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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목사고시 리멤버 (예장통합) 원문보기 글쓴이: 리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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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
리멤버
제목:성서적 교회상과 바람직한 목회자상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논술도 설교와 마찬가지로 쉽게 출제되었습니다.
논술의 영원한 출제 0 순위 - 교회상과 목회자상에 대한 문제 입니다.
모범답안으로 잡은 공지사항 17번의 도입부를 그대로 사용하여 작성해 보겠습니다.
Ⅰ. 서론
한국교회는 선교 1세기만에 세계가 놀랄만한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부흥의 이면에는 순교와 눈물로 믿음의 역사를 지킨 선배 목회자들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된 신앙운동으로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1903년 선교사들의 원산 기도회 모임이 도화선이 되어,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를 시작으로 삼남지방 목포까지 전해지는 전국적이고 교단을 초월하는 회개와 부흥과 성령운동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교회는 성장이 둔화 되거나 마이너스성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침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침체는 교회사적인 양적 성장과 더불어 교회의 대형화, 교권주의, 교회의 상업주의적 변형, 권위주의, 말씀과 삶의 이원화, 헌신과 섬김의 부재,목회자의 영성부족과 도덕적 해이 특히 성령의 임재와 역사의 부족 등의 모습을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본 논고를 통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성서적 교회상과 바람직한 목회자상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서론부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어떤 문제가 나오더라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시작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모범 답안으로 작성한 위 서론에도 출제자가 요구하는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문제제기가 충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Ⅱ. 본론
1.현황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헌법은 교회를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여 그들로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를 나타내신다. 이 무리가 하나님의 집(딤전3 : 15)이요, 그리스도의 몸(엡1:23)이며, 성령의 전(고전3: 16)이다. 이 무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성도들인데 이를 가리켜 거룩한 공회 곧 교회라 한다(제7조 교회의 정의).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집과 그리스도의 몸과 성령의 전으로서의 거룩성과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세속적인 물량주의와 상업주의가 득세하고 있으며 말씀은 삶과의 괴리감속에서 그 힘과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목회자는 외형적인 공적 쌓기로 그 영적인 권위는 땅에 떨어져 영성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목회적 타격을 입고 있는 상황이다.
2.문제점
이러한 문제의 발생은 교회와 목회자가 그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린 것에서 시작었다. 교회는 물량적 성장의 대상이 아니며 그 외형적인 크기는 성서적이고 바람직한 교회의 기준도 아니며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작금의 상황은 그 도를 넘어 지나친 물량주의와 대형화를 지향하고 있다. 또한 목회자도 이에 편승하여 교회를 키우기에 혈안이 되어있으며 외형적인 크기로 목회의 성공여부를 가름 하려는 량과 수치의 세상적 가치기준에 빠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엡1:23]”.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엡4:12]”. 라고 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분의 충만함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봉사를 통하여 교회를 교회답게 세울 수 있다고 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전형적이고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과 사도의 모습을 통하여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늘어나는 부흥을 통하여 성서적인 교회와 목회상을 보여주었다.
3.대안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의 내용은 “회개” “성령”이었다. 회개를 통하여 부흥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성경의 진리는 변함이 없다. 성서적인 교회상과 바람직한 목회자상도 회개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과 물량주의적인 과시를 버리고 말씀과 영성을 회복하여 삶에서의 말씀의 이원화를 극복하고 지역과 사회를 더 많이 섬기고 봉사할 때 교회는 성서적인교회로 회복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 주실 것이다." [요12:26] 교회가 지역과 사회를 섬기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높여주실 것이라고 했다. 목회자는 교회를 양적인 성장지향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에 힘썼던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성장과 부흥은 저절로 주어질 것이다. 성장이 목적인 목회가 아니라 거룩한 말씀과 성령의 임재를 우선시하는 바람직한 초대교회와 목회자상으로 돌아갈 때 성서적인 교회와 목회자상은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
Ⅲ. 결론
지금까지 성서적인 교회상과 바람직한 목회자상에 대한 상황과 문제점 그리고 대안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분명한 교회상과 목회자상을 제시해주셨다. 그것은 말씀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는 그 본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앞서가는 ‘여름날의 냉수와 같은 생명의 말씀’ 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는 이러한 사명과 우선순위를 자각하고 실천하는데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는 변화하는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영성과 거룩성을 회복하고 이웃과 사회를 향하여 섬김과 봉사를 사랑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시대를 이끌어가는 빛 되고 소금 같은 성서적인 교회와 목회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교회와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이고 성경적인 교회와 목회자로 거듭나고 회복되는 길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6:33]라고 했다. 성서적인 교회상과 목회자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먼저’라는 우선순위를 회복하고 성경을 첫 번째가 아닌 전부로, 시작과 마지막으로 삼을 때 반드시 구현되리라라 확신한다.
목사고시 문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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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
리멤버
-서론 잡는 법-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설교와 논술은 반드시 형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가 내용입니다.
논술의 어느 문제가 나와도 시작은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면 부흥이나 성장 또는 정체성에 대한 성장방안...
즉 한국교회의 정체에 대한 성장방안을 사도행전적 교회와 목회자상으로 서술하시오!
라는 가상의 문제를 만들어봅시다.
*논술은 어떤 문제가 나오더라도 서론 도입부는 긍정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Ⅰ. 서론
한국교회는 선교 1세기만에 세계가 놀랄만한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부흥의 이면에는 순교와 눈물로 믿음의 역사를 지킨 선배 목회자들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된 신앙운동으로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1903년 선교사들의 원산 기도회 모임이 도화선이 되어,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를 시작으로 삼남지방 목포까지 전해지는 전국적이고 교단을 초월하는 회개와 부흥과 성령운동이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문제가 나오더라도 쓸 수 있는 도입부 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출제문제에서 요구하는 문제제기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199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교회는 성장이 둔화 되거나 마이너스성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침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침체는 교회사적인 양적 성장과 더불어 교회의 대형화, 교권주의, 교회의 상업주의적 변형, 권위주의, 말씀과 삶의 이원화, 헌신과 섬김의 부재,목회자의 영성부족과 도덕적 해이 특히 성령의 임재와 역사의 부족 등의 모습을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본 논고는 한국교회의 정체 원인에 대한 성장방안을 사도행전적 교회와 목회자상으로 제시하고 성장방향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긍정적인 서술부분이 끝나면 문제에서 요구하는 문제제기 즉 “그러나”로 들어가서 서술하면 도입부 서론부는 완성됩니다.
한 문장으로 연결하면
Ⅰ. 서론
한국교회는 선교 1세기만에 세계가 놀랄만한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부흥의 이면에는 순교와 눈물로 믿음의 역사를 지킨 선배 목회자들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된 신앙운동으로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1903년 선교사들의 원산 기도회 모임이 도화선이 되어,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를 시작으로 삼남지방 목포까지 전해지는 전국적이고 교단을 초월하는 회개와 부흥과 성령운동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교회는 성장이 둔화 되거나 마이너스성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침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침체는 교회사적인 양적 성장과 더불어 교회의 대형화, 교권주의, 교회의 상업주의적 변형, 권위주의, 말씀과 삶의 이원화, 헌신과 섬김의 부재,목회자의 영성부족과 도덕적 해이 특히 성령의 임재와 역사의 부족 등의 모습을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본 논고는 한국교회의 정체 원인에 대한 성장방안을 사도행전적 교회와 목회자상으로 제시하고 성장방향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빨간색 부분은 문제가 사도행전적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것이라 반드시 성령의 역사와 임재가 언급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분량이 너무 많으면 줄이면 되겠습니다.
너무 어렵게 쓰려고 하지마시고 되는 대로 쓰시고 반드시 결론까지 마무리를 하시고
전체형식을 꼭 지키십시오.
종교다원주의와
목회자의 자세
목 차
Ⅰ. 서론
Ⅱ. 종교다원주의의 역사
1. 종교다원주의의 정의
2. 종교다원주의의 태동
Ⅲ. 종교다원주의의 구심점과 오류성
1. 종교다원주의의 근거
2. 종교다원주의의 오류성
Ⅳ. 다원화시대의 목회자의 자세
Ⅴ. 결론 및 제언
* 참 고 문 헌 *
Ⅰ. 서 론
최근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기독교와 다른종교의 관계문제가 크나 큰 논쟁거리로 대두되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열렸던 감리교 제 19차 특별총회에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라며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 감신대의 변 선환, 홍 정수교수가 총회가 총회로 부터 교수 및 목사자격 박탈을 결의 당함으로 해서 그 여파가 감리교단 뿐만 아니라 개신교 전체에 커다란 물결을 일으키며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런 종교다원주의는 역사속의 어느 요소도 절대적으로 보지 않는 이 시대의 흐름인 "상대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종교에 까지 마침내 이 상대성의 원리를 적용하려고하고 있다. 이같은 사상이 오늘 기독교에 까지 도입되었고 일부 신학자들이 이것을 수용하면서 마침내, 기독교도 이제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의 종교에 불과한 것으로 오인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현실의 측면에서 세계선교의 큰 몫을 담당해야 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은 이런 종교다원주의의 침투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이가? 사실 이런 문제들로 이해 목회상의 하나의 걸림돌이 되어진 것은 사실이며, 만약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면 교회의 역활이나 필요성이 상실되게 되는 것이다.
세계는 혼자서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남에게 내가 다가서기 위해서는 분명 그들과의 접합점이 있어야 되겠고, 또한 그들의 문화나 종교에 대한 이해와 상호간의 대화가 필요한다. 그러나 이런 대화의 한계선을 어떻게 확연히 그어야 될 것이며, 그 책임을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종교다원화 사회에서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를 종교다원주의를 분석해 가며, 알아보기로 하겠다.
Ⅱ. 종교다원주의의 역사
1. 종교다원주의의 정의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에 관한 이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독교절대주의 (Christian absolutism)는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으로 기독교만을 참 종교요 절대종교로 믿는 것이다. 라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론이다. 포괄주의 (inclusivism)는 기독교 절대주의와 종교다원주의를 절충하는 입장으로서 다른 종교나 타 문화권에 있는 경건한 사람들은 사실상 기독교인이므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라너(Karl Rahner)의 "의명의 크리스챤"(anonymous Christian)이나 파니카(Raymond Panikkar)의 "미지의 그리스도"(unknown Christ in Hinduism),큉(Hans kung)의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pre christian)의 개념이 그것이다. 그러면 종교다원주의는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종교다원주의 (religious pluralism)란, 진정한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 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구원의 길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종교의 다원주의는 일종의 종교 혼합주의로 인식되고 있다.현대는세속화 시대인 동시에 종교부흥의 시대이기도 하며 아울러 혼합주의가 기독교에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화란의 신정동구의 선교학자 헨드릭 크래머는 1954년에 이미 "인류역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형태의 혼합주의에 직면하게 될 것인데 그런데 기독교는 혼합주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혼합주의는 종교와 선교의 문제이다." 라 지적하였었다. 그는 1938년 마드라스 선교대회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노선을 따라 타종교에 대해 부정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그것은 허공은 치는 소리에 불과하고 세계 기독교운동에서 역사적 기독교의 뿌리를 흔드는 혼합주의에 가까운 종교다원주의가 등장하여 기독교의 독특성은 물론 선교를 휘협하고 있다.
2. 종교다원주의의 태동
현대에 와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문제가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 되고 전통적인 기독교 절대주의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가?
종교다원주의의 태동은 두가지 측면에서 추적될 수 있다.
그 첫번째로 지금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WCC의 종교연합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과 비교종교학자들이 종교다원주의를 재기했다. WCC안의 다원주의적 동향은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한 제 2차 세계선교협의회 (IMC)에서 이미 폴(K.T.Paul)과 차오(T.C.Chao)에 의해서 나타났다. 이들은 기독교가 힌두교지역과 유교지역의 국민들과 함께 서구 세속주의에 저항해야 하는 공동적 사명을 위한 대화가 제시했었다. 이러한 제시는 20세기 후반기에 와서 세속주의와 손을 잡은 WCC의 세속주의 운동과는 달리, 세속화를 저항하기 위한 종교연합운동을 시도했던 것이다. 원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공인받게 되고 데오드시우스 황제치하(379-395)에서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 로마제국과 기독교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왕국이 되었음며 제국의 안정은 교회의 안정과 직결되고 제국의 적은 동시에 기독교의 적이 되었다. 이에 근거한 18.19세기의 기독교 선교 정책은 서구의 식민주의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선교정책이었다. 서구의 군대가 동양의 나라들은 점령하면, 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기독교로 그 지역의 종교를 점령하는 정책이었다.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선교의 목적이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전세계로 확산되고 전파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식민지정책이 종식되고 식민지들이 독립을 획득하게 되자 정복식의 선교정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54년 인도정부는 개종을 주 목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철수하도록 명령했으며, 그후 선교사들은 중국, 앙골라, 아랍세계등에서 동일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선교상황이 이론과 실제 영향아래, 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일부 선교사들에 의해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는 공존의 논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한편, 두번째 이유는 과학의 발전에 의한 종교적 다원주의 태도의 촉진이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발견과 탐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콜롬버스, 마젤란 등이 기독교 세계밖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곳에 기독교와 상이한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역사, 인류, 과학연구가들은 인류의 기록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세계의 다른곳에도 종교의 유형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동서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권의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자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문제가 긴급하게 일어났다. 특히 비교 종교학이 발전함에 따라 비교 종교학자와 종교사 연구가들을 통해 다른 종교가 기독교와 동일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Ⅲ. 종교다원주의의 구심점과 오류성.
1. 종교다원주의의 근거
일반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각각 다른 근거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다. 일반적인 입장이 기초하고 있는 토대는 세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신념이다.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한 19세기 종교사학파의 트릴치(Ernst Troeltsch)가 이를 대변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음으로 어느종교나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없다. 동양인에게는 불교와 힌두교가 동일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 모든 종교에 주어졌다는 것이 트릴치의 근본 신념이었다.
둘째,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신념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면 당연히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른 문화와 상황속에서 이일을 수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깊이에서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며 길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간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적인것, 문화적인것, 시대적인것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모든 문화성과 우연성 배후에는 하나의 신, 즉 공동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 스미스 등이 이를 대변한다.
셋째, 모든종교는 공동의 심리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각 개인에게 공동으로 존재하는 심리학적과정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견해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무의식 속에 기원을 가진 심리학적 사건으로 취급하여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이것은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려는 일부 현대 심리학자들의 시도로써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이 그 대표자이다.
종교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이 일반적인 견해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를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류 역사상 하나님의 유일회적인 성육신이요 전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와 모순된다. 모든 종교가 공동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아네 주어지 계시의 유일회성과 규범성 및 궁극성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거나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공동의 심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융의 주장은 종교를 지나치게 부관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예수의 유일회서을 부정하고 단지 여러 구원자 중 하나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비기독교적이며 비성서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는 일반대주을 비롯하여 자유주의적 성향의 신학자들에게 직접,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유형의 종교 다원론을 주장한 개신교신학자는 영국출신의 장로교회목사로 현재 미국 클레마운트 신학대학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존 힉(John Hick)을 들 수 있다. 그는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규범과 모든 종교의 중심을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으로 전환하는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주장했다. 그는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화로 이해하고, 하나님은 "오직"예수안에서만 만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참으로" 만나질 수 있다는 식으르 기독교 전통신앙을 재 해석했다. 그 고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은 동일한 신을 섬기고 있다는 극단적인 견햬를 제시했다.
특히(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 God Has Many Names. 1980)라는 저서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힉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다른 신이 아닌, 동일한 신을 예배하며, 그 신은 여러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모든 종교의 배후에는 하나의 궁극적 실재가 있으며, 기독교는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God)으로, 유대교는 아도나이(Adonai)로, 모스렘교는 알라(Allah)로, 힌두교는 라마(Rama)날 크리슈나(Krishna)로 부른다. 그러므로 힉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인 교리로부터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새로운 주장에로의 일대 전환을 제안했다.
이러한 힉의 견해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예배현상의 유사성으로 부터한 하나님의 개념을 이끌어 낸 것으로 다른 종교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
힉 이외에도, 종교적 다원주의에 가까운 인물로 틸리히(Paul Tillich),스미쓰(Wilfred Cantwell Smith), 레이스(Alan Race), 사마르타(Stanley Samartha)등이 있다. 가톨릭 신학자로는 니터(Paul F. Knitter),파니카, 라너,큉을 들 수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 2차 비티칸공의회(1965)선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신도를 포함시키려 함으로써 포괄주의적인 입장을 공시적으로 천명했다.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하나님을 진실로 찾고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기 양신의 소리에 귀를 귀울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2. 종교적 다원주의의 오류성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를 유일한 참 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점과 결정적인 오류는 무엇인다?
종교다원주의는 비성서적인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인 동시에 오류이다.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이성적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 끝에 그리스도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비성서적 결론에 도달했다.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면 세셰 인구의 70-80%에 달하는 비 기독교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 인도주의적 관심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일어났다. 이것은 한스 큉이나 감신대의 변선환, 홍성수 의 글에서도 입증된다. 큉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기독교 민족이 서구의 기독교 민족을 수적으로 훨씬 앞질러 각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통계를 생각할때도 당신들은 여전히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라 반문했다. 변교수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면 인류의 대다수는 신의 저주를 받고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함으로, 기독교인만 구원 받는다는 기독교 전통적인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큉의 주장을 너무나도 자명하다고 했다. 홍교수는 "우리의 신은 제 자식만 사랑하는 편협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인가? 아니면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고 자비를 베푸는 가없는 은총의 신인가?... 하나님께서 만일 무신론자나 이교도까지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와 같이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에 접근하여 합리적으로 구원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진리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첫째, 모든 종교의 신이 이름만 다를 뿐이지 실제로 동일한 신이라는 주장은 비성서적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곤 한 성경말씀이 이를 입증한다(출 20:3, 23:24-25, 시 96:5,사 44:6-8).
둘째,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 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했다. 인간의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성경은 세상적인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고전 1:21).
셋째, 종교다원주의는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과 좁은 문을 넓히려는 인간적인 시도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영생에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요 14:6),"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를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Ⅳ.다원화시대의 목회자의 자세
오늘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Post - Modernism)을 타고 들어오는 다원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에까지도 혼합주의와 다원주의가 물밀듯이 들어오고있다. 이러한 싯점에서 과연 목회자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는가?
현대의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신학의 형성이 되기도 전에 인접학문(심리학, 교육학,사회학, 행정학, 경영학 등)에 욕심을 부리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을 자랑한다. 그럴바에야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것이지 왜 목회자는 그 분야에 아무리 조예가 깊다고 해도 그것은 신학 외의 보조학문이며 어디까지나 그 분야의 '아마츄어'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의 다원화시대의 복회자는 그 인접학문의 지혜를 꿰뚫어 목회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잇는 신학적, 성경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학자들 중에는 목회하는 목사를 무식한 박수무당 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목회자들 중에는 신학자를 신문의 가십란이나 읽고 외우고 다니면서 거창하게 떠들고 다니는 얼간이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양쪽은 다 목회 신학자(Pastor- Theologian)가 되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의 소용돌이는 목회와 신학사이에 문제점을 지니고 표류되고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목회와 신학의 장(場)은 교회이다. 그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이 무시되고 사념화되고 있다. 이런데서 파생하는 종교형상주의적 유사주의나 샤마니즘적 기복신앙 일변도의 목회 행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목회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책임은 바로 이런 교회의 현실속에서 진리를 밝히고 기독교의 이단화의 길을 막아주고 세속화를 늘 경계하는 교육을해서 올바른 길을가도록 잡아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교단 신학교의 책임과 기능은 대단히 중요하다. 목회를 무시하고 신학행위는 이미 교회를 잃어버린 신학이된다. 신학이 없는 목회는 머리 없이 가슴만 뛰는 꼴이 되지만, 목회없는 신학은 몸 없는 머리와 같다. 그러면 죽은 것이 아닌가! 이제는 목회와 신학이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안에 들어와서 자기 자리를 지킬때이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가 된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가 된다. 이 종교 다원화 시대에 정말 중요한 작업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의 신학 현실도 목회 현실 못지 않게 신학 아닌 신학이 난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분별한 수입신학의 사조에 얼마나 교회가 오염되고 있는가? 오늘 20세기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을 타고 다원주의(Pluralism)가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다. 그 현상은 영국, 불란서, 남미 그리고 제 3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분야에 있어서도 건축양식, 문학, 예술,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무용 등 문화 전반에 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저변에 흐르는 철학이나 비평양식들은 우리 삶의 방식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절대 이념의 와해, 개성의 중시, 논리의 다원화, 다국적 기업 소수 민족 운동, 여성운동, 소유로부터 탈출 등, 이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성경의 하나님 신앙을 저버리는 배교가 되기 쉽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종교혼합주의(Sy - Mcretism)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 종교다원론 주장자들은 '기독교는 기독교로서, 불교는 불교로서 그 독특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유지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종교혼합주의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권능한 존재가 아니며, 삼손처럼 머리가 깍이지 않는다는 보장도 할 수 없다.
왜 확실한 길을 두고도 희미한 길을 가야 하는가? 왜 밝고 빛나는 길이 있는데도 어둡고 희미하여 분간할 수 없는 길을 갈려고 하는가? 예수께서 그런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가? 목회자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일찍이 예언적인 말씀을 하셨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1).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Ⅴ.결론 및 제언
오늘날 세계 선교적 측면에서 기독교 전파와 교회가 당면한 중대한 문제는 사회정의와 가난과 공해 등 사회 경제적인 차원도 무시할 수 없으나,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종교다원주의 현상은 더욱 더 교회의 본질을 뒤 흔드는 것이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주장하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부인하게 되는 엄청난 파급효과가 마치 폭풍우와도 같이 밀려들어 오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서구 기독교 세계는 비기독교 종교가 기독교 선교로 말미암아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오히려 서구에 비기독교적 종교가 날로 번성하여 그야말로 종교의 다원화 시대로 일방통행적인 선교를 하던 시대는 이미 사라지고 선교의 쌍방 통행 시대가 되고 말았다. 토인비는 세계구원을 위하여 기독교와 동양종교가 혼합된 세계적 종교의 출현을 예견하면서 기독교만이 절대라는 전통적 서구적 신앙을 기독교에서 숙청해야 한다고 하였다. 종교의 절대주의는 정치의 독재만큼 현대인들이 증오하고 있다. 여기에 WCC의 일부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종교신학의 이름으로 타종교의 가치를 인정하다가 종국에는 타종교에 구원을 부여하는 단계로 비약하였다.
성경은 물론 구원의 범위는 세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을 구원하셨고 또 때로는 이스라엘 밖에도 특별한 계시를 주신 일이 있다. 그러나 반면 진리를 거짓으로, 참신을 우상으로 대처하는 이방종교와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아나테마"를 말하셨다. 복음주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성경의 진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종교는 진리를 억누르고 비진리로 대치한데 대해 유감을 표하지만 그러나 타종교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개인적으로 대화를 통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J.C 라일이 말한 것 같이 신자라도 성령의 열매를 보지 못할 때는 역시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말을 명심하면서 신자는 개인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보이며 아울러 제도권의 교회는 항상 자체의 갱신에 힘뜨며 전도와 봉사가 함께 하는 통합적 선교로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참 고 문 헌
1) 유동식, 종교다원주의와 신학적과제 p.54
2) 변선환,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 현대사조 2, 1978, p.88
3) H. kracmer, "Syncretism as Religious and Missionary Problem",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43(July, 1954, p.253
4) 목회와 신학 1991, 8월호 포스트모던한 문화현상과 신앙고백 p.10
5) Hallencreutz C.F., Der Dialog in der Geschichte der kumenishcen Bewegung,
in:Dialog mit anderen Religionen, Frankfurt 1972, S.58.
6) Ernst Troeltsche, "the Place of Christinity among the world religions", John
Hick and Brian Hebbleth waite,ed. Christianity and Other Religions, p.27
7) see Christianity and World Religions,p.172(IVP, 1984)
8) God Has Many Names, p.50
9) The Second Christiantys, p.85-86
10) Mac Millan 1980.
11) 윤동식, 한국종교와 신학적 과제, p.28.
12) 존 힉, 종교철학(서울:종로서적사, 1980),p.206.
목사고시 문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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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Then they remembered his words.
kai; ejmnhvsqhsan tw'n rJhmavtwn aujtou',
(눅24:8)
편 집: 이 현 용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에 미치는 위기 考察과 대응자세
목 차
Ⅰ. 서론 -------------------------------------------- 1
Ⅱ. 본론 -------------------------------------------- 1
A. 종교다원주의 발생 배경 ------------------------ 2
가. 선교사들 -------------------------------- 2
나. 비교종교학자들 -------------------------- 2
다. WCC ------------------------------------- 2
라. 과학의 발전 ----------------------------- 2
B. 종교다원주의의 중심사상 ----------------------- 3
가. 종교의 상대성 --------------------------- 3
나. 신념의 동일성 --------------------------- 3
다. 심리학적 기원 --------------------------- 3
C.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의 기독교의 반응 --------- 4
가. 기독교 ---------------------------------- 4
1) 폐쇄적인 배타주의 ---------------- 4
2) 개방적인 포괄주의 ---------------- 4
① 칼라너 ---------------------- 4
② 폴 틸리히 ------------------- 5
3) 종교적 다원주의 ------------------ 5
① 존 힉 ----------------------- 5
② 파니카 ---------------------- 6
D. 종교다원주의에 내재하는 문제점 ---------------- 6
가. 선교활동 -------------------------------- 6
나. 평등 ------------------------------------ 7
다. 배타주의 -------------------------------- 7
E. 종교다원주의에서의 기독교의 대응책 ------------ 7
가. 기독교적(성서적)인 자세 ----------------- 7
나. 대화의 자세 ----------------------------- 8
다. 선교에서의 자세 ------------------------- 9
Ⅲ. 결론 -------------------------------------------- 10
Ⅰ.서론
현대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시대이다. 아득한 인류의 기원 이래 인간의 의식이 확대되고 그 의식이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각각 그 자신의 궁극적 해답을 제시하는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해왔다. 다양한 종교의 공존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 수세기 동안 종교간의 갈등과 분쟁이 세계사에 긴장을 조성해 왔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종교 자체의 본질과 종교들간의 상호작용,나아가 현재 팽배해지고 있는 다원주의적 경향속에서 종교의 역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기독교만이 참종교요 절대 종교라고 믿는 기독교 절대주의 (Christion absolutism)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는 기독교의 자기 이해를 위한 주제가 된 동시에, 다원주의는 기독교인에게 큰 도전과 위협이 되었다. 기독교처럼 자신을 절대적으로 유일한 종교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인류는 어느 특정종교 하나가 제시하는 신념체제에 의하여 구원 받을 수 없도록 다원화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론을 주장함으로써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기존의 논리들이 혼란하게된 다원주의 시대속에서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과 다종교 시대속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종교다원주의의 발생 배경과 주요사상,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반응,내제하는 문제점등을 살펴봄으로서 고찰(考察)해 보기로 한다.
Ⅱ. 본론
A.종교다원주의의 발생 배경
아담과 하와 이후 부터 지금까지, 종교다원화의 문제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 왔다. 구약 시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신들의 관계 문제,교부시대의 기독교와 고전문화의 관계문제,그리고 현대의 종교 혼합주의로 인식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가 그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기독교는 절대주의의 입장을 고수해왔다.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에 의하면 종교적 다원주의 문제는 교회가 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선교사들과 비교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최근 한국에서 퍼져가는 종교신학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다원주의와 때를 같이한 신학이다. 이 WCC의 종교다원주의를 또한 종교다원주의의 발생점으로 본다.
한편,과학의 발전도 들수 있겠다.
가. 선교사들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공인받게 되며 데오도시오스 황제 치하(379-395)에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 로마 제국과 기독교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로마 제국은 기독교 왕국이 되었고 제국의 안정은 교회의 안정과 직결되었다. 이에 따른 18,19세기의 기독교 선교정책은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이었다. 서구의 종교가 동양의 나라를 점령하면,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기독교로 그 지역의 종교를 점령하는 정책이었다.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선교의 목적이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확산에 도움을 주지만,정복식의 선교정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54년 인도 정부는 개종을 주 목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철수하도록 명령했으며,그 후 선교사들은 각지에서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선교상황이 이론과 실제 양면 모두에서 위기에 처하게 되자,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일부 선교사들에 의해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그와 대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비교종교학자들
비교종교학이 발전함에 따라 비교학자와 종교사 연구가들을 통해 다른 종교가 기독교와 동일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종교사학파의 대표자 트뢸치(Ernest Troeltsch,1865-1923)가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했으며,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 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 할 수 없다. 이렇듯,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교다원주의가 일어났다고 볼수 있다.
다. WCC
WCC안의 다원주의적 동향은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한 제2차 세계선교 협의회(IMC)에서 이미 폴(K.T.Paul)과 차오(T.C.Chao)에 의하여 나타났다.
그리고,종교다원주의적 관심은 1938년 탐바람에서 개최한 제3차 IMC대회에서 크래머(H.Kraemer)와 충돌을 격은 후 잠잠해 졌다가,1950년에 타종교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61년에는 뉴델리에서 개최한 제3차 WCC총회에서 종교다원주의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총회에서 인도신학자 더바너난단(P.Devanandan)은 피조물의 영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 타종교들의 다양한 종교체험을 혼돈함으로써 쟝교뎌?隙瑛퓔? 수립하려고 했다.
라. 과학의 발전
과학의 발전도 종교적 다원주의의 발생을 촉진했다고 볼수 있다. 16세기 이후 유럽에 발견과 탐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콜롬부스,마젤란등의 탐험으로 기독교 세계밖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거기에 기독교와 서로 다른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역사,인류학,과학 연구가들이 인류 기록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세계의 다른 곳에도 종교의 유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되자,동서의 활발한 교류를 통한 서구의 기독인들이 다른 종교권의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헌에 긴급하게 일어났다.
B. 종교다원주의의 중심사상
가.종교의 상대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사상이다.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상대성을 띈다는 것은 기독교와 큰 차이점이 될수 있다.
트뢸치는 "역사주의에 의한[순전한 상대주의 ]역사주의의 극복"에다 초점을맞추었다. 뢸취의 역사주위에는 세계에 내재할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 초월적이기도 한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즉 하나님의 실재를 배제한다. 그리고,그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실질적인 근거를 오직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경험적 혹은 "과학적" 관찰에서만 온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은 과학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순전한 상대주의의 심각한 가능성과 싸워야 했다. 그의 "역사의 형이사학"에도 불구하고,그의 최후의 말은 "상대성 속에 있는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트뢸취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순전한 상대주의에서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트뢸취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모든 종교에 주어졌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를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유일회적인 성육신이요 전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와 모순된다.
나. 신념의 동일성
세계 60억 인구중에서 15억만이 예수를 믿고있다. "나머지 45억은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들이 생기게 된다. 이런 물음들 속에서 모든 종교는 같다고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만약,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 다면 시간과 공간,문화와 상황을 넘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며,깊이 관찰해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고 단지 모든 문화와 상황 배후에는 하나의 신,즉 공동의 본질이 있고,이것에 도달하는 방법이 각 종교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종교가 공동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계시의 유일회성과 규범성의 궁극성에 대한 신앙을 부정한 것이 되버린다.
다. 심리학적 기원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이 무의식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초조의 심리학적 사건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같은 학자들이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려는 현대 심리학자들의 시도로서 모든 종교를 각 개인에게 공동으로 존재하는 심리학적 과정으로 본다. 이러한 융의 주장은 종교를 지나치게 주관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예수의 유일회성을 부정한 것이 된다.
C.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의 반응
가. 기독교
기독교는 배타적인 선교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혹스러한 문제였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의 주장은 예수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근거해 왔다. 그것은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조에 의하여 교회는 스스로 모든 진리에 있어서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는 고립된 생활을 자랑스럽게 영위하고 외부 세계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고수하면서 다른 종교와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 23세가 "쇄신과 적응(aggio-
rnamento)"이라는 슬로건을 공포한 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변화를 겪게되었다. 다른 종교 전통들과 대화를 시작했고,'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이 포기되었다. 그리고 다른 종교의 정신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타종교와의 만남에 대한 반응은 세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1)폐쇄적인 배타주의
바르트는 모든 종교를 은총에 의한 계시의 경험과 변증법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반격을 가하고 기독교를 신의 은총과 계시가 나타나는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2)개방적인 포괄주의
다른 종교를 통한 신의 은총과 구원의 행위를 인정하고,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구원 계시의 최종성,독특성,규범성을 주장한다.
① 칼 라너(Karl Rahner)
칼 라너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긍정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다. 라너는 다음의 네가지 명제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한다.
첫째,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절대적인 종교로서 자신을 이해하며,그러므로 어떤 다른 종교도 그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
둘째,복음이 한 개인의 역사적 상황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비기독교적인 종교는 그 개인을 위해서 하느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과 은총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셋째,그러므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성원을 단순히 비기독교인으로서 대할 것이 아니라,익명의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넷째,교회는 스스로를 구원에 대한 권리를 가진 배타적인 공동체로서가 아니라,오히려 역사적인 선구자,다른 종교에 숨어 있는 실재로서 나타나 있는 기독교적 희망의 명백한 표현으로 여겨야 한다.
이러한 4가지 명제를 통하여 라너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은 은총과 그것에 대한 명백하고 완전한 기준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동시에 수용한다. 결 라너의 입장은 타종교가 그리스도의 참된 보편적인 교회로 수렴되고 성취된다는 교회 중심주의적 입장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타 신앙인에 대한 보다 '낙관적인' 그리스도교적 태도를 밝히고,타신앙도'익명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를 깨트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 세계의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려한 것일까 하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② 폴 틸리히(Paul Tillich)
폴 틸리히는 유한적인 현현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확증하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계시 경험은 인간에게 보편적이고,모든 종교에는 계시와 구원 능력이 있다. 계시는 유한한 인간에 의해 수용되기 때문에 항상 왜곡되며,따라서 신비적,예언자적,세속적인 종교비판이 가능해진다. 틸 히는 다른 종교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타종교들로부터의 비판을 수용하는 개방된 그리스도교의 태도를 예로 제시한다.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를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려는 대신 자기 비판과 대화를 모색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궁극적 실재를 지향하는 역사상의 모든 종교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신학적 다원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는 열등한 다른 종교들을 배재하거나 포괄하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최종적인 계시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중심으로 타종교를 관계를 맺는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관계적 절대성(relational absoluteness)'이 입증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3) 종교적 다원주의
① 존 힉(John Hick)
힉은 다른 종교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오늘날 서구 신학에서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접근과 상이한 신 중심적 모델을 제안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독실한 이슬람교인이나 힌두교인,혹은 유태교인들을 "익명의 기독교인(an anonymous Christion)"으로 간주하는 칼라너와 같은 신학자도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위치시킨 해묵은 교회안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단지 기독교인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그래서 우리는 경건하고 독실한 비기독교인들을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의 기독교이거나,혹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힉은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유로 들어 그의 입장을 전개시켰다. 프롤레마이로스의 천동설에서는 지구를 다른 혹성들이 그 둘레를 공전하는 태양계의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에,프롤레마이오스 시대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종교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의 주위를 맴 도는 것으로 여겨지며,기독교와의 원근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기도 한다. 힉은 그러한 프롤레마이스적인 접근이 다른 종교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힉은 그리스도교 종교신학의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인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힉 신학은 칸트적 배경위에 있다. 하느님은 인간 경험에 의해 구조화된 선험적인(a priori) 관념이다. 그러나 잠재된 문제는 힉이 "신"이란 용어를 불교인이나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anta,불이일원론)의 힌두교인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선험적인 것으로 사용한다는 데 있다.
② 파니카(R.Panikkar)
파니카는 기독교와 힌두교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대화의 삶을 살아왔다. 로마 카톨릭 내에서,파니카의 저술은 종교간의 관계를 다루는 영역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종교들 사이의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범 세계적'일치운동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종교적 차이는 생동적인 힘을 발휘하며,'근본적인 종교적 사실'에 대한 각각의 해석과 각각의 이름들은 '순수하게 초월적'인 것만도,순수하게 내재적인 것만도 아닌 그 신비를 풍요하게 규정한다.
파니카에 있어서 삼위일체는 모든 종교의 진정한 영역 차원이 기독교적 사상안에서 함께 만나는 접합점이다.
D.종교다원주의에 내재하는 문제점
가.선교 활동
어려움이 분명히 드러나는 곳은,자가 자신의기준을 타자에게 부과하는 문제가 타자를 개종시키려는 노력으로 지속되면서 바생하는 선교 활동에서이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확신을 타자와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어려움은 자신의 설교나 가르침을 타자에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과 방향성이 투쟁적이거나 배타적으로 될때,그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다. 다원주의는,우리 자신의 특수한 종교 이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점을 늘 요구해 올것이다.
이러한 다원주의에서는 모든 종교는 표현 방법과 규정내용 및 의식이 다를 뿐이지 결국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또는 다른 명칭의 조물조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주장으로서,어떤 종교든지 열심히 그리고 종교가 요구하는 율법과 교리를 성실하게 준행하기만 하면,구원을 받게 된다는 식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한편 또다른 주장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데,다른 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숨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문화권에서 믿고 있는 종교를 성실하게 믿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반드시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고,불교도나 회교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나. 평등
현대의 종교다원주의에 있는 또 다른 어려움은 "평등"에 대한 헌법상의 진술(미국과 인도의 헌법속에서 발견되는)과,개인의 이해에 있어 각 개인들을 영적인 깨달음의 다양한 단계들에 걸쳐 있는,따라서 평등하지 않은 존재로서 이해하고 있는 종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다. 그러한 갈등이 생길때,평등과 요청은 힌두교와 같은 종교의 교훈과 관행들을 합법적으로 짓밟고,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평등의 문제는 현대의 문화와 종교의 다원주의에 의해 야기된 많은 문제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종교적인 전통및 인식과 세속적인 전통및 인식이 서로 충돌하게 될 것이다.
다. 배타주의
종교다원주의의 창조적 기여에 대한 한 가지 위협은 때때로 몇몇 종교인들이 다원주의의 도전에 투쟁적인 배타주의로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대응은 현대 이란이 역사가 증명해 주듯이,보통 영적인 침체와 "종교적 폭력"을 야기시킨다는 점에서 항상 유감스러운 것이다. 가정에서처럼 상호 존중과 상호 인정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차이의 수용은 선을 위한 강력한 촉매가 될 수 있다. 자기 중심적인 편협한 마음은 항상 파괴적이며,어떤 종교 전통에서는 진정한 종교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E.종교다원주의에서의 기독교의 대응책
가. 기독교적(성서적)인 자세
한스 큉(Hana Kung)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기독교 민족이 서구의 기독교 민족을 수적으로 훨씬 앞질러 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통계를 생각할때도 당신들은 여전히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고 감신대의 변선환 교수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면 인류의 대다수는 신의 저주를 받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함으로,기독인만 구원받는다는 기독교 전통적인 견해를 그대로 받이들일 수 없다는 큉의 주장은 너무나도 자명하다"고 했다. 또 홍정수 교수는 "우리의 신은 제 자식만 사랑하는 편협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인가? 아니면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고 자비를 베푸는 가없는 은총의 신인가? ... 하나님께서 만일 무신론자나 이교도까지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한다."라고 말을했다.
이와같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인도적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에 접근하여 합리적으로 구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진리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우선,"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의 질문에 대답할 줄 알아야 한다. 존 힉(John Hick)은 "예수를 성육하신 성자 하나님이셨다."는 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한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진술인가? 그 의미는 문자적인가,비유적인가,상징적인가,신화적인가,아니면 시작인가? 그리고 그는 예수가 사람이자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원이 사각형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런 질문과 주장들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성자 하나님이 신적인 특성을 가지고 계시며,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특성을 지니게 되셨고,그 양자가 그분의 신적인 인격의 통일성 속에서 '유지되고'결합되었다.그러므로 그분은 한 인격으로서 참 하나님이시며,참 사람이시다. 또한,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1:21)라고 말씀하셨다.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를 전개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영역 밖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분명히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종교다원주의 자들의 또 다른 주장인 본질은 하나이고 이름만 다른 하나님이란 주장에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출20:#i 너희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찌니라"(출23:24),"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시96:5),"너희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외에 다른 신이 없는니라"(사44:6)
하나님께서 만약 타종교와 같은 신,이름만 다르지 동일한 신이라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겠는가? 다른 한편 구원에 대한 문제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몇 교수들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여 큰 혼란을 야기 시켰는데 성경은 여기에 이렇게 답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4:12),"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1:8)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하며,이렇듯이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를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들을 보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2:8)라고 말씀하신다.
나. 대화의 자세
한스 큉은 [세계 도덕성의 과제]라는 책을 선보이면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도덕이 없는 생존은 없다. 종교 평화가 없는 세계평화는 없다. 종교대화가 없는 세계평화는 없다." 결국 추구되어야 할 세계도덕은 서로 다른 종교들간의 대화로 부터 비로서 정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종교진리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리광신주의자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 진리이고 다른 모든 종교는 거짓 종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종교적 평화는 하나의 참된 종교에 의하여 달성되고 보장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종교적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배타주의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종교가 기독교에 의해서 "완성"혹은 "보다 성숙"되어질 수 있다면,기독교도 타종교에 의해서 "보다 더"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대화를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적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면,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대화하여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으로서,자기 신앙을 감추고서 대화에 임하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대화에 이르는 길에서 신의 보편성과 종교의 특정 진리에 대한 절대적 헌신을 향한 인간적 욕구가 모두 강조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서로 다른 빛을,그것을 필요로 하는 영혼의 서로 다른 세계에 비추어줄 수 있는가?" 라 타고르가 제기한 물음이 함축하고 있듯이 서로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대화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인들은 보다 나은 기독교인으로 영적인 깊이를 더해야 되겠고 사랑과 봉사의 헌신적 삶을 통하여 보다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것이다.
다. 선교에서의 자세
이러한 다원주의 상황에서 선교관은 성경적인 선교관과 판이하게 달라진다. 다원주의적 선교의 목적은 인간화이며 세계평화 공동체의 형성이므로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부터의 회개는 요청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개종을 목적으로 선교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복음전도와 하나님께로의 회심이 아니라,오히려 탈기독교적 탈고백적,탈사도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선교에서 우리는 먼저 상황인식을 먼저 해야된다. 복음은 어느 선교지에서든지 현지문화와 충돌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려면 선교현지의 문화를 보면(물론 문화 자체를 놓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지만) 기독교 문화 보다 열등하다. 그 문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그 문화속에서,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진리인 복음의 메시지가 단지 표현 방법이 다른 즉,다양한 "포장"을 하고 전달될때 선교지의 상황은 쉽게 파악될 것이다.
둘째,복음의 순수성을 재인식해야 한다. 복음의 순수성은 먼저 성경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그 내용의 정확성과 무오성을 믿으며 크리스챤의 신앙과 삶에 있어 최선의 기준과 척도가 된다는 것을 믿어야하다. 그래서 복음은 어떤 문화나 상황에서도 수정되거나 부인할 수 없는 메시지이며,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영적인 원리이다.
Ⅲ. 결론
현대의 다종교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간의 갈등이 있어서는 않되고,종교 사이의 평화야말로 세계평화를 위해 긴요한 조건임에도 종교간의 갈등이 전쟁과 다툼을 유발시키는 어두운 현실임을 보아왔다.
종교는 개인은 말할것도 없이 집단과 사회 더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평안과 화목,행복등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임을 안다. 그래서 이런 다종교 사회에서 갈등과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대화를 통해서 극복해야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타종교를 이해하고,또한 타종교에게 우리의 종교를 이해시켜야 한다.
다종교들 사이에서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는데,타종교들이 말하는 신(god)은 우리 기독교의 신(God)과 비교될 수 없을 뿐더러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도 안될 것이다. 그리고,우리 기독교의 독특성과 당연한 진리들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물론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면서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취급하여 갈등을 일으켜서도 않된다. 그러므로 선교적 차원에서도 타문화를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속에 살며 그 문화속에서 서서히 문화와의 충돌없이 전해야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다.
또,기독교의 구원은 타종교들의 구원의 개념과 다름을 알고있다. 원죄로 인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죄의 굴레속에서 해방되어,영생을 누리며 하나님과 접촉하는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이며,"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는 주장을 너그럽게 보아줄 수 가 없는 것이다. 이 많은 논쟁들 속에 성경은 답을 주신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요14:6),"다른 이로써는"(행4:12) 아버지께 갈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 다종교 상황속에서 기독교는 흔들리지 말고 진리를 보존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넓게 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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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거 찬."종교간 대화를 지향한 종교사 신학의 연구".미간행 박사학위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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