는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담의 생명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피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아담의 생명이 저절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생명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고 즐거움으로 따라갈 텐데 아담의 생명은 하나님의 법을 따를 수 없는 생명이다. 짖지 말라고 해도 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 개의 생명이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를 수 없는 것이 아담의 생명이다. 그래서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생명 안에는, 피 안에는 자기의 생각과 뜻, 의지, 계획, 자존심 등, 자기에 관계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피가 없어지면 그런 것들도 다 없어진다. 피가 흘러서 혈압이 떨어지면 의식이 가물가물해진다. 그러면 고집도 없어지고 자존심도 없어지며 생각도, 계획도 없어진다. 내일 무엇을 하겠다는 것도 없어지고 누구와 원수져서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했던 것도 없어지며 누군가를 사랑한다 했던 것도 없어진다. 모든 것이 다 없어진다. 피가 흘러 버리면 모든 것이 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피를 내놓으라고 하신 것이다. 피가 없어지면 생각도 없어진다. 계획도 없어진다. 피가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들을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개는 왜 짖는가? 개의 피 때문에, 개의 피가 살아 있기 때문에 짖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의 피가 빠져나가면 개는 짖을 수 없다. 짖을 생각조차 없게 된다.
피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언약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피의 성질이 언약의 성질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피인가? 이것은 어떤 언약을 가져오느냐를 좌우한다. 어떤 집을 담보하느냐에 따라 은행에서 얼마의 돈을 빌릴 수 있는가를 좌우한다. 2억짜리 집을 담보하면 1억 5천만 원을 대출받을 수 있지만 1억짜리 집을 담보하면 7천만 원밖에 대출받지 못하고 5천만 원짜리 집을 담보하면 3천만 원밖에 대출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피의 성질이 언약의 성질을 좌우한다. 그냥 공짜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내놓은 것만큼 다른 것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피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옛 언약을 살펴 보면 옛 언약은 송아지와 염소의 피로, 즉 동물의 피로 세워졌다. 왜 동물의 피가 사용되었는가? 동물의 피는 나의 피의 형상으로 사용된 것이다. 내 피는 아니지만 내 피와 닮은 모양을 나타내기 위해서 동물의 피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동물의 피는 인간의 피의 형상이었다. 개에게서 피가 나는 것과 사람에게서 피가 나는 것은 다르지만 개에게서 피가 나는 것을 보면 사람에게서 피가 나는 것이 연상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피 대신에 동물의 피를 내놓았다. 그것은 내가 생명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동물이 생명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옛 언약의 축복이 있다면 그것이 누구에게로 가겠는가? 동물에게다. 동물에게로는 가지만 나에게는 구경거리밖에 안된다. 그것은 나의 피가 아니니까 나는 그 피를 구경만 하고 축복도 구경만 하는 것이다.
어린양은 제단에 바쳐져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 그 피는 쟁반에 담겨져서 지성소에 들어갔다. 하나님께로 간 것이다. 나는 어린양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구경만 했던 것이다. 나의 피가 아니고 어린양의 피니까 우리는 그 축복을 많이 구경했는데 실제로 누린 것은 없었다. 내 피가 아니니까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고 내 피가 아니니까 나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것이 구약이다. 내 생각과 계획이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생각과 계획은 그대로 있다. 그리고 동물의 생각과 계획이 끝남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을 보았다. 비록 그것이 동물이지만, 염소나 송아지밖에 안되지만 그 피는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저것은 나보다 못한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놈은 하나님께로 갔고 ‘나는 그놈보다 낫다.’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고 단지 구경만 했던 것이다.
지금은 영화관이 많지만 옛날에는 시골에 영화가 한번 들어오면 그것을 보기가 어려웠다. 돈은 없고 영화는 보고 싶으니까 동네 아이들이 포장을 쳐놓고 영화를 상영하는데 포장 밖에서 귀를 귀울였다. 안에서는 변사의 목소리가 “그리하였던 것입니다.”라고 나오는데 그림은 안보이고 소리만 나오니까 포장에 귀를 대고 들으려고 했다. 안에서는 뭔가 재미있는 그림이 펼쳐지고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들어갔던 것이다. 분명히 지성소 안에서는 어린양과 하나님의 혼인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사람은 뭔지 모르고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것이 구약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어디선가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포장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으니까 무슨 소리가 나기는 하는데, 뭔가 있기는 한데 바깥에서 뭔지 모르고 있는 것, 그것이 구약이다. 교회 안에서도 뭔가 있기는 한데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하다.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럴까?’ 하는 것이 구약이다. 형식적이기 때문에 모양은 갖추었지만 나한테 효력이 없는 것이다. 효력은 이미 다른 데로 가 버렸고 나한테는 없다.
옛날에 겨울이면 시골 사랑방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늦게까지 놀다가 잠을 자는데 좁은 방에서 여럿이 자려니까 명태짝을 엮듯이 머리와 발을 교차해서 잤는데 어떤 사람이 새벽녘이 되니까 다리가 가려웠다. 그래서 긁는다고 계속 긁었는데 아무리 긁어도 시원치 않았다. 옆 사람 다리를 피가 나게 긁었던 것이다. 아무리 긁어도 남의 다리를 긁었으니까 시원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구약시대와 똑같은 일이다.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의 다리를 긁고 있으면 분명히 무엇인가 있는데 아무리 긁어도 시원치 않다. 혼인잔치는 벌어지고 있고 포도주가 남아 돌아간다며 취해서 난리인데 자기 혼자 맹숭맹숭하니 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구약이다.
옛 언약의 피는 상징적인 것이다. 형상에 불과한 것이고 ‘이런 모양이 있다.’라며 소개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실감이 날 리가 없었다. 희생의 피는 그림자고 형상이었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었으니까 온전케 할 수 없었다.
구약의 희생은 곧 죽음에 대한 형식이고 모양이었을 뿐이다. 그런 피로 세운 언약이기 때문에 구약은 계속 모든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했다. 분명히 제사를 드렸음에도 순종을 요구했던 것이다. 분명히 양을 가지고 갔고 모든 의식을 하라는 대로 다 했다. 그러면 될 텐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순종을 요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양이니까 실제로는 순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율법에 대해서 순종하면 복이 되고 순종하지 않으면 복이 되지 않았는가? 내 피가 아니가 때문이다. 내 피라면 순종하고 말고 할 것이 없는데 내 피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순종을 해야 했던 것이다. 율법의 모든 요구는 순종이다. “내가 네게 이른 대로 순종해라. 네가 내 말에 순종하면 내가 너에게 이러저러하게 복을 주겠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면 이러저러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약이다.
순종하지 않는 곳에는 율법이 주어졌어도 효력이 발생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선택받았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났고, 외형적인 모든 조건과 형식적인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도 효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자동차의 모양은 다 갖추었는데 휘발유를 넣지 않으니까 차가 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 휘발유를 넣지 않았는가? 돈이 아까워서 좋은 차를 사 놓고 휘발유를 넣지 않은 것이다. 동네사람을 다 모아놓고 돼지대가리를 놓고 고사까지 지냈지만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왜 차가 움직이지 않는가? 돈이 아까워서 휘발유를 넣지 않았으니 차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자동차 회사를 원망하면서 ‘이 차를 돈을 많이 주고 샀는데 왜 안가느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외형적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다. 모든 형식과 혈통을 다 갖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왜 효력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그 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식은 다 갖췄는데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식은 멋지게 했다. 맹세도 확실하게 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맹세코 사랑할 것이고 절대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라고 약속했지만 그대로 지키지 않으면 이혼하는 수밖에 없다. 결혼식을 하는 것은 어떤 효력을 위한 것인데 그 약속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는 순종이 없으면 효력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사정이 동일하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의 피를 믿는다고 한다. 찬송가에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는 찬송이 있다. 예수의 피를 믿고 강조한다. 그러나 자신의 피가 아니다. 그러니까 순종이 안되는 것이다. 자신의 피가 빠져나갔어야 순종이 될 텐데 자신의 피가 그냥 있으니까 순종이 안될 것 아닌가! 그래서 효력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내 피 속에는 내 생각과 내 목적, 내 계획과 내 주장과 내 고집, 이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있는데 어떻게 효력이 발생하겠는가!
아무리 예수의 피를 믿어도 그 피가 자기의 피가 안되면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옛 언약의 형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오늘날 모든 종교, 기독교 안의 사정은 구약의 사정과 똑같다. 단지 동물의 피를 예수의 피로 바꿨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 동물의 피와 예수의 피는 마찬가지다. 나와 관계 되어서 동물의 피라도 내 피가 될 수 있고 예수의 피라도 내 피가 안될 수도 있다. 때문에 단지 물질적인 동물의 피와 물질적인 예수의 피의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문제기 때문에 오늘날 예수의 피를 아무리 믿는다 해도 그 피가 자기와 연관되지 않으면 구약의 상태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새 언약의 피가 필요하다.
새 언약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옛 언약의 피인 희생의 피와 새 언약의 피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왜 다른가? 물질적인 의미에 있어서 동물의 피와 인간의 피가 다른가? 물론 과학적으로 보면 동물의 피와 인간의 피는 다를 것이다. 먹어 보아도 돼지 피와 소피 맛이 다르고 장어 피 맛이 다르다. 옛날에 한번 고역을 치른 일이 있는데 몸에 좋다고 장어 피를 먹으라고 하기에 ‘그까짓 것 못 먹겠냐?’ 싶어서 먹어 보았다. 얼마나 비린내가 나는지 입에 대자마자 구역질이 나왔다. 똥은 먹어도 장어피는 못먹겠다. 간도 그렇다. 소간이 좋다기에 먹어 보려고 했지만 비린내가 나서 못먹었다. 그런데 말의 간은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피가 다르니까 간맛이 다르다. 하지만 아무리 맛이 달라도 생물학적으로는 동물의 피나 인간의 피나 다 같은 종류다. 성분이 조금씩 달라서 맛이 다를 뿐이지 돼지 피나 소피나 차원이 같다. 예수님의 피가 물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피가 표시하고 있는 것은 인격이다. 그 사람의 생명이 표시하고 있는 것은 인격이다. 인격이 다르기 때문에 그 피의 효력이 다른 것이지 그 피의 물질적인 성분이 달라서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인격은 객관적인 인격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효력이 발생할 수 없다. 그가 죽었지만 나와 관계가 없고 또한 그가 살았지만 나와 관계가 없다. 그가 좋아도 나와 관계가 없고 그가 슬퍼도 나와 관계가 없다. 오직 그의 피와 관계가 될 때만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또한 그의 삶이 나의 삶이 된다.
예수의 피는 그의 생명이고 이 생명은 그의 인격의 증표다. 예수의 피가 흘렀다는 것, 그가 죽었다는 것은 그의 인격의 증표다. 그러니까 예수의 피는 그 인격, 그 위치를 나타낸 피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 한두 사람이겠는가? 수없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런데 왜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속하는가? 그것은 그 피의 위치 때문이다. 그 피 안에 들어 있는 인격의 위치 때문에 우리 인생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 피 안에 우리 인생을 부르고 있고 심지어는 만유를 부르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의 구속이 이루어진다. 구속이 법리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안으로 부름받아서 그 안에 있게 되면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구속이 이루어진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는 말을 거꾸로 바꾸면 피 흘림이 있으면 죄 사함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 피 속에 우리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죄 사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법률적인 문제가 아니다. 옛 언약이 동물의 피로 세워진 것이라면 새 언약은 예수의 피로 세워진 것이고 옛 언약이 동물격으로, 동물만큼의 인격으로 세워진 것이라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세워진 것이다. 새 언약의 기초는 예수의 인격이다.
육체의 피는 육체의 생명이고 인격의 피는 인격의 생명이다. 예수의 피 안에는 예수의 인격이 들어 있다. 예수의 피는 그 인격의 표현이다.
희생의 피인 동물의 피와 인간의 피는 육체성 안에서는 동일하다.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인격 안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개와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생물학적으로 피가 달라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다르다. 위치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가 동물의 피를 볼 때는 동물의 생명이 보이고 예수의 피를 볼 때는 예수의 생명이 보인다. 그것이 피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결정적으로 그 피에서 나타났다.
사람들은 바다를 잠잠케 하는 데서, 중풍병자를 고친 데서, 벳세다 광야에서 모두 그분의 인격을 보느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다 피상적이었고 확실하게 본 것이 못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으로 그 피가 그분 자신을 증거했다. 피를 인해서 더 이상은 나타낼 수 없는 그 운명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아마 사람들이 미리 그분을 알았더라면 그분은 피까지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혈서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보통 말을 해서 들으면 혈서를 쓰겠는가? “내 말을 믿어라.” 해도 안믿어 주니까 혈서를 쓰는 것이다. 도장을 왜 빨갛게 찍는가? 그것은 혈서다. 피를 흘려서 써야 되는데 일일이 그렇게 하려면 복잡하니까 인주를 만들어서 빨갛게 찍는 것이다. 그러니까 함부로 도장을 찍으면 안되고 ‘이것은 내 피다.’라고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고 알고 찍어야 한다.
피로 인해서 그분의 운명의 진실이 나타났다. 이 진실, 이것이 곧 그분의 인격이고 이것이 모든 인간의 위치다. 모든 인간이 돌아와야 할 인간의 위치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돌아와야 할 위치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이 위치가 드러나도록 자기 생명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분이 자기 생명을 드러내신 자리에 우리가 부름받아서 그 자리에서 우리의 위치가 드러나야, 우리의 위치가 발견돼야 우리는 구약을 벗어나게 된다. ‘아! 이것이 내 피구나. 이 피 안에 내가 들어있구나.’라고 알 때 우리는 구약을 벗어나게 된다. AD 1년 이후에 태어났다 해서 신약 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 안에 있는 사람만 신약 시대에 있는 사람이다.
유월절에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왜 피를 보고 넘어갔는가? 이미 죽었으니까, 이 집은 죽은 집이니까 더 이상 죽일 필요가 없어서 넘어간 것이다. 죄를 왜 용서하는가? 피가 보이니까 용서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죄가 없다. 아무리 죄가 많아서 잡으려고 쫓아가다가도 그 사람이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쫓아가봤자 헛일이다. 죽으면 죄는 다 끝나 버리고 만다.
정결케 되는 것도 역시 같은 것이다. 그냥 그대로 있으면서 아무리 씻어 봤자 정결케 되지 않는다. 목욕을 아무리 해 봤자 내 피는 내 피다. 그 피는 그냥 그대로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율법으로, 도덕으로, 종교로 씻어 봤자 아담의 피는 그대로 있다. 아무리 씻어도 속죄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피로써 모든 것이 정결케 된다. 죽으면 정결케 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의 생각이 합리적인 것 같지 않으면서도 아주 합리적인 면이 있다. 어떤 사람을 욕하다가도 그 사람이 죽어 버리면 욕이 끝나는 것이 그것이다. 죽일 놈, 살릴 놈 하다가도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아이고, 그래도 마음은 좋았는데…….’라는 생각만 난다. 서양사람들은 한국 사람이 감정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 생각이 맞다. 죽은 놈에게 원망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즉 죽으면 정결케 된다. 죽지 않으면 정결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왜 죄를 사하시는가? 죽었으니까 죄를 사하는 것이지 그냥 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를 믿으려면 내가 죽어야 된다는 말이다. 내가 나를 버리고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로 보이니까 사해 주시는 것이다.
이 위치를 떠난 것, 그것이 곧 부정이고 죄다. 싸우고 도둑질하고 나쁜 짓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의 목록에서 가장 말단의 죄요 찌꺼기 죄에 해당된다. 죄를 지으려면 죄다운 죄를 지어야 되지 도둑질이나 싸움질 같은 죄답지도 않은 죄를 짓고 창피를 당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위치를 떠난 것, 이것이 부정이고 죄다. 그러므로 이 위치로 돌아와야만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새벽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애걸복걸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 안에 있는 문제기 때문에 사정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정한다고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 같으면 다 해결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정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정한다고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부정과 죄는 우리가 이 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생겼다. 예수의 피를 떠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베드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는 말을 썼을까? 우리보다 베드로는 훨씬 더 정감있게 이 사실을 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생각하면 베드로에게 무엇이 생각나겠는가? 예수의 피만 생각하면, 예수의 죽으심만 생각하면 베드로는 예수를 따랐고 예수를 배신했던 자기 자신이 생각날 것이다. 예수의 진실이 나타난 반면에 자기의 거짓이 드러났을 것이다. 그분의 운명이 드러났을 때 버리고 갔지만 그것이 바로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몰랐다. 그 안에 자기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는 피로 세례를 받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가야바 법정에서 세 번 예수를 모른다 하고 밖에 나갔을 때 그는 어떤 상태였던가! 예수의 피로 젖어있던 상태였다. 그때 예수는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피흘림으로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베드로는 그것이 피 뿌림이었음을 알았다. 예수의 죽음으로 그는 뿌려져 있었다. ‘나는 예수의 죽음 안에 덮여져 있었구나. 살려고 나갔지만 나는 산 것이 아니었구나. 그분이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피 뿌림이라는 말 속에는 베드로의 일생이 함축되어 있다. 특별히 가야바의 법정에서,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안에서 자기 인생이 조명되기 때문에 그는 피 뿌림을 받는다는 말을 쓰게 되었다. 베드로는 그 피 뿌림 때문에 정결케 된 사람이다. 예수의 죽음을 인해서 베드로의 모든 것이 끝나버렸고 그의 모든 생각이 끝나버렸다. 그의 모든 계획도, 그의 자존심도, 그의 명예도, 모든 것이 다 끝났다. 그는 완전히 피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새 언약은 희생의 피 대신에 바로 이 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순종 대신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신약은 왜 자꾸 믿음을 요구하는가? “예수를 믿으라. 독생자를 믿으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준다.” 하며 자꾸 믿으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 인격이 바로 내 운명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순종보다 더 깊은 것이다. 순종이 더 깊은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믿음이 순종보다 더 깊다. 내가 만일 그 생명이 내 생명이라는 것을 안다면, 내가 그 생명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나는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이다.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은 피로 정결케 된 사람이고 피로 사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 피 안에는 아무 죄가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운명, 그 생명 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아무런 거역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 나의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의 죽으심으로 새 언약이 세워졌다. 마지막에 만찬을 놓고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피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살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라 했는데, 베드로는 피 뿌림을 받았다고 하였다. 베드로는 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구약에서의 순종은 신약에 오면 믿음으로 바꾸어졌다. 그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순종은 구약적인 순종밖에 안된다. 아무리 순종해 봤자 그분에 대한 믿음이 없이 순종하는 것은 구약의 순종밖에 안되기 때문에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 구약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순종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먼 것이었다. 축복도 먼 것이었고 성질도 먼 것이었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금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분의 인격이 곧 내 인격이고 그분의 인격이 진실이며 그분의 인격이 영원하고 그분의 인격 외에는 모두 가짜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인격이 온전하다는 것을 안다면 세상이 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다.
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는 그런 믿음은 갓바위에 가도 많다. 그런 믿음은 오히려 갓바위에 더 심하게 있고 갓바위에서 더 열성적이다. 절을 올라가기 어려운 높은 산 위에 세워놓은 것은 가파른 데 어렵게 올라갈수록 더 기도의 응답이 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성을 들이면 더 잘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안에서도 그런 식의 믿음을 가진다면 그 믿음은 돌부처를 찾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떤 경우에는 돌부처를 찾아가는 사람의 믿음보다 못할 수도 있다.
지금 이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니라 그 인격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믿음, 이것 외에는 없다는 믿음이다. 그 안에 있지 아니한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 그 바깥에 있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이것을 알고는 거짓말을 더할 수 없고 거짓 생활을 더 할 수 없다. 그 진실을 보았는데 어떻게 엉뚱한 짓을 또 하겠는가, 진짜를 보았는데 가짜를 더 하겠는가! 말씀을 들어도 진짜를 듣고 나면 가짜를 못 듣는다. 진짜 메이커 옷을 입어 본 사람은 가짜 옷을 못 입는다. 옷도 그러한대 하물며 인격의 진실을 보고 난 후에 다른 인격을 따를 수 있겠는가! 다른 것은 흉내낼 수도 없고 시도할 수도 없다. 아예 못하면 못하지 안한다. 한 번도 못 오를망정 진짜를 보았으니까 가짜는 더 이상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이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받았다. 이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미리 아신바 되었고 이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영의 구별을 받았다. 구약에서의 순종이 우리를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 하나님께로 접근시켰다면 이 피 뿌림은 생명 안으로 우리를 접근시켰다. 이것이 신약이다. 신약 안으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이 피가 필요하다.
새 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명이 되어 내 속에 와서 그분이 사는 것이다. 새 언약으로 들어오려면 그의 피 뿌림이 필요하다. 이 피가 없이는 새 언약으로 들어올 수 없다. 여전히 동물의 피 같은 피를 가지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런 순종을 가지고는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오려면 예수의 피가 필요하다.
3절 이후를 보면 베드로가 우리를 새 언약 안으로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 언약으로 들어오려면 이 피를 먼저 알아야 한다. ‘아! 이 운명만이, 이 진실만이 새 언약의 요소가 되는구나. 이것을 가져야만 새 언약이라는 집을 지을 수 있구나. 이것을 가져야만 새 언약이라는 문을 만들 수 있구나! 모든 것을 열 수 있는 키가 바로 새 언약이구나! 이 피구나.’라고 알아야 한다. 예수의 피가 새 언약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피는 곧 나의 피다. 내 피가 새 언약의 모든 열쇠가 되고 모든 재료가 되는 것이다. 이 피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빵집에서는 밀가루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 길게 만들어 놓은 것도 있고 넓게 만들어 놓은 것도 있는데 알고 보면 다 밀가루로 만든 것이다. 새 언약도 길게 만들어 놓은 것도 있고 넓게 만들어 놓은 것, 둥글게 만들어 놓은 것도 있다. 단 것도 있고 신 것도 있고 많은 것이 있다. 그런데 그 재료는 전부 예수의 피다.
밀가루가 없으면 빵이 안된다. 보리빵이라 하기에 나는 순전히 보리로만 만든 빵인 줄 알았다. 그러나 보리로 빵을 만들어도 밀가루가 들어가야 한다.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으면 보리개떡밖에 안된다. 글루텐이라는 것이 있어야 부풀려지는데 보리에는 글루텐이 없기 때문에 보리를 갈아서 아무리 해 봐도 납작한 개떡밖에 안된다. 그래서 보리가루와 밀가루를 섞어서 보리빵을 만든다. 빵이라고 생긴 모든 것 속에는 다 밀가루가 들어가 있다. 새 언약이라는 모든 것 속에는 다 예수의 피가 들어가 있다. 예수의 피가 없이는 새 언약이 성립할 수 없다. 옛 언약 안에는 양의 피가 없이는 아무것도 효력이 없었다. 어떤 것도 옛 언약은 희생의 피를 드린 후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단에 제물을 드리고 피를 드린 후에만 옛 언약 안에서 거래가 가능했다. 양의 피가 없이는 거래가 불가능하다. 은행에 갈 때는 신용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용의 표시가 담보다. 담보 없이는 아무것도 안되는 곳이 은행이다. 아무리 친해도 담보가 없으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다. 옛 언약 안에 있는 것은 모두 희생의 피가 보증이었다. 마찬가지로 새 언약의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예수의 피는 곧 우리의 피다. 우리의 피가 새 언약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법리적인 언약, 법률적인 언약은 동물의 피로도 가능했다. 그러나 생명의 언약은 동물의 피로 안된다. 남의 피로는 안된다. 내 피로밖에는 안된다. 내 피로밖에 안되니까 우리는 바뀌어서 새로운 길을 가게 되고 새 생명을 받게 되며 새 생명 안에 있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때 우리는 ‘아! 물고기는 물고기이기 때문에 물 속에서 저렇게 누리는구나!’라고 알게 된다. 우리는 수영을 하려면 숨도 차고 힘도 드는데 물고기는 전혀 숨도 차지 않고 힘도 들이지 않는다. 금붕어가 어떻게 유연하게 헤엄을 치는지 자세히 보니 갈 때는 꼬리를 살짝 흔들고 멈춰 있으려면 지느러미를 약간 나풀거린다. 잠수함은 공기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물 위로 올라오고 내려가는데 물고기는 스스로 공기를 조절해서 마음대로 올라가고 내려간다. 그런 기능이 우리 속에도 내장되어 있다면 우리도 물 속에서 자유자재로 살 수 있을 텐데 우리에게는 그런 생명이 없다. 물고기는 그런 언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놀라운 생명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서 그런 삶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신약 안에 있는 축복을 누리고 살려면 그 언약이 있어야 한다. 그 언약의 내용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이 언약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 피로 말미암아 구약에서 신약으로 바꿔지는 것이다. 옛 언약, 형식적인 언약에서 실제적인 언약으로 바꿔지게 되는 것이다. 나의 역사가 바뀌고 나의 인생이 바뀐다. 생명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니까 우리의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 부활의 생명, 부활의 세계를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새 언약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이 피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이 피를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는다. 이 피를 믿는 사람은 정결하게 된다. 이 피 안에서 우리는 새 언약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옛 언약 안에서 동물의 피를 가지고도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갔거늘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없겠느냐고 한 말씀대로 당신의 피의 온전하심을 의지해서 우리가 주 앞에 나갈 수 있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새 언약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새 언약의 축복 안으로 부르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먼저 우리에게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이 피 안에서 우리의 운명이 발견되고 이 피 안에서 우리의 진실이 발견되어서 당신이 이끄시는대로 우리가 새 언약 안으로 이끌려지기를 원하고 새 언약의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