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이르기를, “차라리 진짜 사대부가 될지언정 가짜 도학자(道學者)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실천하지 않는 것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 내게 오랜 친구가 있었으니, 홍 도정(洪都正)이다. 휘는 중인(重寅), 자는 양경(亮卿)인데, 이 사람이 이 말에 가까울 것이다. 공은 고(故) 판서 정익공(貞翼公)의 셋째 아들이다. 공은 수려한 외모에 수염이 아름답고 이행(履行)이 구차하지 않았으니, 성실하고 순후한 장자(長者)였다. 외람되게도 나와 교유를 맺어 자주 예(禮)를 논하였는데 편지가 상자 속에 남아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이 나게 한다. 임신년(1752, 영조28) 11월 20일에 별세하여 천안군(天安郡) 화령(花嶺) 갑좌(甲坐)의 산에 장사 지냈다. 사손 기한(箕漢)이 연제(練祭)를 마친 뒤에 내 집에 찾아와 묘갈명을 부탁하였는데, 이는 본래 내 뜻이기도 하다. 그 가장을 살펴보건대, 공은 숙묘(肅廟) 정사년(1677, 숙종3) 겨울 11월 17일에 태어났다. 계사년(1713, 숙종39)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신축년(1721, 경종1)에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에 도감(都監)의 낭관에 차임되어 품계가 6품으로 올랐으며, 부친상을 당하였다. 무신년(1728)에 상기를 마친 뒤에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에 제수되었고, 공조와 금부의 낭관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진안 현감(鎭安縣監)이 되었다. 어떤 무당이 방자할 목적으로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남의 집에 몰래 묻어 두고 일부러 일이 드러나게 하여 그 부자(父子)를 해치려고 하였다. 공이 속임수임을 간파하고 신속히 무당의 집을 수색하여 간교를 부린 자취를 포착하고는 곤장을 쳐서 무당을 죽이니, 온 마을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흉년이 들자 진휼을 제대로 하여 백성들이 그 덕에 온전히 살아날 수 있었다. 10차례의 고과(考課)에서 모두 상등(上等)을 맞았다. 떠나간 뒤에 백성들이 청동으로 비석을 만들어 그 은택을 새겼다. 이에 치적이 크게 드러나 마침내 종부시에서 형조의 낭관으로 옮겼다. 관장(官長)의 종〔奴〕이 낭료(郞僚)에게 욕을 하였는데, 낭료가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다.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낭료가 비록 지위가 낮으나 사대부이기는 매한가지이니, 무례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에 관장이 또 몹시 화를 내며 힐책하였는데, 공이 인사도 하지 않고 편복(便服) 차림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파면되니, 부중(府中)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말하기를, “세상에 벼슬자리를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다.” 하였다. 또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되었다가 외직인 안산 군수(安山郡守)로 나가게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선혜청의 낭관으로 차임되어 상평창(常平倉)을 겸관(兼管)하게 되었다. 윤대관(輪對官)으로 입시하였을 때, 상이 상평(常平)의 뜻에 대해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경수창(耿壽昌)이 상평창을 창설한 본의는 곡가(穀價)의 고헐(高歇)을 살펴, 봄에 곡식을 내다 팔고 가을에 곡식을 사들여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명칭은 옛날의 실제와 다릅니다.” 하니, 상이 시신(侍臣)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옛날의 순리(循吏)이다.” 하였다. 원성 현감(原城縣監)에 제수되었다. 원성은 현으로 강호(降號)되었으니 기실은 주(州)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공을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승진시켰다. 공이 원주에 있을 때에 폐막(弊瘼)을 바로잡은 것이 많았다. 어떤 무관(武官)이 권귀(權貴)에게 총애를 받아 대단한 기세를 부리며 백성들을 해쳤다. 고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송사를 벌이자, 공은 그 무관을 법대로 다스렸다. 감사는 가볍게 처벌하려고 하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노하여 위에 아뢰고서 파출(罷黜)하니, 공은 그날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원주 백성들이 또한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신유년(1741, 영조17)에 또 한산 군수(韓山郡守)가 되었다. 한산군은 서천(舒川)과 경계를 접한 고을로, 두 고을 백성이 물〔水〕을 다투었다. 세력에 의지해서 조관(朝官)으로 승진한 자가 있었는데, 서천군을 편들어 권위로써 결정을 내리니, 한산의 백성이 두려워하였다. 이에 공이 직접 살펴보고 도랑을 터서 물길을 원래대로 돌리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작은 일에 연루되어 파면되어 돌아와 천안군에 자리 잡고 살았다. 손님이 앉는 자리에 글귀를 써 놓기를, “조정의 득실과 관장의 시비와 향리의 훼예(毁譽)를 말하지 말라.” 하였다. 병인년(1746)에 윤자(胤子)가 시종(侍從)이 된 것으로 인해 추은(推恩)으로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오르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옮겼다. 이상이 공이 벼슬한 시말이다. 공의 두 형이 일찍 돌아가고 정익공(貞翼公)은 여든을 넘긴 나이였는데, 공은 좌우에서 시봉(侍奉)할 때에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니, 방문 밖에서 자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두 형의 병세가 심해졌을 때에 식사할 때면 반드시 수저를 들어 먼저 맛을 보았다. 율신(律身)은 엄격하면서도 간이(簡易)하였다. 사람들의 어렵고 딱한 사정을 보면 후하게 베풀고 보답은 별로 바라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기술할 만한 것들이다. 만년에 서사(書史)를 좋아하여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였으니, 찬집(纂輯)한 글이 매우 많다. 일찍이 이르기를, “붕당이 생긴 뒤에 기록들이 한쪽으로 편향되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그것들을 취사하였으니, 《아주록(鵝州錄)》 30권이 있다. 이기(理氣)에 관한 설은 유자(儒者)들이 서로 다투어 논의가 하나로 귀착되지 않았다. 이에 〈이기설(理氣說)〉 1권을 쓰는 데에 자못 공력을 들였는데, 병세가 심해졌을 때에도 한두 구절을 고쳤다. 또 《동방시화(東方詩話)》 7권이 있다. 손자들에게 유훈(遺訓)을 남기기를, “선비가 부지런히 힘써야 할 것은 오직 밭 갈고 글을 배우는 것이다. 밭을 김매지 않으면 곡식이 자라지 못하고 부지런히 글을 배우지 않으면 학업이 성취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배움이 없으면 그 해(害)가 다음 세대에 미친다. 그래서 내가 ‘경(耕)’으로써 당호(堂號)를 정하였다. 그러나 밭만 갈고 글을 배우지 않는다면 농부일 뿐이니, 반드시 먼저 글을 배워야 한다.” 하였다. 연로한 때에도 정력이 쇠하지 않아 후생들을 권면하고 인도하니, 사론(士論)이 더욱 귀부(歸附)하여 ‘영광(靈光)’이라고 일컬었다. 병환이 심해졌을 때에 의원이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도 공은 말하기를, “그리할 것 없다.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는 편안히 숨을 거두었으니, 군자의 죽음이다.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그 시조가 고려조의 학사(學士) 지경(之慶)이니, 근고(近故) 때의 대사헌 모당(慕堂) 선생 이상(履祥)은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부사(府使)를 지낸 탁()이고, 조부는 현감을 지낸 주천(柱天)이고, 부친은 정익공 만조(萬朝)이니, 모두 대관(大官)에 추증되었다. 모친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증(贈) 참의 진(瑱)의 따님이다. 전배(前配)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참판 봉귀(奉龜)의 따님으로, 천안의 선영에 부장(祔葬)하였다. 후배(後配)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사인(士人) 훤익(烜翼)의 따님인데 자식이 없다. 윤자(胤子) 정보(正輔)는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正言)을 지냈는데 일찍 죽었다.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기한(箕漢), 소한(昭漢), 약한(若漢), 첨한(瞻漢), 여한(如漢)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벼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 人不貴仕 그렇다고 꼭 지위가 없으란 법은 없다네 / 卻未必無位 덕망이 이름과 꼭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 德不與名期 덕이 있으면 명예는 절로 이르기 마련이라네 / 而譽自至 장수하고 복을 누렸으니 / 壽考維祉 선하고 화락한 군자였네 / 其善也樂只
[주D-001]옛말에 …… 하였으니 : 명대(明代)의 학자 소보(邵寶, 1460~1527)의 말로, 명대의 기전체 사서인 사계좌(査繼佐)의 《죄유록(罪惟錄)》 열전(列傳) 권10에 보인다. 소보는 자는 국현(國賢), 호는 천재(泉齋), 별호는 이천(二泉)으로, 무석(無錫) 사람이다. 벼슬은 남예부상서(南禮部尙書)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저술은 《용춘당집(容春堂集)》, 《간단록(簡端錄)》, 《대유주의(大儒奏議)》, 《학사(學史)》 등이 있다. [주D-002]고(故) 판서 정익공(貞翼公) : 홍만조(洪萬朝, 1645~1725)이다. 《국역 성호전집》 제61권 〈판돈녕부사 정익 홍공 묘갈명(判敦寧府事貞翼洪公墓碣銘)〉 참조. [주D-003]경수창(耿壽昌) : 생몰년은 미상이다. 한 선제(漢宣帝) 때 대사농 중승(大司農中丞)으로 있으면서 선제에게 아뢰고 상평창(常平倉)을 시행하였는데, 변군(邊郡)에 모두 창고를 만들어 곡가가 쌀 때는 고가로 사들여서 농사에 이롭게 하고, 곡가가 비쌀 때는 저가로 팔도록 하였다. 이 일로 관내후(關內侯)로 승진하였다. 《漢書 卷23上 食貨志》 [주D-004]영광(靈光) : 겨우 생존하고 있는 노성한 석덕(碩德)을 뜻한다. 영광은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인 공왕(恭王)이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 건립한 영광전(靈光殿)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사람 왕연수(王延壽)가 지은 〈노영광전부서(魯靈光殿賦序)〉에 “서경의 미앙과 건장 등 궁전이 모두 파괴되어 허물어졌는데도, 영광전만은 우뚝 홀로 서 있었다.〔西京未央建章之殿皆見隳壞而靈光巋然獨存〕”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첫댓글 도정공의 집필 책자 위대함을 세상이 알 때가 된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