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安을 本貫으로 정한 緣由
신안(新安)이라는 지명(地名)은 중국 안휘성(安徽省)의 남쪽 황산시(黃山市)를 중심으로 적계(積溪)・흡현(歙縣)・휴령(休寜)・이현(黟縣)・기문(祁門)의 5개 현(縣)과 강서성(江西省) 동쪽 끝에 위치한 무원을 통틀어 일컫는 옛날 지명이다.
따라서 신안 지명은 현 지도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내력은 처음 진(晋)나라 때에는 신도군(信都郡)으로 부르다가 오(吳)나라 때에 신안군(新安郡)으로 개칭(改稱)된 것이다. 그 후 당나라 때 흡주(歙州)로 개칭하였으나 사람들은 계속 신안군으로 불렀다. 다시 송(宋)나라 선화(宣和) 3년에 흡주를 휘주(徽州)로 개칭하여 황산시(黃山市)를 중심으로 6현(縣)을 두었는데, 청나라 말기에는 휘주가 안휘성(安徽省)으로 바뀌었다. 1949년에는 옛 휘주에 속한 6개 현 중에 무원(婺源)만이 강서성에 편입되고 나머지 5개 현은 안휘성에 그대로 속하게 된 것이다.
주자(朱子)의 선대(先代)가 세거(世居)한 고장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흡주(歙州)・무원(婺源)의 영평향(永平鄕) 송암리(松巖狸)이다. 주씨들이 무원지방에 살게 된 것은 원시조(元始祖)인 다원공(茶院公) 할아버지는 당(唐)나라 무종(武宗) 때(842년)에 출생하여 당(唐) 희종(僖宗) 때(875~888년)에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난(亂)을 피하여 오군(吳君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일대에서 흡현(歙縣)의 황돈(黃墩)으로 이사하였다.
그 후 당(唐) 애종(哀宗) 천우연간(天佑年間, 904~907년)에 흡주자사(歙州刺史 : 흡주 지방장관) 도아(陶雅)는 다원공(茶院公) 할아버지를 무원(婺源)의 군사수령(軍事首領)으로 임명하여 병사 3000명을 거느리고 군무(軍務) 군수조달(軍需調達) 및 세금부과(稅金賦課) 책임을 지게 하였다.
이로써 다원공(茶院公) 할아버지는 무원(婺源)에 정착하여 무원(婺源)주씨(朱氏)의 시조(始祖) 1세조(世祖)가 된 이후 계속 7세 되는 휘(諱) 삼(森) 자(字) 할아버지까지 이 고을 무원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8세가 되는 문공(文公) 할아버지의 황고(皇考) 위제공(韋齊公)도 이곳 무원에서 출생하여 장성 후에 관원이 되고부터 우계(尤溪)로 이거(移居)하게 되었던 것으로, 무원을 선조(先祖)의 원향(源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주문(朱門)의 관향(貫鄕)을 무원이라 하지 않고 신안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원은 원래 신안군(新安郡)에 속했던 고을이고 또 다원공(茶院公) 할아버지는 신안군의 북쪽인 흡현(歙縣)의 황돈(黃墩) 고을에서 살다가 무원의 군사수령(軍事首領)으로 임명되고 나서부터 이곳 무원으로 이거(移居)하게 되니 이 두 곳 모두가 선대(先代)의 오(吳)나라 때 신안군(新安郡)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원향(源鄕)이 신안(新安)이었기에 주문(朱門)의 관향(貫鄕)을 신안(新安)으로 정(定)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문공(文公) 선조(先祖)도 자칭(自稱) 신안인(新安人)이라고 항상 말하였으며 중국의 팔민이학원류(八閩理學源流) 권(卷) 1에도 ‘주자(朱子)는 휘주인(徽州人, 신안인(新安人))이며 오(吳)나라 신안(新安)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 등을 참작하여 1902년 10월10일 주석면공(朱錫冕公)이 복관상소(復貫上疏)하여 이조(李朝)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윤허(允許)를 받아 주문(朱門)의 관향(貫鄕)을 신안(新安)으로 득관통일(得貫統一)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韓國)의 주문(朱門)에서는 원시조(元始祖) 다원공(茶院公) 할아버지를 시조 1세조(始祖 一世祖)로 하지 않고 통상 주자(朱子) 할아버지를 1세조(世祖)로 호칭하여 ‘신유 신안주씨 대동보(辛酉 新安朱氏 大同譜)’도 주자(朱子) 할아버지를 1세조(世祖)로 하여 편찬하였다.
우리 주문본관(朱門本貫)은 월산(月山) 석면공(錫冕公)이 1902년 원수부기록국총장(元帥府記錄局總長)으로 재임 당시, 우리 주문일족(朱門一族)이 모두 성현(聖賢) 주희(朱熹)의 후예이면서도 세거지 별로 본관(本貫)을 각기 달리하여 87본관이 난립함을 주문 전체가 매우 안타깝게 여겨온 것을 석면공을 중심으로 문의(問議)를 모았고, 일세시조(一世始祖) 주문공(朱文公)의 관향(貫鄕)인 중국 신안(新安)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께 상소하여 1902년 10월11일 황제조칙(皇帝詔勅)으로 윤허(允許)를 받았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주문의 본관은 신안으로 통일된 단일본(單一本)이 된 것이다. 주자 말씀에 “나는 신안인(新安人)이다” 라고 하였고, 저서(著書)에도 ‘나는 신안인 주희(朱熹) 서(序)하노라’ 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주희(朱熹)를 신안주씨(新安朱氏) 시조(始祖)이며 일세조(一世祖)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