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內外明徹 / 老山]
능가경에 自心은 自我라 하였다.
자아는 相이다.
나는이를 能相이라 이름할것이다.
이 能相 안에 五溫이 있다.
오온은 名色을 떠나 있어야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대자유인이 대해탈인이 된다.
깨달은 자는 自我를 스스로 세우는 能所의 相이 없어야 한다.
즉 보는 자와 보는 대상 能.所가 서로 부딧치지 않는다.
봄의 能과 보여짐의 所가 다만 二相으로 나눠 보일지라도 능.소는 한 쌍이다.
이를 모르면 法을 알수 없다.
반야경에서 無相이란 없음을 증명할 수 없음이어야 진실로 없음의 긍극 세계에 다다를 수 있다.
반야심경의 觀自在菩薩란 관세음보살이 아니다.
觀自在의 뜻은 스스로 있는 그것(?)을 보는 자, 보려고 하는 행위 자라는 것이다
보살이란 <여기서는 보통 명사이다.>
적어도 보살의 경지에서 본다면 오온이개공함을 알게된다는 뜻이다. 알게 되면 度一切苦厄이다.
여기서 부처님이 말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핵심 내용이다.
그러므로 色이 空이고, 空이 色이 되는 것이다.
수상행식 안이비설신의 오온이 개공하고 색성향미촉법 모두가 空이다.
이유는 안이비설신의랄 것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內外明徹이란 無我로 일승의 證悟가 있어야 내외명철이다.
能知所知의 능지로 主를 삼아 공부한다면 항상 경계에 묶이고 말 것이다.
名想識을 여읜 無我에서 우러나오는 智로 能.所 二相을 떠나면 바로 내외명철하게 된다.
夢中一如의 경지에 가게되면 누구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다.
내외명철이란 非存在가 존재해야 함을 밝히는 것이 내외명철의 함의.
法이 실존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없음을 인증하는것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증명할 수 있는것은 이미 法이 아니다. 부처를 증명할 수 없다는뜻이다.
性이란 스스로의 자성을 말한다. 자성을 불성이라 부르며 이 불성이란 法體이다.
법체는 볼래야 볼 수 없다. 허공 같아서 그 넓이도 잴 수 없고 크기도 알 수 없다.
불성이라 불리는 마음의 法體는 있으되 없는 것이다.
절대 空에 처해 있으며 능소를 떠나 있다.
부처나 성품이나 마음이라 하는 것은 마음으로 觀한다.
능소를 취하지 않고 있는대로 觀하되, 안팎이 밝고 투명해서 둘로 나눠지지 않음이 내외명철이다.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규정하기 위하여 세운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더졌다.
그 시대 사람들 달리 말해 그 시대 철학자들은 절대 美와 절대 數의 한계나 존재의 인식론에 몰두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엄론적으로 말해서 청정은 어디까지를 청정이라하고
궁극적 절대의 크기와 절대의 극미진수 또는 극대를 논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能所 二相을 세우지 않음을 頓悟라 하고 佛入이라 할 것이며,
점오나 점수 漸次를 말한다면 二乘이 敎學으로 풀이하는 수준밖에 안 된다.
대혜종고의 간화선이래 어찌 된 일인지 唐시대와 같은 명안종사가 별로 보이지 않음은 어찌 설명할까?
이는 오직 간화에만 집착에서 온 것이라 규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頓法과 漸法에서 漸法은 주관 객관을 세우는 간화선. 염불. 다라니를 하는 이승 자이다.
돈오돈수를 왜곡하거나 점수돈오로 점차 깨침에 가야한다는 논리는 교학이요 二乘이다.
이러한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無我의 경지에 들어가보지 못한 이들의 논거일 뿐이다.
能所의 心想을 세워 古則公案을 참구하다가 조금 별상을 분별하고는 이것이라고 고집하는 이들의 분별심을 내는 것을
어리석은 농부의 선이라 하여 愚夫所 行禪이라 한다. 대승 기신론에서는 凡夫覺이라고도 한다.
무아의 법계 연기로 여래의 지혜가 열린 선지식은 능소를 떠나 있다.
대승경전에 나오는 일승불은 제불의 증명과 제보살의 普行이 있어야 한다. 이래야 돈각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고통에서 해탈과 법집에서 해탈해야 비로소 대승의 경지을 보인 것이다.
대승장엄론에 무착보살은 청정선은 일승의 지혜에 포섭한다고 하였다.
漏塵의 경계는 眞虛에 의지하여 불지에 이른다.
그러므로 일불승이야말로 불지에 오르는 길이며 일초즉입 견성성불하는 것이리라.
2024. 2. 29. 세존사 회주 #장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