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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 성도들은 왜 아이를 많이 낳을까?
임경근 목사(다우리 교회)
1. 들어가며
필자는 앞에 쓴 세 편의 글에서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교회의 문제가 복음주의가 가진 태생적인 약점에서 기인했음을 논증했다. 그 대안으로 개혁신앙(reformed faith)을 제시하며 그 실체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복음주의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개혁신앙이다. 그렇지만 개혁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하더라도 삶으로 구체화 하는데 매우 힘들다. 더구나 개혁신앙의 모델이 없는 탓으로 대중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앞으로 전개될 글에서는 개혁신앙이 한국 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점들을 구체적으로 찾아 살펴보려 한다. 우리 삶의 다양한 주제들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삶의 현장인 가정에 대해 개혁신앙은 어떤 모습을 제공하는가? 자녀 출산에 대해 개혁신앙은 어떤 해답을 제시하는가? 가정에서는 자녀의 신앙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정예배가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가? 개혁신앙적인 관점에서 성공이 무엇이며 과외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경쟁에 대한 개혁신앙적인 관점은 무엇인가? 예배, 설교, 주일성수, 음악, 경제, 정치, 문화 등등 수많은 주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교회 전통과 기독교 문화가 전해주는 것을 따라 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지 개혁신앙적인 잣대로 살펴 볼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자녀 출산에 대해 살펴 보려한다.
2. 한국, 저 출산의 현황과 문제
대한민국은 현재 세계 최 저 출산국 중 하나이다. 2005년에 가임여성(15-49세) 일인당 1.08명이었다.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70년(4.53명) 이후 가장 낮고, 1.16명이었던 2004년보다 0,08명 줄어든 수치이다. 이것은 홍콩(2000-2004년 기준 평균 0,95명)을 제외하면 세계 최저이다. 현재 인구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출산율이 적어도 2.1명은 되어야 하지만, 국내 출산율은 급격하게 감소하게 있다. 이러한 저 출산은 경제적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저 출산에 따른 인구의 고령화 속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은 2000년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이 7% 이상인 ‘고령화 사회’에 도달했다. 2018년에는 ‘고령사회’(노인 인구 비 14%이상)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한다.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로 넘어가는 데 걸리는 기간이 18년이어서 일본이 24년, 독일이 40년 걸린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빨리 진행되고 있다.
의학의 발달로 기대수명은 지난 1970년 61.9세에서 2006년 79.2세로 17.3세나 늘어났다. 출생률이 떨어지는 반면 수명은 늘어나면서 인구 구성은 점점 노령화되고 있다. 15세 미만 인구의 비중은 1955년 41.2%에서 2007년 18.0%로 큰 폭으로 감소했고, 65세 이상 인구는 3.3%에서 9.9%로 3배나 늘었다.
유명한 기업연구소들이 앞 다투어 저 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생산 인구의 감소로 인한 성장 잠재력의 저하와 국민연금의 부실화 위험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포기하고 다양한 출산장려책을 내 놓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산아제한 정책만큼 출산장려정택이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정책연구팀의 이삼식 팀장은 “지금처럼 청년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선 20대 부부가 쉽게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며 특단의 대책이 없을 경우 출산율이 1명 밑으로 내려앉을 가능성을 내다 봤다.
3. 골동품이 된 산아제한 정책
한국은 전쟁으로 궁핍했던 시절 빈곤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경제성장을 향해 주력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아이가 많으면 가난해 진다는 자각에서 국민 개인 스스로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으로 매우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1년 3월 이른바 산아제한의 기치를 들고 가족계획협회를 창립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가족계획은 ‘사회를 보다 명랑하게 하고 개인의 생활도 질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긴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일인당 출생률이 6/1명이던 60년대는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낳고 35살 이전에 단산하자는 ‘3.3.35’운동을 했다. 70년대는 평균 출생률이 4.53명이었는데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80년대는 평균 출생률이 2.8명이었는데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구호를 내 세웠다. 90년대는 출생률이 1.59명으로 낮아 졌고, 2005년에는 1.08명으로 세계 최저 출산국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아제한 정책은 정관, 난관수술과 더불어 낙태를 통해서 인구정책을 의도한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이다. 한 해에 150만이 이법의 대상이 되었다. 30년을 넘게 진행해왔으니 엄청난 영향이다. 경제적인 논리로 국가적으로 출산률을 조정해야 했던 한국은 이제 40년이 지나 심각한 출산 기피 현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피임약을 나눠주며 예비군 훈련장에서 불임수술을 부추기던 정부가 이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경제적인 이유로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치고 있다. 산아제한 정책은 이제 골동품이 되고 말았다.
4.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반된 입장
’60-70년대 산아제한 정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나타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의 산아제한정책에 대한 관점과 행동의 차이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미국의 여러 주를 포함해 일본, 인도, 중국 등이 서둘러 가족계획을 정부 사업으로 추진해 나갔다. 로마 천주교는 일찍이 산아제한 정책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것이기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1958년 9월 15일 바티칸 교황청은 인공수정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선언했다. 잉태를 직접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인위적인 피임방법을 잘못된 것이라고 못 박았다.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며 인간이 지닌 생식 기능의 목적은 생명의 출산이라는 입장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1968년 7월 31일에는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가 산아조절에 관한 회칙인 [인간 생명]을 발표했다. 산아제한은 인간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1967년 3월 26일에는 개발도상국가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민족들의 발전에 관하여]라는 회칙을 발표하고 인류 전체가 공동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약소국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할 것이라고 그 방법을 제시했다. 1966년 정부가 가족계획 연간 목표량을 정하여 산아제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심지어 임신 7개월까지로 인공유산시술 가능 시기를 늘려 법으로 보장해 놓기까지 하였다. 바로 이 시기 새마을운동과 산아제한 정책이 함께 어우러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담아낸 영화가 2006년 『잘 살아보세』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김정은이가 열연한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이 『Mission Sex Control』인데 한글 제목보다 오히려 내용을 더 잘 드러낸다.
로마 천주교의 입장은 인구증가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자연법과 인간의 품위에 적합한 방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주교는 다섯 가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 결혼 적령의 연장이다. 가족 부양의 능력이 갖추어질 때까지 결혼 연령을 늦출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둘째, 축첩 폐습을 단호히 시정하는 것이다. 셋째, 금욕이다. 넷째, 해외 이민이다. 다섯째, 외국 원조의 요청 및 그 실효적인 사용이다. 1974년 11월 18일에는 교황청이 신앙 교리성에서 [인공유산 반대 선언문]을 발표하였고 지금까지 이 부분에서는 초지일관이다.
그렇지만 한국 개신교회는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에 반대 하기는 커녕 지지했다. 1971년 당시 KNCC(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총무인 김관식 목사가 가족계획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지지하는 발표를 했다. 교회는 인류가 당면한 모든 위험과 다가오는 불행에 대한 의무를 지녔고, 인류에게 자유 행복을 실현할 책임이 있다고 밝히며, 이러한 노력의 하나로 가족계획 사업을 편다고 주장했다. 그 구체적인 계획으로 ‘인류 미래와 책임 있는 부모 노릇’이라는 입장에서 교육과 계몽, 병원에 피임도구를 공급하는 것 등과 더불어 여전도사 1만 명에게 가족계획의 필요성과 방법을 교육한다는 것 등이었다. ‘가족계획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인간의 반역행위’라고 반대하고 있는 일부 목사를 설득하고, 앞으로 로마 천주교와의 연합 전선도 펼 예정이라고 하였다. 연세대학교 김찬국 교수는 성경에서 가족계획의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창세기 1장 28절의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인구 조절 문제가 당면 과제인 오늘에 문자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책임 있는 결혼 및 부부생활과 자녀 교육을 성실하게 하는 부모권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땅을 정복하라’는 뜻도 인간의 무책임과 방심, 무계획성 때문에 올지도 모를 불행과 위험을 정복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보수진영 개신교에서는 산아제한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나 의지 표명이 있었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개신교 일부가 적극적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끌어안자 결국 로마 천주교가 산아제한 반대 운동의 주도권을 쥐고 나갔다.
천주교는 이러한 한국 정부의 가족계획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 때문에 신도수의 감소를 감내해야 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이 가족계획을 분명하게 반대하는 로마 천주교의 신앙을 선택하는 데 양심의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교세 확장에 많은 장애물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천주교는 1975년에 ‘한국 행복한 가정 운동’을 창립하고 전국적으로 자연적 가족계획 방법을 홍보했다. 이 운동은 피임과 낙태가 생명권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가정 운동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생각해 18개 항목의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해 실행했고, 2000년도에 이 운동은 25주년을 맞아 지속적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다.
5. 복음주의 개신교의 문제는?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신앙적으로도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국가와 사회와 이웃의 안녕과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성경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더구나 교회와 사회를 전혀 다른 세계인 이원론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한 성도들은 국가에서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복음을 위하여 국가와 사회에 반대하는 인상을 줄 필요가 없었다. 자녀를 많이 낳아 국가와 사회에 해를 끼치고 피해를 준다면 복음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이다. 그 결과 산아제한정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개신교도들은 산아제한에 적극 동참했고 이 점에 있어 불신자들과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산아제한 정책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성경은 산아제한을 지지하고 있을까? 성경에서는 출산을 제한하는 것이 옳다는 구절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출산을 적극 권장한다. 자녀는 하나님 주시는 복이며 상급이라고 했다(시 127 3-5).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자 남아의 출산을 억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도 이뤄지지 않자, 태어나면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자녀는 믿는 자에게 주시는 기업이며 유산이고, 상급이다. 자녀가 많은 자는 복 받은 자이다. 자녀를 많이 둔 가정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복은 다름 아닌 자녀를 낳아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복이라는 생각을 액면 그대로 믿는 한국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복음주의 성도들은 ’6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만 해도 이 성경구절을 그대로 아멘하며 믿지 않았다. 아니 노골적으로 그렇게 믿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성경 구시대에는 복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그런가? 산아제한정책을 펼칠 때 동네 게시판에 붙었던 포스트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로 꽉 차 더 이상 발 디딜 장소도 없는 지구에서 사람들이 떨어지고 있는 그림이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무시한 그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공공의 적이구나!’라고 세뇌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앙이 좋은 성도들도 산아제한 정책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따랐고 필요한 경우 임신중절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앙과 출산은 각각 다른 세계로 인식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개신교가 산아제한 정책에 대한 자세에서 로마 천주교보다 못하다. 복음주의 교회는 이 영역에서 그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개혁신앙은 이 점에서 이미 분명한 정리를 하고 있다. 개혁신앙은 언약의 자손을 중요하게 여기며 자녀 출산을 적극 권장해 왔다. 이제 개혁신앙의 진원지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모습을 보며 그 모델을 찾아보자.
6. 개혁교회 성도들은 왜 자녀를 많이 낳을까?
개혁신앙을 가진 자들은 출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개혁신앙을 가진 자로 살려면 출산에 대해 어떤 세계관을 가져야 할까? 필자가 7년 3개월 동안 유학 시절 경험했던 개혁교회 성도들의 생각과 구체적인 삶에 대해 소개하며 생각을 정리해 본다.
1) 기본이 자녀 7명
네덜란드 개혁교회 성도들은 자녀를 많이 낳기로 유명하다. 네덜란드 유학 시절(1994-2001) 모셨던 신학교 교수님들 대부분은 자녀가 일곱 명이었다. 교회 목사들도 자녀가 일곱 명인 경우가 많았는데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완전수인 ‘7’이 좋아서 일곱 명의 아이를 낳는다고 농담 삼아 말하고 했다. 필자와 가까이 지냈던 한 네덜란드 친구는 자녀를 여덟 명이나 낳았다. 주일날 교회에 가면 가족끼리 모여 앉는데 한국 사람의 눈에는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다. 여덟 명의 아이를 둔 가정은 맨 가운데 엄마와 아버지가 앉고 그 주변으로 아이들 네 명씩 앉는다. 정말 대단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네덜란드에서 낳은 첫 딸 돌 때 담임 목사 가족이 총 출동해 축하해 주었다. 목사님 부부와 자녀 일곱 명이 다 왔다. 그 때가 1996년이었는데 최근(2006년) 찍은 가족사진을 보면 엄청난 대 가족이다. 일곱 명 중 4명이 결혼하여 손자 손녀를 낳아 무려 스물 네 명의 대 가족으로 성장했다. 만약 이 가정의 자녀들이 부모만큼 아이를 낳을 경우 모두 49명의 손자, 손녀들이 태어나게 된다. 이 목사 부부는 자신의 자녀 7명에 그들의 배우자 7명 그리고 손자들 49명을 합쳐 자그마치 65명의 대 식구가 된다. 4세대 째 또 7명의 자녀를 낳는다고 생각하면 결혼한 배우자를 합쳐 총 392명이 된다. 한 가족이 한 교회를 만들어도 될 정도가 된다. 이를 기하급수적 성장이라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방법이 자녀 출산을 통한 것이라는 말이 원시적인가?
2) 아이 낳는 일은 부자 되는 길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네덜란드 목사님과 사모님이 찾아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그 때 목사님이 우리에게 ‘부~자 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난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아이 낳는 일이 부자 되는 일과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필자는 나중에서야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이기 때문에 삶이 풍요로워 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명의 자녀를 더 주셔서 지금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언젠가 현대중공업을 견학한 적이 있다. 일 년에 배를 52척 가량 만드는데 대략 한 척을 만드는데 10달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 곳 연구소에서 일하는 집사님에게 배 한척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더니 평균 3,500억 정도 된다고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열 달 걸려 만들어 지는 것이 사람이었다. 마침 가슴에 안고 있던 어린 셋째를 보이면서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님, 제 막내 예찬이가 열 달 걸려 만들어 졌는데 3,500억 원 될까요?” 그 집사는 씽긋 웃으며 대답했다. “목사님! 예찬이를 3,500억 원에 바꾸시겠습니까?” 그렇다! 난 돈 3,500억 원과 예찬이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3,500억 원이 도대체 얼마나 큰 돈 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보배 예찬이와 바꿀 수 없다.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다. 생명은 돈으로 계산 될 수 없다(countless). 그렇다면 예찬이는 3,500억 원보다 더 비싼 존재가 아닌가? 그럼 필자는 아이가 넷이니 재산 규모는 1조 4000억 원이 훨씬 넘는 셈이다. 필자는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부자이다.
3) 한국은 예수 믿는 신자들도 자녀를 적게 낳아요?
네덜란드 교회 사모님은 언어도 서툴고 문화도 낯설어하는 아내를 돕겠다고 자청하셨다. 첫 아이가 태어 난 후부터 2년 정도 사모님께서 매 주 우리 집을 방문해 자녀양육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도와 주셨다. 필자와 아내는 자녀 일곱을 반듯하게 키우신 자녀출산과 양육 전문가로부터 자녀 양육에 대한 실제적인 교육을 받는 특권을 누렸다. 한 번은 아내와 필자가 사모님과 출산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모님은 “한국의 출산 상황은 어떠냐?”고 물었다. “한국은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다. 보통 2명 정도를 낳고 요즘은 자녀가 한 명인 가정도 많다”고 말했다. 사모님은 다시 “예수 믿는 신자들은 자녀를 얼마나 낳느냐”고 물었다. 자녀의 수에 있어서는 믿는 가정과 믿지 않는 가정이 차이가 없다고 했더니 사모님께서는 놀라시며 “어떻게 예수 믿는 가정이 예수 믿지 않는 가정과 같을 수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지금까지 예수 믿는다는 것과 자녀수를 연결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약간 당황스러웠으나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이유로 반론을 시도했다. ‘교육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자녀를 많이 낳을 수가 없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는 정부가 매 달 자녀 양육비를 주지만 한국은 그런 지원이 없기 때문에 자녀를 많이 낳아 기르기가 힘들다’는 등의 얘기였다. 그때 사모님이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셨다. “네덜란드 성도들이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정부에서 양육비를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양육비를 아무리 많이 주어도 믿지 않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녀를 낳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사모님의 그 말씀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출산은 경제와 관련된 것이지 신앙과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배우지도 않았다. 순간 한국에서 세뇌된 자녀 출산에 관한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이를 많이 낳는 나라는 후진국이고 잘 사는 선진국은 아이를 적게 낳는다. 아이를 많이 낳는 사람은 반사회적이며 미개하다고 배웠다. 동네 벽보에는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아 결국 주렁주렁 매달린 사람들이 저 멀리 지구 아래로 떨어져 나가는 그림이 붙어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산아제한을 세뇌 당했다.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이 애국이라고 배웠다. 신앙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알고 있다.
4) 언약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유아세례를 매 주일 실시한다. 주일 오전예배이던지 오후예배이던지 상관없다. 부모가 원하는 예배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 꼭 담임목사가 하지 않아도 된다. 담임목사가 휴가 중이면 당회가 허락한 목사가 집례를 하기도 한다. 유아세례는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지 목사 개인의 권위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배 중간에 유아세례식이 있는, 교회 맨 앞쪽에 아기를 안고 부모가 앉고 주변으로 직계 형제자매들이 앉고, 그 뒤나 혹은 옆에 친척들이 앉는다. 유아세례식에는 반드시 유아세례의 의미를 담은 예식서를 읽는다. A4지 한 장 반 정도의 분량이어서 짧지 않은 분량이지만 예식 때마다 매주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자칫 유아세례가 로마 천주교처럼 미신적이거나 아이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으로 착각할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유아세례는 믿는 신자인 부모에게 언약의 복을 자녀에게도 주셨다는 믿음에서 주는 것인데, 마치 아이의 구원도 유아세례가 보장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혹시 이 부분에서 한국 성도들은 상당히 오해를 할 위험도 없지 않아 있다. 왜냐하면 유아세례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 예식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자녀들의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복을 부모와 동일하게 물려받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자녀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주시며, 불순종할 때 벌을 내리신다. 이와 같이 그 언약은 믿는자의 자녀에게도 동일하게 효력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무슨 복이 되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것이야 말로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엄청난 위로와 복이 된다.
예식문을 읽고 부모에게 세 가지 서약을 받는다.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할 것을 서약한다. 온 회중도 공동체에게 허락하신 언약의 자녀를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양육할 것을 서약한다. 서약이 끝나면 부모가 아이를 안고 세례 물이 담긴 탁자 앞으로 나아간다. 목사로 설교단에서 내려와 아이를 안은 부모 앞으로 온다. 자녀들이 있으면 세례단 옆으로 빙 둘러 선다. 온 교회 교인들이 볼 수 있도록 목사는 물을 손으로서 아이의 머리에 뿌리면서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000에게 세례를 주노라’라고 선포한다. 이 시간은 기도의 순간이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지 않는다. 모두 눈을 뜨고 아이가 언약의 자손임을 표시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바라본다. 정말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모두들 기쁘고 흐뭇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다. 그렇게 유아세례 예식이 끝이 난다. 남은 예배가 그대로 진행되고 예배를 모두 마친 후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와 가족에게 축하하는 순서가 있다. 모든 교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언약의 자녀가 태어나 교회의 유아세례 교인이 된 것을 축하하며 기뻐한다. 필자의 두 자녀도 이렇게 축하를 받으며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정말 행복하고 복된 순간이었음을 잊지 못한다.
왜 개혁교회는 이렇게 유아세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개혁신앙은 언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고’, ‘네 자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언약이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자녀를 통해 하나님 역사를 이루신다. 이것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녀 출산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언약 신앙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녀의 숫자가 적어도 전혀 문제가 아니다. 이런 복음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믿는 자의 자녀를 통한 복은 간과된다.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의 자녀들에 대한 관심은 없다. 오직 다른 사람에 대한 전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에만 관심한다. 그러나 개혁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출산의 명령과 언약 신앙으로 인해 자녀를 많이 낳는다. 그래서 개혁교회 성도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7. 저 출산은 세계관의 문제
과거 가난한 시절 경제 논리를 제시하는 정부에 호응하여 개신교회는 산아제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출산에 대해서 성경이 무어라고 말하는지 특별히 설교하지도 않았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최초의 복이며 명령이라는 사실을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 믿고 구원 얻어 세상적으로 복 받고 천국 가는 것이면 충분했다. 복음주의가 전도에 열심이지만, 정말 생명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복음주의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생명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어쩌면 교인 숫자 증식을 통한 교회 세력 넓히기 경쟁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정말 생명에 관심이 있었다면 산아제한 운동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꼼꼼히 따져 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산아제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실천하는 의무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피안적인 천국에 대한 소망에만 집착하고 이 세상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짧았던 셈이다. 이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혁신앙적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지 않고 수평적이거나, 수직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이원론적이거나 혹은 혼합적인 모습으로 우리의 신앙적인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런 삶의 양식에서는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어렵다. 출산 문제가 바로 이 부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8. 돈 있으면 아이를 많이 낳을까?
지금 민간단체와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버리고 ‘출산장려’ 정책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 고령사회가 오게 되면 노인을 부양할 젊은이가 적어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다. 아이를 적게 낳아야 하는 이유도 경제 논리였고, 많이 낳아야 하는 이유도 여전히 경제 논리이다. 과거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때 산아제한 정책은 거의 모든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많이 부유해진 지금 경제 논리로 출산을 장려한다고 사람들이 따를까? 보육시설을 늘리고 양육비를 지원하고 또 그 외 많은 시도들을 한다면 조금은 나아지겠지만 근본적으로 자녀를 많이 낳게 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앞서간 선진국들이 이 점에서 실패하고 있는데서 그 미래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복지국가로 앞서 나간 소위 선진국들의 출생률을 보면 대한민국이 추진하려는 많은 정책들의 한계를 미리 볼 수 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예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제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사람들은 더 편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할 것이다. 더구나 여성들의 권익, 복지, 건강과 자아실현을 생각하면 출산장려는 권장할 만한 사안이 결코 아니다.
9.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유일한 해결책
자녀의 출산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복이다(창 1:27). 동시에 자녀의 출산은 명령이기도 하다(창 1:27). 이것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이 당장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고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하나님의 복이며 명령임을 믿고 순종하는 신앙의 삶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한국 교회가 누리게 될 것이다.
1983년에 김옥배라는 한국여자신학교 교장이 쓴 [인구폭발과 산아제한]이라는 글에서 인구폭발의 원인을 범죄한 인간들의 무절제한 출산으로 돌리고 있다. 인구 억제를 위해서는 전 국민이 가정에서부터 정화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보면서 자녀들을 적당히 낳은 후에 절제 생활로 가족계획을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구폭발이라는 가상적인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산아제한 정책을 지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데로 아이를 많이 낳으면 인구가 폭발하게 되어 지구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과 우리의 일을 착각한 결과이다. 지구가 인구 증가로 폭발할 것인지는 하나님의 책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면 문제가 생기니 불순종하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한 월권에 지나지 않는다.
개혁신앙은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시대를 분별하며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도록 가르친다. 그 첫 번째 구체적인 예는 언약의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서구 교회는 자녀 출산에서 이슬람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은 다산으로 그 세력을 기하급수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기독교는 점점 세속화 되면서 언약의 자손들을 적게 낳고 있다. 한국은 이 점에서 이미 실패하고 있다. 이제 개혁신앙은 언약의 자손을 많이 낳도록 권고하고 홍보해야 할 때이다. 언약의 자손, 곧 거룩한 자손들을 많이 낳을 때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 희망이 있을 것이다. 당장 교인들이 자녀를 적게 낳음으로 주일학교 학생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앞으로 교회의 미래가 밝지 않다. 이제 전도도 잘 되지 않는다. 교회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복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는 것이다.
10. 나가며
이글을 읽는 개혁신앙인들은 자녀를 많이 낳기를 바란다. 언약의 거룩한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참으로 귀한 사역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더 많이 둘 수도 있었지만, 필자도 산아제한 정책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세대라 쉽지 않았다. 생각 구석구석에 자녀는 귀찮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세상적인 생각을 극복해야 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도전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이를 적게 낳겠지만, 개혁신앙을 가진 우리는 자녀를 많이 낳아야 된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자녀들이 교회의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