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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밑에 계속 세분해서 얘기를 하는 거죠. 마지막까지 돌아가면서 읽어보죠.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느낌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심리현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알음알이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성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성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성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심리작용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성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성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이제 그렇게 얘기 하는 거예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안다.
오비구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상세한 설명이 설해졌을 때 오비구는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처음에 다섯 비구가 초전법륜경에서 중도에 대해서 법문을 듣고,
무아에 대해서 법문을 듣고는
오비구가 전부 오온에, 색수상행식,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이 없어졌다.
취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져서 마음이 해탈하였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물질이 무상하고, 괴롭고, 불만족스럽고, 거기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실체가 없다 라는 것을 그것을 꿰뚫어 알고,
그리고 나서 물질에 대해서 집착하는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염오라는 게 그런 거죠.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그런 거죠.
좋으니까 집착하는 거잖아, 그죠?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졌다는 뜻을 ‘싫어한다 밀어낸다’ 이런 뜻인 것 같아요.
염오(厭惡)가.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느낌에 대해서도 그렇고 인식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지면서, 그죠?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이라는 것은 구속에서 벗어났다.
구속되는 거는 결국은 몸과 마음에 구속되어 있는 거잖아요. 여기에서 벗어났다는 거지.
여기의 실체를 본 거죠. 오온의 실체를 본 거지.
이러한 봄을 통해서 실체라는 것이 없구나.
그냥 모든 것들은 무상하고 변화하고, 불안전해서 불만족스럽고,
그거를 ‘실체가 없이 그냥 일어나는 현상이구나.’ 라는 것을 알고,
거기에서 나, 나의 것, 나의 어떤 실체, 그렇게 보지 않으니까
나라는 것에서, 구속되어 있던 거기에서 벗어났다 그거죠.
태어남은 다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안다.
우리가 ‘바람이 태어났다, 바람이 죽었다, 바람이 존재했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잖아요.
그거예요. 그냥 조건 되어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를 하면.
우리는 여기 100년을 너무 길게 우리는 인식하고 있는 거야.
완전 실체로서 탁, 이렇게 뭔가 태어나고 죽고,
이런 거는 그냥 조건 따라서 변화하는 어떤 그런 것뿐이에요. 그거밖에 없는 거야.
거기에 사람이라는 어떤 존재, 그런 건 없어요.
그거는 다만 그렇게 우리가 편리하게 이름 지어진 것뿐이라고 보면 돼요.
그래서 ‘사람이 특별하다’ 이런 거, 우리는 갖고 있잖아. 그런 건 없다는 거예요.
우리 금강경 할 때 ‘모든 상에서 벗어나라’고 그러잖아요. 모든 이미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상, 모든 이미지에서 벗어나라고 그러잖아요.
그중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얘기했잖아요.
아상이라는 게 ‘아’가 바로 아트만이에요. 실체가 없다.
인상이라는 게 바로 존재에 대해서 ‘존재가 있다’라고, 인 사람,
그리고 중생도 모든 존재가 있다 라는 거,
그 다음 수자상은 그 당시에 지바 그래가지고
영혼, 생명, 영원한 어떤 실체, 이런 것들이 없다.
어떠한 것들도 잡으면 그게 바로 어리석음이고, 그게 괴로움이다.
존재라는 건 없는 거예요.
우리가 존재라는 것은 이것이 어떤 실체라고 잡았을 때
실체했다가 죽음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그랬을 때 우리는 태어남이라고 생각하고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이러한 일어남과 사라진 현상들만 계속 있는 거예요.
작용들만 있는 거예요.
작용들을 이렇게도 보여지고 저렇게도 보여지고, 그죠? (네)
나무로도 보여지고, 동물로도 보여지고, 바람으로도 보여지고, 비로도 보여지고,
눈으로도 보여지고, 사람이라고 이름하는 이러한 현상으로도 보여지고, 그러할 뿐이야. 다름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르면 이상한 거잖아. 얘만 우뚝 서서 다르면 이상한 거잖아. 그런 건 아니라는 거예요.
다 똑같은, 아까 자연이라고 얘기했잖아.
자연에서 일어나는 그런 거는 볼 수 있다, 알 수 있다
그러지만 그거랑 이거랑은 똑같은 거예요. 이 사람도 자연의 하나예요.
우리가 사람으로서 교육받고 했기 때문에 단순해보이고 복잡해보이고
이렇게는 보일 수 있지만, 그것 또한 똑같은 작용이라는 거예요.
복잡한 거는 우리가 이해를 못하니까 ‘아, 이건 어떻게 이렇게 됐지’ 그러면서
뭔가 큰 어떤 주재자가 있는 것처럼, 뭔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데 그런 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진화라는 얘기도 하잖아.
단순함에서 복잡한 걸로 자꾸 진화되는 그런 걸 얘기를 하는 거죠.
진화된다는 것도 어떤 조건 따라서 변화되는 거잖아, 그죠?
진화되는 그거만 딱 보면 우린 너무 복잡한 거 같잖아.
뇌는 너무너무 똑똑한 거 같잖아.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것 같잖아.
그러니까 ‘이거는 뭔가가 누가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내지?’ 이렇게 되는 거지.
변화의 과정인 거예요.
또 어떻게 조건이 달라서 또 다시 퇴화할 수도 있어.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정말로 다시 또 이런 환경들이 변하고 하면
이거 또 이상하게 달라질 수도 있어요.
이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뭔가를 만들고 뭔가를 할 필요가 없는 환경이 돼버리잖아.
그러면 이건 퇴화하겠지.
그리고 만약에 태양이 저런 역할을 안 하고,
빛이 이런 역할을 안 하는 상태에서 생명체라고 얘기하면 생명체가 있다면,
그들은 눈은 필요가 없는 거잖아. 그러면 그런 것들은 퇴화가 되겠죠.
뇌의 작용이 ‘누가 이렇게 뇌를 탁 만들었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거지.
그럴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눈의 작용이 어떻게 이렇게 보여지지 했을 때,
눈을 잘 보다가 맹인이 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환각을 봐요.
직접적으로 보지 못하지만 뇌에서 계속 봐.
질문자 : 그 전에 했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본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사람은.
그러니까 눈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걸 보지는 못하지만,
그게 뇌의 작용에 시력을 담당하는 작용은 그대로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걔는 계속 뭔가를 본다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환상이 보이는 거지, 계속.
우리 생각은 환상이지만 그 사람은 진짜 보는 거예요.
이런 모든 것들은 그러한 조건들이다. 거기에서 실체가 없다.
그게 바로 무아예요.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될까.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살아야지, 맞죠?
더 열심히 살아야지. 일어나는 것밖에 없는데.
‘아, 여기서는 대충 살고 나중에 천국 가서 잘 살지.
여기에서 대충 있다가 내가 열심히 기도했으니까
나중에 되면 아주 좋은 몸에서 태어나니까 그 때 잘 살지 뭐. 이런 게 있을 수가 없는 거지.
오히려 일어나는 대로 100% 살 수가 있는 거지.
‘이렇게 하면 나가 없다고 하면 함부로 살지 않을까. 나가 없다면 ...’
이건 잘못된 무아를 이해하고 있는 거잖아요.
질문자 : 함부로 살 수 있는데 그만한 댓가를 받게 되잖아요. 연기 법칙에 의해서
그렇지, 그게 연기적으로.
그러니까 그냥 일어나는 그대로 열심히 살 수밖에 없겠지.
머리 막 ‘나중에 어떻게 될까?’ 그러지 않고 그냥 일어나는 대로.
그러니까 이게 무아를 제대로 이해하고 알면 ‘어떻게 저렇게 살 수가 있지?’
무아행을 한다고 그러면서 함부로 살고 다른 사람한테 욕보이고 이런 사람 많잖아.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없다, 나가 없다’를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질문자 : 도판에서 이 무아를 가지고 진짜 잘못 사는 사람이 참 많잖아요.
그쵸. 그러니까 무아의 체험에 빠지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잖아.
무아라고 하는 어떤 체험은, 체험이라는 것은 여기 현실하고 떨어진 체험들이잖아요.
그 체험 속에 있으면 현실을 살 수 없는 거지.
무아라는 거는 어떤 체험이 아니다, 어떤 상태도 아니다.
일어난 것에 대한 바른 이해잖아, 그죠?
그게 바로 여기서 얘기하는 통찰지, 그게 바로 깨어있음이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바로 그렇게 보는 거야.
실체가 없음을 보는 거,
그냥 일어나는 작용들의 현상으로 보는 거,
그게 있는 그대로 보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생각이 ‘아, 뭐지? 어떤 생각이 일어나.’ 그것도 생각이에요. 응?
어떠한 것도 잡지 않는 게 지금 깨어있는 거야.
무엇이 일어나든 잡지 않는 게.
그러니까 지금 부처가 제자들한테 쉽게 쉽게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중도라고 얘기해주니까 너무 어려워가지고.
꼰따니아 한 사람만 ‘아, 그렇군요.’ 했으니까,
좀 쉽게 ‘나라는 건 없다 실체란 없다.’ 라고 설명을 하니까
다섯 비구가 다 ‘해탈했다’ 이렇게.
그러니까 집착이라는 게 그게 바로
‘나, 이 오온이 나’라는 실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오는 거기 때문에
그걸 깨주고 나니까 집착이 떨어졌다 라는 거지.
그전에 중도를 얘기하니까 내가 뭔가를 하려고 그러고, 내가 뭔가 되려고 그러고,
막 이런 상황이 되니까, 또 다른 나에 대한 집착으로 그게 이어졌던 거죠.
이러한 모든 행위, 이러한 모든 생각, 이러한 모든 말 이런 것들이
그냥 누가 일으킨 것이 아닌, 그냥 조건에 따라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거기에 깨어있는 거예요.
움직이면 움직이는 데, 모든 것들에 깨어있다.
그래서 이걸 알아차림이라고 앎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앎. 그게 깨어있는 거예요.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면 그냥 ‘생각이 일어남’에 앎이 있는 거고 깨어있는 거고,
그러한 상황들이 계속 일어나지. 계속되는 거예요, 그냥.
이어진다는 표현이 아니고 계속되는 거예요.
이렇게 일어났다 사라졌다, 일어났다 사라졌다. 고것만 있어요.
그래서 불교의 수행은 대념처경 할 때 봤지만 계속 해체해서 봐. 해체해서 알아차려요.
왜냐하면 무더기로 되면 존재, ‘나’라는 인식이 사람들이 딱딱 생기기 때문에
생각이면 생각, 느낌이면 느낌, 행동이면 행동, 의도면 의도,
이런 것들을 다 해체해서 보는 거예요.
그래야지 나라는 착각이 안 붙는, ‘실체가 일으킨다, 뭐가 있다’ 라는 착각이 안 붙는 거지.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잖아. 달라짐이 변화됨이 명확하니까.
그런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뭔가 계속되는 느낌이 드는 거지.
어떤 작용이. 그런데 그것도 사실은 그렇게 세밀하게 해체해서 보면 항상 변화하는 거잖아.
그게 실체가 없는 거지.
이 몸뚱이만 딱 전체적으로 봤다. 그러면 얘는 변화되지만,
어떤 존재가 변화되는 걸로 우리는 느낄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죠?
이 몸뚱아리 전체를 보게 되면.
그러니까 늙음, 죽음, 태어남 이런 것들이 생기는 거잖아.
존재를 보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이렇게 앉아있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수고를 하는 많은 것들이 있어. 그쵸?
연골들, 이런 작용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한시도 가만히 안 있어.
여기가 다 그런 거예요, 지금. 거기에 깨어있는 거예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변화하는 작용들에.
그러니까 뭐 ‘어떻게 해야 되겠다 .이래야 되겠다.’ 라는 것도 생각이죠.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안 되겠다.’ 라는 것도 생각이죠.
그러니까 아무 문제가 없죠. 이런 생각은 되고 저런 생각은 안되고가 없잖아.
그냥 일어난 생각이에요. 그냥 안 붙들면 돼. 그냥 그 때 일어났을 뿐이야.
나중에 또 똑같은 생각이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그건 상관없는 거잖아.
붙잡지만 않으면 되요. 붙잡으면 바로 실체가 돼버려.
붙잡으면 실체를 만들어 버리는 거지. 없는 것을. 그러니까 괴로운 거예요. 불편함이에요.
뭐든지 잡으면 불편한 거 같애.
그게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그게 좋은 경험이었든 안 좋다는 생각의 경험이었든 무엇이든 잡으면.
뭐든지 일어날 수는 있지. 일어날 수는 있지만.
질문자 :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일단 잡기는 잡아지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빠지지 않으면 되잖아요.
좋아하는 게 있으면 잡아지는 게 어떤 거에 잡아지는 거지?
잡아진다는 경험이 어떻게 일어나지?
질문자 : 아니, 제가 요즘에 비비빅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여름철에 식후에 하나씩은 먹어요.
아, 비비빅을 많이 사놓고 계속 먹고 싶은.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잖아.
우리가 커피 마시는 것도 그런 거고, 밥을 먹는 것도 그런 거고,
비비빅을 먹는 것도 그런 거고.
어떤 사람은 하나 먹고 그만 먹고 어떤 사람은 열 개 먹어야 되는 거고 뭐 이런 거지.
그게 뭐 잡는 게 아니고, 그냥 일어나는 현상들이 계속 일어나는 거죠.
그게 다 보이는 거지. 첫 번째 먹을 때 느낌하고 두 번째 먹을 때 느낌하고 또 다를 거예요,
그죠? (네)
일어나는 것들에 실체가 없다, 주체가 없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확실한 통찰이 생기면 살아가는 게 어떨까요? 어때요?
그게 중요한 문제잖아.
질문자 : 현상에 매이지 않고 편안하죠, 뭐. 흘러가는 대로 편안하게 가는 거죠.
난 잘 모르겠어. 어떻게 될지. 그렇게 ‘실체가 없다’ 라는 것이 인식이 되면 뭐가 바뀌지?
뭐가 바뀌었어요?
‘이랬다가 지금은 이렇다.’ 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까.
그냥 똑같지 않나? 나는 모르겠어. 그냥 사는 거지, 그지? 그냥 사는 거죠.
질문자 : 만약에 그런 상황이 된다면 아까처럼 말할 때 많이 먹었다고 해서
고민되지도 않을 것 같고, 질문도 하지 않을 것 같애.
그러니까 ‘지금 그렇지 않냐.’는 거를 내가 묻는 거야. ‘지금 어떠냐.’는 걸 묻는 거지.
그러니까 늘 갈등이 있냐,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이건 아니다 일어나는 것에 대한 갈등이 있냐 없냐를 묻는 거야.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갈등,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그걸 묻는 거야. 그러면 문제없지.
하나 먹고 또 먹고 싶다고 그게 잡는 걸까? 그런 건 아니에요.
일어나는 것에 내가 일으킨 게 아니고, 누가 어떤 실체가 일으킨 게 아니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무엇이 일어나든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변화가 있고 없고에 대한 생각도 없는 거야.
지금 일어나는 생각 그대로니까.
지금 일어나는 말 그대로고, 지금 일어나는 생각 그대로기 때문에.
질문자 : 그런데 아닌 것 같아요. 생각도 막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나면
저는 안하려고 하고 막.
그런 게 없어야지.
질문자 : 그래야 될 것 같은데, 그런데 아직은 제가 머리로만 ‘생각일 뿐이다’ 고 알지만,
막상 저는 닥치면 아직은 안돼요.
어떤 부분은 이래야 되겠다 저래야 되겠다가 아직 있다는 거지.
질문자 : 그런 거는 없는데, 아직 그런 생각에 자유롭지는 않아요.
아까 비비빅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의 그런 조건 지어짐의 차이는 있겠지.
깨어있으면 생각에 빠져서 살지 않잖아요.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는 상태는 대부분 생각에 빠져있거든요?
생각에 빠져서 살지 않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정확하게 살 수 있어요.
우리가 놓치고, 뭔가 허둥대고 이렇게 하는 건 사실 생각에 빠져있는 거야.
우리가 사실은 잡는다는 거는 생각을 잡는 거잖아요.
빠져있다는 것도 생각에 빠져있는 거기 때문에,
깨어있다 라는 거는 생각에 빠져있지 않음을 얘기한다고 생각하면 되요.
그렇기 때문에 매순간을 명확하게 사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저러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어떨 것이다, 그런 것도 없는 거지.
생각에 빠져 있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 없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어요.
옛날에 ‘생각이 없다’ 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상황을 표현했을 수도 있지.
일어나는 생각을 어떻게 하고자 하지 않는 거지. 그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사실은.
생각에 빠져 살지 않는 거. 다들 그거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
그래서 다시 또 되새기고, 다시 또 생각하고, 다시 또 되새기고.
그러니까 뭔가 알고 이해가 되고 다 되는데 왜 뭔가 자꾸 불편함이 일어나고,
뭔가 그렇지 않는 거는 바로 한 번씩 생각에 빠지기 때문에 그래요.
질문자 : 바라는 마음이 자꾸 올라와요
자꾸 이게 아니고 저거, 이거보다 더,
이런 생각의 빠짐에 한 번씩 자기도 모르게 들어가기 때문에.
그게 바로 다들 일어난 생각에 빠져있는 거죠.
오늘 한 게 ‘실체가 없다’ 이게 명확하게 이해가 되고 밝아지면
뭐가 달라지죠? 내가 물었잖아요. 그게 바로 생각에 빠져있지 않게 되는 거예요.
그래야지 이게 구속에서 벗어난다고 얘기하는 해탈이 일어나는 건데,
알고도 자꾸 생각에 빠지는 게, 왜 그렇죠?
어떻게 하고자 하고, 어떻게 하고자 하는 욕구가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그러니까 거기에 빠져있는 거지.
아프면 아픔에 빠져있는 거고, 아프다는 생각에 빠져있는 거고.
그런 것들이 매순간 그냥 깨어있으면 매순간 정확하게 사는 거죠.
정확하게 전달하는 거고, 오히려 정확하게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거고. 그런 거 같아요.
그냥 먹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지금까지 잘 체하고 했던 것에 대해서
탁 놔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계속 체할까? 그게 너무 오래된 상황이잖아.
다음에는 그냥 매순간 깨어있으니까 생각에 빠져들지 않고 깨어서 생활하니까 어떻더라 하는 얘기를 해주세요.
질문자 : 그런데 깨어는 있는데,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제가 그걸 보면서도 되게 아이러니해요. 깨어는 있어요. 그런데 어떤 게 와요.
갖고 싶은 마음을 제가 알고 있어요.
갖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아무 문제가 없는 거잖아.
질문자 : 네. 문제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되나?
그러니까 일어나는 마음에서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가 없는 게 깨어있다는 거야.
갖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어. ‘왜 갖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지?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러네요)
‘갖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는데, 그거를 가질 돈은 없어.’ 그것 때문에 괴로운 거야?
‘갖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는데, 왜 갖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이런 거예요?
질문자 : 굳이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그러니까 이런 거죠.
깨어있으면 화를 안 내도 되잖아요. 예를 들면 깨어있어요.
아, 그냥 일어난 현상이구나. 그런데 화는 나요. 아이러니한데.
깨어있으면 화가 안 나나? (나죠.) 그래, 깨어있으면 잠이 안 와요? 다 똑같애.
질문자 : 그래도 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게 되잖아요
어리석은 생각이 뭔데?
질문자 : 그냥 2차, 3차를 만들잖아요.
예를 들면 화살을 맞으면 ‘누가 했다’라는 2차 3차 원망 이런 게 안 생기잖아요.
그렇지, 그거는 그런 현상들을 붙들고 있어서 그런 거지.
어떤 반응이 일어났으면, 그 반응에 대한 해석이 계속 일어나는 거지.
그거 때문에 원망하고, 생각하고, 이랬지 그러면서.
그러는 거는 그런 현상을 잡고 있는 거지. 거기 빠져 있는 거지, 그거예요 바로.
그건 깨어있음이 아니지.
작용에 대한 해석이 계속 일어나는 건 깨어있는 게 아니잖아.
그거는 이미 판단하고 있는 거잖아, 이건 안 됐다, 이게 잘못됐다, 이런 것들.
나 같은 경우에는 그런 생각이 만약 있잖아? 그러면 그걸 순간적으로 생각이 났잖아?
그러니까 해결되지 않은 생각들은 끊어지면서 문득문득 일어나기는 해.
자다가 눈 떴는데 그 생각이 또 일어났다든가,
그럼 다시 자다가 눈 떴는데 또 그 생각이 일어나고 그럴 수는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해결하고자 밤을 새고 그러지는 않는 것 같애.
계속 그게 막 억울하고 화나고 거기 매여 있는 거잖아.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고, 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서 계속 그러는 거잖아.
감정에 매여 있는 거지. 자기의 화에 묶여있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한 게 아니지만, 나라는 착각으로 인해서 일어난 무지의 현상인 거지.
왜냐하면 그것에 내가 화가 나고, 나한테 내가 당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거든.
그러니까 그걸 붙잡고 있는 거잖아. 내가 당한 것에 대한 화를 붙잡고 있는 거잖아.
질문자 : 대개 어리석은 생각인 걸 알면서도 이게 떨쳐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아직까지는 큰 게 와 닿으면 그게 쫌 그럴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그러니까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어디에 묶인다는 건 참 내가 나중에 생각하면 아이러니한데,
남이 생각하면 어리석은 데 묶여있는 그런 경우도 많잖아.
질문자 : 저도 나중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상황에서는 제가 그걸 못
참더라고요.
그럴 때는 자려고 누워있지 말고 일을 해. 다른 거를 해. 그러면 잊어버릴 수도 있지.
왜냐하면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는 그게 가속도가 붙는 것처럼 잠도 뺏고 하면서
계속 되는 거잖아. 그러면서 사람들이 불면증을 일으키는 거고 막 이러거든요.
정신적인 문제가 바로 그런 거 같애. 어디에 빠져있어서.
만약에 그때 그게 그렇게 해서 끝났지만 며칠 계속된다 생각해봐요.
그럼 계속 그러한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거지.
질문자 : 그런 게 되게 큰일도 아니고 쪼잔한 일이라는 게 제 자신이 너무.
원래 큰일은 또 과감하게 이렇게 하는데, 보여지지 않는 쪼잔한 일은 진짜로 더.
질문자 : 말 한 마디 이런 거에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걸 아는데, 왜 자꾸 끌려들어가는 거는,
그냥 그거를 다른 일을 하세요.
밤에 특히 그런 게 많은 게 몸의 움직임이 없어서 생각이 더 따라가거든요?
그래서 밤에 생각에 한 번 사로잡히면 오래가잖아.
오히려 움직임을 해주면 아무 문제가 아닌데, 밤에 사로잡히니까.
일어나서 딴 짓 하면 되지.
어디 빠지지 않음이 깨어있음이에요.
이렇게 했을 때 생활에서 변화가 어떻게 되냐고 내가 물었을 때,
그거는 어디에 빠져있지 않음, 생각에 빠져있지 않음.
빠져있다가도 알아차리고 나옴, 그러면서 편안해지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