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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가장 큰 숙제, 풀고 가세!
인봉 조남선
인간이 해결하고자 하는 가장 큰 문제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문제 해결이다. 도대체 나고 죽음은 무엇이며, 늙고 병들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코자 목숨을 걸고 싸운 성자(聖者)도 얼마나 많던가? 또한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할 일과 목표는 미혹하여 어리석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구원하여 편안하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본성(本性) 자리에서 보면 같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환경과 습(習)에 따라 타고난 기질과 바탕을 이루고 있는 성품이 달라질 수 있다. 더구나 사람들은 임의로 각기 바라는 어떤 표준과 목표를 만들어 놓고 욕심을 내어 거기에 이르고자 기를 쓴다. 엄밀히 말하면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그 표준도 목표도 수시로 변하여 실체가 없는 것이로되 스스로 목표라는 장벽을 만들어 놓고, 이루면 성공이요 아니면 실패로 간주하면서 채찍질하고 발버둥을 친다. 무엇이 이토록 괴로움을 주는 것인가?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쌓아놓은 불안, 초조함과 욕망 등으로 자신은 물론 옆 사람에게까지도 강제하므로 피해와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중요하지만 여기 주인공으로 소개되는 성희철 시인은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며 자립하기까지 두렵고 험난한 길을 오직 강인한 정신력과 장애인으로서의 ‘인식 전환’으로 꿋꿋하게 살아옴은 물론, 자신보다도 더욱 힘들어하는 장애우들을 향해 ‘장애인식 개선’이라는 사자후(獅子吼) 같은 명강의를 하므로, 삶의 희망을 찾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위대한 일을 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두 번째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내일 아침에 또 만나』라는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장애, 비장애를 넘어서 세상 모든 이들에게 마땅히 「삶의 지침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갖가지 실수와 시행착오를 빈번히 반복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실이다.
매우 조심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장애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천적으로 출생 시부터 지체 부자유자로 태어날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질병이나 불의에 사고로 인한 장애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에 사대육신(四大六身)이 정상이어도 정신과적인 장애로 소통이 단절(斷絶)되는 경우 등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장애의 이유나 원인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단지 어떤 상황에서일지라도 당사자와 가족 그리고 보호자의 경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각기 살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 간에 마음의 무게가 같을 때 공동사회의 행복 지수는 향상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思考)의 전환이 필요하다.
성희철 시인은 “감기”라는 시에서 어머니의 한 말씀으로 감기에 걸린 자신을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원죄’까지 언급을 했다. 물론 “자립 이전 감기 걸렸을 때 모습”이라고 주석(主釋)을 달아놓기도 했다.
평자는 ‘자립 이전’이라는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화자인 시인에게는 분명 자립 이전과 자립 이후가 확연히 다를 것, 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삶)을 달관하기 전의 평범한 모습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이란 시에서도 자립하기 전의 생각과 행동을 진솔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괴로움(고통)이란 거의 다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 “~/하늘은 그 사람이 견딜만한 고통을 준다/~”라는 것에 대하여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시인도 체념과 푸념 그리고 감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쉽게 말하면 자립이란 ‘홀로서기’라는 말이지만 시인의 홀로서기는 오랜 세월 동안 피나는 노력과 고통 그리고 사유(思惟) 끝에 일궈낸 결과이다. 얼마나 장하고 고귀하며 감사한 일인가!
“공공부조”라는 시는 진정한 복지로 가는 계몽이며 계도의 시이다. 홀로 독립이 어려운 지체 부자유 인이라 하더라도 국가의 선진화 공공복지 정책이 확대되어 가고 있음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귀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부족하다며 투쟁을 일삼는 자들에게도 오히려 일침을 가하고 있다.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흔치가 않다. 위대한 일일수록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고통을 겪으며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단맛을 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시인의 제2 시집, 「내일 아침에 또 만나」는 시인의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고 체험하는 모든 일 들이 시상(詩想)과 시제(詩題)로 이어져 독자들에게 호소력과 친근감 그리고 감동을 주면서도 누구에게나 지루한 일상을 깨우쳐 주어 거부감 없이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신선한 삶의 지침서와 같은 시집으로서 읽고 또 읽어도 음미해볼 여운을 남기는 마성(麻性)의 작품들이다.
시인의 “기다림”이란 시에서는 평범한 시어들로 구성된 문장으로, 자립을 위한 물건들을 챙기는 화자 자신의 차분하고도 진지한 모습을 그렸다. 어렵지 않으면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시(詩)라고 하는 문학 장르에서 보면 서정적 자유시의 궤도를 달리하고 있지 않다.
사람은 어떨 때가 가장 편안할까? 글쎄!
자신을 알 때다. 자신을 확연히 알고 긍정할 때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때이다. 소위 마음의 평정(平靜)을 이루고 있을 때이다. 물론 대우주의 참 진리를 깨달아 대 자유인이 된 성인 반열에서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깨달음”이란 시에서 행운이란 시어와 행복이란 시어가 등장한다. 행운은 막연한 기다림이지만 행복은 곧장 느껴지는 현실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우린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하지, 행운을 추구한다는 식의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행복을 추구함에는 공부(수행)가 필수이지만, 행운은 요행수이므로 수고가 따르지 않는다. 또한 시제로 쓰인 ‘깨달음’이란 제목은 매우 일반적인 ‘알음알이’ 수준의 정도를 의미할 뿐 깊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 끝줄에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시구는 고뇌와 사유에서 터득한 결과로 생각한다.
“꼼장어”란 시에서는 부득이 살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시인의 심경을 토로했는데, 화자 일행의 식사 요리를 위해 몸을 바친 꼼장어에게 “다음 생(來世)에는 나를 위해 너의 몸을 버린 공덕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다시 오렴”이라고 하며 다음 생에 태어나기를 축원해 주는 자비로움은 신앙적으로 생명 존중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종교 철학 방면에 조예가 깊다.
“나이”라는 시에서는 ‘무상(無常)’의 참다운 이치를 평범한 일상에서 새삼 깨닫는다. ‘가요무대’를 보고 계신 부모님과 케이블 방송에 나오는 ‘맥가이버’를 생소해하는 조카들 사이에서 스치듯 세월의 무게, 세월의 무상을 느끼며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하는 진지함은 시인의 인생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시인의 일상은 매사가 자신의 거울이 된다. 시행착오와 실수를 거듭하면 할수록 긍정의 마인드로 전환하여 집요하게도 새로운 도전을 하므로, 마침내 뜻하는 결과를 성취해내는 끈기와 지혜로움이 있다. 시인으로서 작가 활동은 물론이고 실패를 거듭했던 사랑의 대화도 각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 평소에 늘 겪는 시행착오는 역설적으로 인생길의 “나침반”이 된다.라는 시상으로 세상에 신선한 충격의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며 시인의 자긍심이다.
누구에게라도 인생 항로는 나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몸과 마음이 엇박자 놀이를 하며 때로는 서로를 위로하면서 단단히 챙긴다. 이 시집의 주인공인 성희철 시인은 몸이 매우 불편하다. 생각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늘 건전한 생각의 전환이 자신의 세상을 바꾼다.
“늦은 밤 1, 2, 3”을 음미해보면 시인이 얼마나 고독하고 두려움 속에서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고통을 극복해 왔는지를 알 수가 있다.
시인은 오랜 고뇌와 사유(수양) 끝에 출구 없는 감옥에서 마침내 관념적 초월로 장벽을 무너뜨리고 해방이 되면서 용기와 희망을 품는다.
“마중물”이란 시는 화자의 심경을 토로했는데, 장애 시인으로서 못 걷는 이야기 중심의 시를 써서 오히려 독자들로부터 우려먹었다며 스스로 해서는 안 될 표현을 했다. 가령, 그렇다고 해도 시인에게는 새로운 사고의 전환(마중물)이 필요하다. 사고 전환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며 제3 자나 사물은 마중물의 대상일 뿐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상 속에서 한잔의 마중물을 찾아야 할 것이다. 더 훌륭한 시를 쓰는 것만이 진정한 마중물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존심이 있다. 남녀노소, 동서고금을 통해 자존심에 상처를 주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드릴 위인은 없을 것이다.
“모범생”이란 작품에서는 과거 학창 시절을 회상한 한 편의 시로서 평자의 마음을 적신다.
“/ ~‘희철아, 제발 책 좀 사물함에 넣고 다니렴, 서울대 갈 것 아니잖니?’ ~/”
장애가 있는 학생에게 뒤에 말, ‘서울대 갈 것 아니잖니?’란 표현은 엄청난 충격과 상처를 주는 말이 아니었을까? 지나간 일이기에 망정이지 요즘 같으면 담임교사로서 옷을 벗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것으로 생각한다.
시인은 힘겨운 신체적 조건을 극복하고 주변에 또 다른 삶의 경우들을 직간접적으로 겪게 된다. 해외여행 중 불의의 사고사를 당한 복지사의 명복을 비는 추모 시, “미얀마에서 별이 된 사람”을 읽으면 얼마나 따듯한 마음을 가진 복지사였는지를 알게 된다. 왜 이런 사람은 먼저 별이 되는가? 알 수 없는 그 세계, 여기서는 오직 모를 뿐!
“미처 몰랐지”라는 시는 장애에서 벗어나게 해보려는 가혹하리만큼 매서운 회초리, 한 발짝 걸음마에 환호해 주는 박수 소리에 고통을 잊었던 그 시절의 삶이 이야깃거리가 되고, 장애 인식개선의 길잡이가 되어 누군가에게 약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간절 함이 드리워져 있는 시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사는 게 삶이고 인생이 아닌가? 라고 치부하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태반이다. 속히 깨어나야 한다. 어느 한순간도 같은 순간은 없다. 인간에게 이롭든 그렇지 않든 찰나, 찰나 변하고 새롭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표적인 게 우리 몸뚱이다. 그래서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즉 우주 만물이 항상(恒常) 하지 않다는 말인데 이와 같은 현상을 불법(佛法)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고, 이것이 바로 생멸법(生滅法)이라는 매우 귀한 가르침이 있다.
아마도 시인이 매우 중요한 이 이치를 너무나 잘 깨닫고 “반복”이란 시의 마지막 연에서 “~/이유는 단 하나/ 반복할 수 없는/한 번뿐인 내 삶을 위하여/”라며 세상을 향해 큰 가르침을 일깨워 주고 있다.
평자는 시인의 새로운 시집 「내일 아침에 또 만나」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읽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문학을 통해 답답하고 상처 입은 마음을 차분히 다독여 주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평자가 어렸을 적에 어른들과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배부르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다가는 어른들로부터 꾸중 듣기 일쑤였다. 가난했던 시절이어서가 아니다. 밥(음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결여됨을 경계하는 말이다.
“~배가 부르다는 말로/널 실망시키지 않을게~/”
“밥”이란 시에서도 화자의 마음이 다섯 번째 연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생명 유지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밥일 것이다. 늘 받아만 먹는 세 끼 식사에 대한 감사와 어머니에 대한 감사 그리고 변함없는 동반자로 간주하며,
“~/내일 아침에 또 만나/ ”
하며 친구를 대하는 듯 화자의 진솔함은 모두의 희망이며 본받을 바이다.
또한 시인은 예전과 같지 않게 ‘문명의 이기’ 세대로 그나마 큰 다행이다. 주변에는 몸과 마음이 더욱 심각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인생은 늘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하나씩 실천해 가는 것이다. 스포츠를 통해서도 배우고 익히게 된다. “보치아 대회”란 시를 보면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손목 힘을 키우려던 노력,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한 번 던져버린 공은 내게 다시 오지 않는다는 야멸찬 인생 공부도 스포츠를 통해 배운다.
“살아간다는 것”이란 시에서는 인생의 공평함을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는 사실을 시인의 나이 47일 때 생일 케이크 앞에서, 십칠 세 학창 시절에 수학 선생님의 충격적인 한 말씀, ‘너희들 같은 사람 사십을 넘기기 어렵데이’ 라고 하셨을 때, 그만해도 오래 산다며 철없이 깔깔대던 지나간 날들을 생각하며, “그 무엇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인생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 인생의 공평함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며 자기 성찰을 한다.
그렇다 인생길에 있어 길을 가리키는 등대 역할은 할 수 있지만, 결코 완벽하게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아마도 화자의 최고로 행복한 시간은 “자기야 1, 2, 3”에 드러나 있다. 서로 사랑의 싹이 트고 홀로서기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눈을 뜨면 매일 그대와 손잡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매일 밤 기도한다는 시인, 홀로서기를 위한 고통스러운 재활 운동의 지난 시간 모두를 ‘지나간 옛이야기’로 치부하고 “~/그보다 더욱 기쁜 건 우리가 지금 손잡고 함께 있다는 거지./~”라고 속내를 털어내 보인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아기자기하며 건전한 사랑인가 말이다. 시인의 작품들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음이 있다. 오감을 통한 일상 자체가 마치 수행자와도 같기 때문이다.
“자존감과 방어기제”란 시에서 ‘편견’에 대하여 물론 뇌병변 장애인 본인, 입장에서 쓴 시라고 전제했다. 불편을 겪는 상태의 크고 작음, 생활 방식의 서로 다름의 차이로 학술적, 연구적 또는 기술적으로 분류하고 구분했을 뿐이지 삶의 소중함과 근본은 남, 여, 노, 소, 장애인, 비장애인이 평등하다. 다만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뿐이다. 여기서 평등은 인위적이 아닌 무위적 평등을 의미하며, 그 기반 위에서 인륜 도덕이 가미(加味)될 때 평등은 평화로움으로 나아가 행복으로 이어진다. 지나치게 인위적일 때, ‘쇠뿔 고치려다 소를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있는 그대로가 가장 자연스러울 때다. ‘학장부단(鶴長鳧短)’이란 말이 있다.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의 다리는 짧다.’는 말이다. 평등의 그릇된 판단으로 학의 다리를 잘라서 오리 다리에 이어 키 높이를 똑같게 해 준들 서로의 안전과 평화가 이루어질 수가 있을까?
국가가 부흥해지면 백성들을 위한 복지정책도 점차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도 그런 상황에 있다. 매년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로 지정하여 장애인의 지위를 향상하고 사기 진작을 위하여 여러 가지 행사도 갖는다. 30여 년 전만 해도 없었던 일이다.
성희철 시인은 “장애인의 날을 생각하며”란 시에서 장애인을 대표하여 욕구불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단박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더더욱 힘든 것은 거리마저도 나올 수 없는 중증의 장애인이 얼마나 많은가? 지난(至難)한 일이긴 하여도 지혜로운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술적, 행정적으로 많은 연구와 개발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전생 여행”이란 시에서 ‘업장 소멸’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어떤 신앙인이든 아니든 알게 모르게 짓는 죄가 태산 같아라. 그래서 참회 기도를 하거나, 절대자에 용서를 구하며 회계하는 기도를 하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 감히 평자의 개인적 소견으로 말하자면 이 모두가 마음의 병이다. 흔히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본질을 보아야 하는데 방편인 가리키는 손가락에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영영 해탈의 경지엔 갈 수가 없다.
“혼자 먹는 저녁밥”에서 절실함이 느껴지는 것은 ‘홀로서기’가 ‘자립’이라고 친다면 이제는 ‘혼자 살기’ 즉 ‘독거(獨居)’하는 생활에 익숙해야 할 것 같다. 장애 인식개선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생(生)과 사(死), 나고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이다. 그 무엇도 영원불멸한 것이 없는데, 어리석어 집착심과 탐욕심이 괴로움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생사 해탈도 오직 자신의 영역이지 그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한다.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부부, 부모 자식, 친구라 해도 부질없는 일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가장 값지고 소중한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이지 말고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봉사하는 마음과 실천이 앞서야 한다. 생과 사라고 하는 변해가는 과정에 붙여진 이름에 지레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성한 사람처럼 함부로 뱉은 글이라 생각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당부하며, 평자에게도 견딜만한 약간의 장애가 있음을 알리는 바이다.
「내일 아침에 또 만나」라는 시집의 제호처럼 만인에게 매일 또 만나는 좋은 시집이 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