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15광복 후 북한 공산치하에서는 또 무서운 박해가 일어났다. 소련군에 의해 처음 수난을 당한 곳은 회령(會寧)본당이었다. 파렌코프(W. Farrenopf, 朴) 신부를 연행해 간 소련군은 8월 23일 아무런 이유없이 그를 총살했다. 그 뒤 소련군과 북한당국은 모든 교회에 노골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5월8일 밤부터 덕원(德源)교구의 사우어(Sauer, 辛) 주교와 수도원장 로트(Roth, 洪) 신부 등 4명의 성직자를 잡아서 평양으로 이송하고, 이틀 후인 5월 10일 밤에는 신학교 교장 로머(Romer, 盧) 신부를 비롯하여 독일인 신부 및 수도자 전원과 한국인 신부 4명(김치호(金致鎬), 김종수(金宗洙), 김이식(金利植), 권병권(崔炳權))을 체포하여 평양 정치보위부로 보내어 가두는 한편 신학생과 수사들을 내쫒아 수도원과 신학교를 몰수하였다. 또한 원산(元山) 성당의 구대준(具大俊) 신부와 원산수녀원, 신고산(新高山) 수녀원의 외국인 수녀 15명을 잡아 가두고 수녀원을 병원으로 만들었다. 5월 15일에는 함흥(咸興)수녀원의 독일인 수녀 5명도 체포하였다.
이렇게 박해가 날로 심해지자 평양교구의 홍용호(洪龍浩) 주교는 남아있는 북한교구의 총책임자의 입장에서 김일성에게 항의를 제출하였는데, 그들은 도리어 1949년 5월 14일 홍 주교를 체포하고 잇따라 김필현(金必現), 최항준(崔恒俊) 신부도 잡아갔다. 그 해 12월부터는 박해가 더욱 심하여져 평양성당의 박용옥(朴-玉) 신부 등 4명의 성직자와 강계(江界) 성당의 석원섭(石元燮) 신부, 신의주(新義州) 성당의 홍건항(洪建恒) 신부, 영유(永柔) 성당의 홍도근(洪道根) 신부 등을 체포하고 성당을 폐쇄시켰다. 그래서 3,000여의 교우들이 남아 있던 평양에는 신부 한 명만이 있게 되었다. 정치 보위부에 잡혀간 신부 · 수사 · 수녀 들은 간첩이란 죄목으로 고문을 받은 후 강계와 만포진에 나누어 수용되었으며 일반 신자들도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잡아 가두고 가산을 몰수당하게 되자 생지옥을 탈출하여 필사적으로 월남(越南)의 길을 찾게 되었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 북한의 교회들은 더욱 심한 박해를 받았다. 6.25동란 전야(前夜)인 24일 밤, 평양교구의 조인국(趙仁國) 신부 등 5명의 성직자와 그밖에 7명의 신부들이 체포되었다. 이처럼 북한에 남아있던 성직자는 거의 붙잡혀 갔으며, 남한에 침입한 공산군은 6월 27일 강원도 소양(昭陽)성당에서 아일랜드인 콜리어(Collier) 신부를 총살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직자와 수녀들을 살해 또는 납치하고 성당을 강점, 그들의 침략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 남북한을 통해서 그들에게 체포 학살된 성직자와 수녀, 신학생의 수는 150여명에 달한다.
※ 출처 : 가톨릭대사전
첫댓글 좋은 자료 잘 보고있습니다
자료를 퍼 나르다 보니 저 또한 공부가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