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5.16 혁명과 10월 유신은 구국의 혁명이요 이 나라 민주주의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는 게 바로 많은 애국자와 애국 단체들의 주장이다.
이른 바 '개발 독재'는 국가와 국민의 생존을 위한 정당한 것이었으며 경제국방을 통한 생존은 민주주의보다 상위의 개념이며 6,70년대에 이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경제국방이 튼튼해야 비로소 민주주의라는 걸 할 수 있는 것이니 6,70년대에 경제국방을 우선하여 일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박정희가 단행한 10월 유신은 구국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6,70년대 당시 박정희의 경제개발 방식에는 국민 모두가 찬성한 게 아니며 심지어는 박정희 정부의 인사들조차 반신반의한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 그러한 상태에서 만약 1972년에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단행하지 않고 1975년에 허울 뿐인 <민주 선거>로 대통령을 다시 뽑았다면 정책의 일관성이 사라져 1974-1979년 기간 동안 이루어진 중화학공업과 국방산업의 비약적인 창조와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오늘의 한국 경제도 없을 것이다.
당시 유력한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화학공업 건설에 철저하게 반대하던 자들이었으니 박정희와 같은 과학적, 실질적, 돌파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은 야당 인사들 중에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즉, 6,70년대에 모든 걸 '민의'라는 것에 맡겨 두었다면, 모든 걸 허울 뿐인 <민주 선거>라는 것에 맡겨 두었다면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은 없었을 것이고 아직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수준의 경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며 그런 상태라면 이미 북괴에 적화통일 된지 오래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건 일반 대중들의 교육 수준이 높고 똑똑해야 그 빛을 발하는 것인데 과연 6,70년대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런 수준에 있었는가 솔직하게 말해 보라.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이 국제정세나 선진 과학정보 등에 대해서 무지했고 식견도 없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 상태에서 유일한 엘리트 집단이 바로 5.16 혁명을 일으킨 군부였고 그 지도자가 바로 박정희였던 것이다. 그 군부의 에너지와 추진력으로 6,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한 게 바로 한국이었던 것이다.
어떤 집단이든지 시대 상황에 따라 그 집단 구성원들의 평균적인 식견이 떨어지면 엘리트 그룹이 나서서 <독재>를 해서라도 이끌어 가는 게 발전을 위해 좋은 것이지 무작정 민주주의 해야 한다면서 아무런 식견도 없는 무식쟁이도 한 표, 중화학공업을 적극 반대했던 김대중도 한 표, 박정희도 한 표, 이런 식으로 나가면 그 건 다 같이 망하자는 것밖에 안된다. 그런 민주주의 백 번 하면 백 번 다 망한다.
6,70년대는 박정희의 <독재>가 반드시 필요한 시기였고 그 <독재>는 세계가 놀랄만한 경제발전과 국방을 이룩했으며 경이롭게도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바탕까지 마련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는 박정희의 <독재>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할 의무가 있으니 '독재'라 하지 말고 <영도>라고 불러야 올바르고 양심적인 것이다. 박정희는 6,70년대의 위대한 영도자였으며 민족의 은인인 것이다.
■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7,80년대의 이른 바 민주화 운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는가? 반역이라고 평가해야 마땅한 것이다. 7,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당시 국가와 국민이 처한 현실을 무시하고 일부 대통령 병에 걸린 자들과 그에 야합, 선동된 자들이 그들의 사리사욕만을 위해 영도자 박정희의 국가발전사업을 방해한 반역 행위였던 것이다. 7,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건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