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초한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삼국지 다음으로 많이 아는 유방과 항우의 이야기이고, 여기서 흔히 화자되는 토사구팽이나 사면초가라는 사자성어가 나오고, 경극으로 유명한 패왕별희의 소재이기도 하니까...
유방과 항우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말할까하는 궁금하기도 했고, 초한지를 읽어보면 항우는 좀 거칠다는 면이 강조된 것이 있는데, 사실 중국에서는 유방보다는 항우를 더 높이 친다고 한다.
사실 유방은 항우가 정복한 천하를 인수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기서 항우는 약간의 자만심과 과시욕을 드러내지만, 또한 자신의 연인 우희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지닌 인물로도 나오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아주 순진한 인간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유방과 항우는 책 속의 이야기대로 경쟁하면서 대립하며 천하를 정복하려는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한 쪽이 아주 우수하다거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유방이 이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에서 정리되는 부분에서는 유방이 오히려 야심이 큰 인물로 묘사하고, 항우는 소박한 소망을 지닌 인물로 마무리를 짓는다.
이 영화에서의 특징은 다른 초한지와는 달리 우희가 시나리오 전개에서 중요하지는 않지만 한 축을 이루는 인물이며, 전쟁으로 얼룩진 난세의 시대에서 유방의 인간성을 지탱해 주는 인물로 나온다.
또한, 주요 인물 즉, 항우의 책사 범증과 유방의 책사 장량 간의 대화에서 나오는 질문과 대답, 우희와 유방의 짧은 대화에서 나온 질문, 범증이 장량의 이간질에 의해 항우에게 쫓겨난 후 범증이 죽기 전 장량에게 남긴 대화 등 모든 것이 생각지 못한 복선이었고,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던 후반부에서 제시하며 마무리를 짓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고조 유방이 죽은 후 그 후예들이 홍문연 즉 항우와 유방이 연회를 하며 대화를 나눈 곳에 제사를 할 시점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항우와 유방의 천하지계가 전개되는데, 여기서 천하를 나누고 전쟁을 하는 모든 것을 바둑을 매개로 하여 책략을 주고 받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홍문연에서 장량과 범증이 바둑을 둠으로서 서로의 지략을 겨루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통해 서로의 전략과 능력을 알아보는 그 장면은 볼 만했다. 서로를 피토하게 만들 정도의 긴박감은 잘 표현했다는 말이 적당할 것이다.
여기서, 범증은 장량에게 묻는다.
"꼭 여기서 대국을 두어야겠는가?"
유방은 명분을 얻어 항우의 군대를 격파하고, 오성에서 사면초가에 몰리게 하여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내용 중에 초반에 항우는 유방에게 자신의 연인 우희를 고향에 보내는 호위대장을 부탁하자 이를 받아들여 경호를 하며 길을 떠난다. 하지만, 유방의 참모들은 함양을 정복하여 진왕에 임명될 것을 강력히 권하여 함양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는데, 그 와중에 밤중에 우희의 천막 숙소에 진나라 패잔병이 침입하여 우희를 인질로 잡고, 이에 유방은 말과 식량을 가져가도 좋으니 우희를 풀어달라고 한다. 침입자들은 유방을 때리자 우희는 작은 칼로 상처를 입혀 유방을 구해주지만 자신의 아끼는 비파를 뺏긴다.
이 후, 우희는 유방의 보호를 받으며 지낼 때, 유방은 각종 비파를 진열하여 선물하지만, 우희는 자신의 낡은 비파가 더 좋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빼앗긴 비파를 가져오게 하여 선물한다.
난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그 인질극 상황은 연출된 것이 아닐까? 유방은 우희를 좋아했을까?
영화에서는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유방은 우희를 지켜주고 싶어 안전하게 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우희에게 밀서를 보내 항우를 설득해 항복하라고 부탁한다.
이에 우희는 항복보다는 항우의 사랑을 택해 같이 죽음을 맞이한다.
유방은 우희를 좋아했을 것이다. 항우를 우희에게 반해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주었고, 구해주는 상황에서 위기에 처하자 유방은 항우를 구해준다.
거기에 유방이 있던 것은 우희를 보러 간 것이 분명할 것이니 말이다.
유방은 우희를 좋아했기에 뺏으려하지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 곁을 지킬 것을 설득하여 항우 곁에 있게 한다. 이는 유방의 계책일 수도 있었다. 그래야 함양으로 갈 수 있었고, 항우 옆에 있어야 우희를 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유방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항우가 최후를 맞이하기 전 우희는 유방에게 칼을 달라고 하여, 항우가 편히 눈감게 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유방은 칼을 내어주고, 우희는 상처입은 항우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항우의 얼굴을 만지는 순간 화면에는 갑자기 우희의 손에 피가 보인다. 이미 항우에게 다가가면서 자신의 배를 찌른 거였고, 항우의 즉음의 순간을 같이하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항우는 그 칼로 자신의 배를 찔러 우희와 쓰러지면 최후를 맞이한다.
그것을 지켜보던 유방은 너무나도 슬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우가 이대로 쓰러지면 우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곁에 있을 수 있었고, 유방은 그것으로 흐뭇했을 것이지만, 유방은 천하와 그 행복을 바꾼 것이니까 말이다.
난 우희와 항우가 죽는 장면에서는 지금도 눈물이 날 정도로 인상깊었다.
우희와 항우의 로맨스는 짧지만 나름대로 잘 표현했고, 어쩌면 항우는 소박한 삶을 꿈꾼 사람이었는지도 모를 것이고, 그걸 알기에 우희는 유방보다는 항우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항우의 사랑이 유방보다는 더 진실함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우희가 유방에게 잠시 몸을 맡길 때, 비파를 찾아주고 나서 자신은 홍문연으로 간다는 말을 하면서 짧은 대화를 하고, 우희는 묻는다.
"천하를 얻은 후, 그 대가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범증이 시골에서 지낼 때 장량이 찾아와 바둑을 둔다.
그러면서 범증이 최후를 맞이하기 전, 바둑을 두면서 장량에게 말을 남긴다
"바둑을 두다보면...."
유방이 최후를 맞기 전 장량이 방문하여 그 간의 일을 정리하며 이 모든 질문에 대답을 말한다.
홍문연에서 범증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로서는 애매했다. 사실은 범증은 유방이 천하를 얻을 것을 예상하였고, 전쟁을 통한 천하대전은 하지 말자는 의미였는데, 이 의미는 대화로서가 아니라 회상으로서 대답한다.
우희에 대한 질문은 유방이 말한다.
"그것은 사람을 믿는 능력을 상실한다"
아주 의미있는 대답이었고, 우희는 세상의 이치를 이해할 수준높은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범증의 말에 대해서는 더 인상깊다.
항우가 죽은 후 범증이 항우에게 남긴 부하가 건네준다. 이것을 본 유방은 자신의 참모인 장량과 한신 등을 죽인다(이게 토사구팽이지...)
장량은 범증과의 마지막 대화를 회상하며 나온 말은 범증은 모두가 패하게 만드는 수가 바둑에는 있다는 것이고, 유방이 자신의 측근을 죽이도록 하는 술수를 편 것이라는 것이다.
장량과 유방의 대화에서 오히려 천하에 욕심을 낸 것은 유방이고, 만민구제는 자신의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누구가 부와 명예, 권력을 손에 넣는 것이 로망이고, 또한 자신의 연인도 곁에 있기를 바라지만, 그 행복을 완벽하게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초한지에서 항우는 모든 것을 누렸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유방은 연인은 얻지 못했다.
한평생을 후회없이 행복하게 산 사람은 항우일 거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온 초한지 소재 영화 중에서 항우와 유방, 우희를 인간적으로 표현한 좋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