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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란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Shintoism) 사원(寺院)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을 말합니다.1)
일본의 신도는 그들의 고유 종교요, 일본 국수사상의 핵심입니다.
일제는 한일합방 직후부터 한국 내에 신궁과 신사의 설립을 추진하고
한국인들의 신사참배실시를 계획하는 등
한국의 민족혼 말살과 일본화 정책의 주요 방편으로 신사참배 책략을 수용해 왔고,
식민정치의 막바지로 치닫는 30년대부터는 구체적이고 강압적으로 나타났습니다.2)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력히 추진하자,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던 종교단체들도
일제에 굴복하기 시작했습니다.3)
평양에서 먼저 물의를 빚기 시작한 신사참배의 문제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하거나 옥고를 치렀고 또 일부 교계지도자들은 이를 받아들이며 교권을 유지해 나갔습니다.4)
1937년 일본은 모든 조선의 기독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1938년, 일본은 ‘교회는 예배를 드리기 전
신사 참배를 먼저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즉 예배 시작 전에 일본신에게 먼저 참배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5)
주기철 목사와 같이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고
자결로서 순교한 성직자도 없지 않았지만
일제시대 한국 기독교(천주교)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 대신 일본의 신사에 참배하고
이를 권유하면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찬양하고 앞장섰습니다.6)
1938년 2월, 평북노회는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 의식’임을 인정한다는
결의를 했고, 4월에는 감리교 유형기 목사를 비롯한 각 교단 대표들이 모여
신사참배에 동참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6월에는 전북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 9월 장로교는,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가 아니며
일본의 신민(臣民)된 의무로 행하는 의식일 뿐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또한 1938년 제 27회 장로교 총회 안건으로 신사참배 안이 채택되었는데,
여기서 총회장 목사는 일본 헌병과 경찰들 앞에서 ‘신사참배는 종교 의식이 아닌
국민의례이므로 교회가 참여해도 좋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이후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이 신사참배에 결의했습니다.
1939년 열린 제28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을
결성하고 일본의 광적인 침탈전쟁을 위해 기도운동과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7)
장로회는 1937~39년 전승축하회 5백94회,무운장구기도회 9천53회,
국방헌금 1백58만여원,시국강연 1천3백여회 등을 열어 일본을 도왔고,
감리회도 교회 종 헌납과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 개소 등으로 일제를 지원했습니다.8)
더욱 충격적인 것은 당시 목사님들이 일본 중들이 행하던 불교 세례
즉, 불교에서 물을 뿌려 세례를 주는‘미소기 바라이’라는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미소기 바라이는 강과 바다 등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졌는데,
한국 교회 목사들은 일본 불교 중들에 의해 행해진 이 예식을 단체로 행했습니다.9)
기독교 기관도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한국 비정부기구(NGO)의 뿌리이자 산파인 YMCA는 <청년>에 '황국시민의 선서'를 냈고 신흥우 윤치호 등 YMCA 지도자가 친일 행각을 벌였습니다.10)
평양 신학교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1938년에 폐교하자
서울에서 1939년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김재준, 송창근 등이 주축이 되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자유주의자거나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선 신학교는 "선교사들의 지배와 보수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을
설립의의로 삼았습니다.11)
또한 평양에서는 총회 직영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39년 11월에 평야에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학교는 채필근이 교장으로 부임하여 일제 당국의 인가를 받아
교육하였으나 일본화의 길을 갔습니다.12)
위의 두 신학교의 공통된 점은 신사참배의 수용과 자유주의 신학경험이란 점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수난 당하는 사람들이 감옥으로, 지하로,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귀한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공동현상을 자유주의자들이 메우게 되었습니다.13)
한국 교회는 대한민국이 건국 근거로 삼는 3·1운동을 주도했으면서도
하나님과 민족 앞에 떳떳하지 못하고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신사참배의 죄'를 짊어지고 있습니다.14)
게다가 해방 이후 출옥 성도들이 친일 부역한 죄를 물어 회개를 선포했을 때
한국 교회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사회에서 반민특위가 기독교 친일파를 잡아들였을 때
'기독교 정권'의 수장 이승만 대통령이 방해했습니다.15)
한국 교회가 회개를 거부한 첫 기회는 1945년 8월 해방 직후였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옥에 갇혔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교인 20여 명은 집으로 가지 않고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2개월간 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한 뒤,
1945년 9월20일 '한국교회 재건 기본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목사 및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목사와 장로가 휴직 중에는 집사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한(全韓)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하게 할 것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등입니다.16)
이 재건 원칙은 1945년 해 11월14일 열린 평북목사수양대회에서
평북6노회 교역자 200명이 참여한 가운데 다시 발표되었고,
12월 소집된 북한5도 연합노회 결의에도 포함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부흥회에서 설교 간증과 함께 재건 원칙이 발표되었지만,
당시 교회 대부분이 이 원칙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17)
오히려 교권을 잡은 목사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8년에 열린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선포한
홍택기 목사의 반발입니다.
홍 목사 등 친일파 목사들은 재건 원칙을 주장한 목사들을 향해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했거나
혹은 은퇴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반박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지
누구의 강요에 의해 결정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18)
결국 교권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출옥 교인들은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며 별도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친일에 대해 회개하지 않은 것이 결국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된 셈입니다.19)
회개 대신 장로교 총회는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슬그머니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하는 성명을 전국 교회에 알렸을 뿐입니다.
'취소 성명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는 진실한 참회의 모습이 없고,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릅니다.
취소 성명서에는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성명에 대하여
일제 강압에 못 이긴 결정이었으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 계명을 범한 것임을 자각하고…
본 총회는 이를 취소하고 전국 교회 앞에 성명함'이라고 쓰여 있습니다.20)
신사참배에 대한 개인적인 참회와 사죄는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참회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21)
분열의 씨앗은 곧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양분화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50년 4월 대구 제일 교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46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자행한 목사들은 ‘우리도 양떼를 흩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수고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고 자신들의 죄를 정당화 했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들은 ‘너희는 회개해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한국 신학 대학의 창립자였던 김재준 박사가 ‘자유주의다, 아니다’하는 문제
때문에 서로 시비가 붙었고, 급기야 서로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해
강단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은 성찬상을 뒤집어엎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을 벌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후 약 2개월 뒤, 6.25전쟁이 터졌습니다.22)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의 잘못을 언제 총회적으로 고백하고 사죄할 것인가.
이는 장로교총회만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모든 교단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장로교총회는 한국교회의 다수를 점하는 대표성을 띠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23)
1)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php?id=501169
2)크로스맵, http://search.crossmap.co.kr/kr/dict_search.html?no=8529
3)http://cyberspacei.com/jesusi/inlight/religion/japan/shinsa.htm
4)크로스맵, http://search.crossmap.co.kr/kr/dict_search.html?no=8529
5)정바울, 한국 기독교 치욕의 죄악사, 크리스찬트리뷴, http://www.kctn.net/cm/Ctn/Ctn_view.asp?N_Idx=2
6)김삼웅, 사건으로 본 한국의 종교, 종교신문, 2004년 9월,
http://www.jksm.com/Service4/ShellView.asp?TreeID=502&dataID=200409131617000002
7)정바울, 한국 기독교 치욕의 죄악사, 크리스찬트리뷴, http://www.kctn.net/cm/Ctn/Ctn_view.asp?N_Idx=2
8)전재우, 희년잔치와 신사참배, 그리고 해방, [한국기독교사],
http://www.kmib.co.kr/missiontoday/c_history/new/newtxt27.html
9)정바울, 한국 기독교 치욕의 죄악사, 크리스찬트리뷴, http://www.kctn.net/cm/Ctn/Ctn_view.asp?N_Idx=2
10)주재일, 멀지만 가야할 길 '친일 청산', 뉴스앤조이, 2005년
11)주재용 엮음,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서울: 풍만출판사, 1986, pp.153 - 154, 271f.
12)김영재,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신앙], 신학지남, 51권 4호, 통권 203호., p. 142.
13)교리사-신사참배, http://myhome.naver.com/bominkim/tho21.htm
14)주재일,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회개했다고', 뉴스앤조이[158호 기획]
15)주재일, 멀지만 가야할 길 '친일 청산', 뉴스앤조이, 2005년
16)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펴냄
17)김승태 연구실장, '목사가 시행하려고 했지만 교인들이 말린 경우가 없지 않지만, 당시 교회 대부분이 이 원칙을 시행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신사참배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8)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최덕성 [한국 교회의 친일파 전통]
19)주재일,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회개했다고', 뉴스앤조이[158호 기획]
20)주재일, 멀지만 가야할 길 '친일 청산', 뉴스앤조이, 2005년
21)하남종, 한국교회 신사참배 공식사과, 기독신문/말길, 1998년
22)정바울, 한국 기독교 치욕의 죄악사, 크리스찬트리뷴,
http://www.kctn.net/cm/Ctn/Ctn_view.asp?N_Idx=2
23)하남종, 한국교회 신사참배 공식사과, 기독신문/말길,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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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의 한국교회는 한국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는데도 전쟁 후 회개치 않고 급속히 타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이 신사참배로 인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이 반민족행위를 숨기고 자신들의 영위를 위해 한국교인들과 함께 반민족행위를 더 가속화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 누가 있어서 한국의 신사참배와 반민족행위를 부정하랴.
원인이 있다면 결과가 있다.
그 핏값을 아직도 인정치 않으려 하는가?
아니면 못하는가?
그도 아니면 회개치 못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