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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룻기1장15~22절
제목 : 내 곁에 룻이 있다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1:1)를 배경으로 합니다.
떡집(베들레헴)에 떡이 떨어지자 한 가족이 고향을 떠나 이방 땅으로 갑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남편(엘리멜렉)과 두 아들(말론과 기룐)을 잃은 나오미는 이방 며누리 룻과 함께 ‘텅 빈’모습으로 귀향합니다.
나오미를 따르는 룻의 결단은 자기 동족과 신을 포기하고 낯선 땅에서 가난한 과부로 살아야 하는 고통스런 결별이자, 시모의 동족이 되고 시모의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의연한 결단입니다.
룻기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치료하시고, 또 가련하고 버림받은 사람을 어떻게 자신의 크신 목적을 위해 쓰시는가를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여 줍니다.
나오미의 거듭된 권고에도 룻은 돌아가지 않고 시모의 백성과 하나님께로 들어옵니다.
한편 자신을 알아보는 여인들에게 나오미는 쓰디쓴 인생을 한탄합니다.
룻기는 기본적으로 룻과 보아스의 이기심 없고 복된 행위로 말미암아,
나오미가 절망(絶望)에서 행복(幸福)으로 변화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오미는 빈손에서 부요로(1:21;3:17;1:1,3,5,6,12,21,22;3:17;4:15 참조), 궁핍에서(1:1-5) 안전과 소망으로 나아갑니다(4:13-17).
1. 하나님과 그 백성을 향한 룻의 결단(15~18절)
1)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합니다(15절)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 오르바는 그녀의 백성과 그녀의 신들에게 돌아 갔습니다.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 이것을 원문대로 문자적으로 옮기면 '그녀의 백성과 그녀의 신들에게로 돌아갔으니'가 됩니다.
다시 말해 오르바(Orpah)는 자기가 속한 백성에게로 갔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이 섬기는 신(神)에게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볼 때 오르바는 단순히 그의 시어머니의 품을 떠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그모스(삿11:24)또는 바알브올(민25:3,5)신을 섬기는 우상의 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따라서 본절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이 말을 한 것은 1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시모(媤母)에 대한 애정을 초월하여,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을 시험해 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고대 세계에서는 자기 종족이 섬기는 신을 버리는 것은 본토나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 이상으로 극히 어려웠습니다.
특히 부족 국가를 이루며 살던 당시에는 부족 신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흔하지 않았으므로, 나오미는 이것으로 룻의 신앙을 시험해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을 풀러(Thomas Fuller)박사는 야곱의 경우와 비교하여 역설적으로 재미있게 묘사했습니다.
즉 "마치 하나님이 얍복 강가에서 야곱의 신앙을 꺾기 위해 애쓰신 것처럼, 여기서 나오미는 자부 룻의 올바른 결심을 좌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Pulpit Commentary)는 것입니다.
(2)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 이 말을 풀어 쓰면, 곧 '너도 동서가 결단을 내린 것처럼, 결단을 내려 너의 백성과 너의 신(神)에게로 돌아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했듯, 나오미의 이 말속에는 다분히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을 시험코자 한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서 나오미(Naomi)가 오르바(Orpah)의 행동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사실 일반적인 도덕 수준에서 볼 때,
오르바도 나름대로 시모 나오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룻(Ruth)의 각오와 신앙이 더욱 뛰어나고 위대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나오미가 룻에게 "네 동서(오르바)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라고 말한 것은 다만 그 결과만을 언급한 것 뿐입니다.
여하튼, 오르바는 떠나갔고 룻은 남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마엘은 떠나가고 이삭은 남은 것처럼(창 25:6),
그리고 에서는 떠나가고 야곱은 남은 것처럼(창 36:6),
하나님의 심오한 구속사적 경륜과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2) 룻은 오직 시어머니와 함께하며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다짐합니다(16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러한 룻의 고백은 진실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 되신다는 올바른 신앙에 근거해 있습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 재혼하여 남은여생 동안은 편안한 안식처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9절) 자기의 부모, 친척, 그리고 신을 떠나 아무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룻의 결심은 단순한 효성이나 애정을 초월하여 완전한 자기희생을 감수한 위대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17절). 한편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나오미가 이방 우상의 나라에서도 그 신앙의 빛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여호와 신앙을 물려주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적으로 며느리들을 교훈시켰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가 없었다면, 이처럼 룻이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롬 10:14,15).
*롬10:14,15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3) 롯은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자기도 죽겠다고 서원합니다(17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 룻의 신앙은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됩니다.
즉 룻은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만 발견되는 독특한 서약의 형태로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맹세했습니다 (삼상3:17;25:22;왕상 2:23).
본래 서약에는 일반적으로 어떤 표적이나 의식이 동반되지만,
여기서는 말하는 사람 자신이 그 서약을 범할 경우 스스로 벌을 받겠다는 엄숙한 형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룻이 맹세를 할 때 '여호와'(Jehovah)라는 신명칭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란 성호는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사용하는 고유한 신명칭이었기 때문입니다(왕상 19:2).
그런데 이방인 이었던 룻이 여기서 이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1) 룻은 나오미의 신앙을 따라 자기 나라 모압의 신을 떠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확실히 지니고 있었습니다.
(2) 룻은 자신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성호로 맹세함으로써 이미 언약의 백성에 속해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룻의 신앙에 근거해 볼 때 진정 그녀는 여기서 언약을 어긴 자에게 반드시 벌을 내리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엄숙히 맹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나오미는 룻의 확고한 결심을 보고 더 이상 권하지 않습니다(18절).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사실 홀로 된 나오미인들 그동안 정든 두 며느리를 떠나 보내는 것을 진정 원했겠습니까?
다만 두 자부의 형세적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욕심은 일단 접어두고 그들을 돌려보내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시험적 형태를 띠게 되었고,
결국 룻만이 통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두 자부는 나오미의 의도를 따라 각자 자신의 행복의 길을 추구했습니다. 즉 오르바는 모압 땅 자신의 아비 집에서,
룻은 시모를 따라 하나님을 섬김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 모두를 기쁘게 인정했습니다.
2. 나오미와 이방 여인 룻의 귀환(19~22절)
1)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까지 갔습니다(19절).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성읍내에서 유력한 가문이었던(2절) 엘리멜렉 가족이 먼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간 사실도 분명 한때의 큰 화제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어언 10년이 지난 후, 낯선 여인과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나타난나오미의 등장은 분명 조그마한 성읍 베들레헴을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동하게 하기에 충분히 재미난 화제거리 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가 나오미냐. - 이 말은 단순히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놀라움만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이방 여인인 며느리만을 데리고 빈손으로 처량하게 돌아온 나오미의 모습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껴 발한 탄성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10여년전 고향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르게(21절) 변한 나오미의 모습과 처지를 반영한 말입니다.
2)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합니다(20절).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나오미'(Naomi)란 이름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본장의 전후문맥과 어근을 살펴 볼 때 '감미로운자','은혜로운 자','사랑스러운 자'란 의미를 지닙니다.
반면에 '마라'(Mara)란 단어는 '괴로움', '쓰라림', '씀'을 의미합니다(출 15:23). 그러므로 이처럼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 불러달라고 한 것은 그녀가 모압에서 생활하는 중 극도의 슬픔과 고통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고 괴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여기서 나오미가 특별히 하나님의 신명칭을 '전능자'로 부르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전능자'(솨다이)란 신명칭은 택한 백성이 순종의 길로 걸어갈 때는 무한히 축복해 주시되, 어그러진 길로갈 때는 어김없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 명칭입니다.
나오미도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사용한 듯합니다.
3)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21절).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이 말에 대한 해석으로는 다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혹자는 엘리멜렉의 가정이 지방 귀족 가문으로서, 그들이 모압을 향해 떠나던 당시에는 베들레헴에서 널리 알려질 정도로 부유하였다고 주장합니다(David Atkinson, Leon Moris).
(2) 어떤 학자는 나오미가 풍족하게 나갔다는 말은 재산이나 명예의 풍부가 아니라, 든든한 남편과 두 아들로 풍족하게 나갔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Keil,A.C.Hervey).
그런데 본장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우리는 위의 두 가지 내용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나오미가 떠날 때 '풍족했다'는 표현을 쓴 것에 초점을 맞추면 분명히 사람 뿐 아니라 재물도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나오미가 돌아올 때 남편과 자식들 없이 공수(空輸)로 돌아온 것에 초점을 맞추면 두 번째의 주장도 타당합니다.
사실 충족한 재산을 가지고 이방 땅에 가서 흉년이나 기타 재난으로 망하지 않았다면, 비록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을 지라도 재물까지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생활한 형편을 보면(2:2), 남편과 자식들을 잃은 것 외에 재물까지도 잃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오미가 떠날 때 풍족했다는 표현을 쓴 것은 위의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징벌하다’, ‘괴롭게 하다’- 이 두 동사형은 서로 관련이 있습니다.
즉 '징벌하다'('아나')는 눈 밖에 난 자를 비천하게 만들어 결국 괴롭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괴롭게 하다'('라아')는 하나님의 징계로 괴로움을 당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한편 나오미가 본절에서 이 두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1) 자기의 고통스러움이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과
(2) 그 징벌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인다는 회개의 의미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4) 그들이 베들레헴에 돌아온 때는 보리 추수 시작할 때였습니다(22절).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본절은 1장의 요약이자 2장의 서론으로서, 나오미와 룻의 귀환을 역사적 바탕 위에서 간략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 팔레스틴(가나안)지방에서는 일반적으로 보리를 가을에 파종하여 이듬해 봄에 추수합니다(2:23).
그리고 보리 추수가 끝날 무렵에는 밀 수확을 합니다.
팔레스틴의 보리 추수는 보통 4월말 경에 시작되었으나(수 3:15),
고원 지대에서는 5월 또는 6월 초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보리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나는 주산물 중 하나로서 주로 말이나 노새의 먹이로 경작되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양식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보리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고 봉헌하기 위해 '초실절'(初實節)을 절기로 지킵니다(레 23:9-14).
한편, 본절은 나오미가 자기 고향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6절), 곧바로 모압 땅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음을 보여 줍니다.
3. 결단과 선택의 중요성
우리는 매일 선택을 해야 합니다.
룻기 1장은 “선택”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1) 잘못된 선택
(1) 이스라엘 땅은 백성들의 범죄로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때 엘리멜렉의 가족은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봉착했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만족을 위하여 영적인 축복을 희생시키고 이방 땅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나도 영적인 것을 버리고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택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잘 선택합시다.
(2)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결과 두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신자와의 결혼은 상당한 위험이 따르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긴 사람은 죽음(영적 죽음)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3) 오르바는 왜 자기 동족에게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까?
막10:28~31 “[28]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백배나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2) 바른 선택
(1)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합니다(6,7).
나오미는 듣고 바른 선택을 합니다.
듣기만 하는 신앙은 언제나 제자리입니다.
듣고 선택했으면 바로 행동이 뒤 딸아야합니다.
(2) 오르바는 돌아갔지만, 룻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갑니다(16,17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의 결심은 단순한 효성이나 애정을 초월하여 완전한 자기희생을 감수한 위대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룻은 그(나오미)를 붙좇았더라"(14b).
붙좇다('다바크')는 '굳게 결합하다'(cleave). 또는 '붙들고 늘어지다'(cling)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결단의 연속입니다. 선택의 연속입니다.
선택할 때 바른 선택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텅 빈 인생을 은혜로 채우시는 분입니다(21,22절)
흉년 때 나갔던 나오미가 “보리 추수 시작할 때” 돌아옵니다.
주님의 시간에는 착오가 없습니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하시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전3:11).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비어 돌아왔지만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괴롭히는 분이 아니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을 빼앗는 분이 아니라 빼앗긴 인생을 되찾아주시는 분입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선한 것으로 채우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계십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오르바는 돌아갔지만, 룻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갑니다(15~17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다(신23:3)는 큰 장벽에도 이방 여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안전하고 편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은 내게 오도록 용납하는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고 있습니까?
2) 나오미에게 룻은 상실의 증거이자 잊고 싶은 과거일 것입니다(15~18,21,22절).
분명히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나오미는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나오미가 간과한 룻을 성경은 드러냅니다.
내가 숨긴 기억을 주께서 드러내십니다.
누구나 다라오지 않기를 바라는 과거가 있습니다.
자랑스럽지 않은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거가 내게 복이 됩니다.
상처가 나를 구원합니다.
내가 무시하고 싶지만 내 곁에 두신 복, 나의 룻은 누구입니까?
3) 자신을 알아보는 여인들에게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라 부르게 합니다(19,20절).
자신의 인생에는 더 이상 ‘기쁨’이 없고 ‘괴로움’만 남았다고 여겼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너무 성급합니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라는 다시 나오미가 될 것이고 웅성대던 여인들은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4:14).
현실이 어둡다고 해서 너무빨리 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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