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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미리암에 관한 이야기
크브챠 플랜의 탄생
나의 처 미리암에 대해서 언급하여 두고 싶다. 그녀가 보그슬라프에에서 출생한 우크라이나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도 설명했다. 그녀는 밝고 건강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집에는 두 명의 자매와 세 명의 남자 형제가 있었다. 부모님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남들에게 친절하고 활달했다. 어쩌다가 집에 거지가 들기라도 하면, 꼭 돈이나 먹을 것들을 주었고, 빈 푸대에는 러드용 사탕무우 뿌리나 감자를 가득히 넣어 주었다. 조그마한 집은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까운 마을마다 친척이 있어서, 시장이 서는 날이 되면 모두가 그녀의 집으로 모여 들었다. 땅딸막하고도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주전자에서는 하루내내 담겨진 물이 끓어올랐고, 테이블 위에는 늘 차종기나 알과자가 놓여 있었다. 겨울철이나 평소에도 일기가 고르지 못한 날이면, 친척들은 마치 제집처럼 마음놓고 하룻밤을 묵어가곤 했다. 부모님은 어느때나 친척들이 쉽고 편하게 묵을 수 있도록 몇 차례나 집을 뜯어 고쳤다.
일 년에 두 번, 유월절과 오순절을 맞이하기에 앞서 미리암으 부모님은 자신의 자녀들은 물론하고, 조카나, 사촌형제들에게도 옷가지나 구두를 사 주었다. 때때로 이웃마을에 제사라도 있을 때에는 집안 식구들 모두가 함께 움직였다. 또한 집안에서 결혼식이라도 치를 날에는 잔치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계속되었다. 가난한 사람의 결혼식에 가서 신랑이나 신부에게 선물을 하는 것도 미리암의 부모님이 지닌 미덕이었다.
일 잘하는 처녀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착하고 선한 유대아인이 되도록 교육되어, 제일 큰 형은 「 예시바 (유대아인 학교) 」에 들어갔다. 축제날은 언제나 유쾌하게 즐겼다. 사바스 날 밤이면 가족 모두가 한 마음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노래를 불렀고, 노래가 끝나면 언제나 춤을 추었다. 유월절이 되기 바로 전날, 밤이 깊어지면 모든 유대아인은 효소가 들어있지 않은 빵을 구하려고 빵가게로 갔지만, 미리암의 어머니는 그날 먹을 것을 하루 전에 만들었다. 하루 전날 빵가게가 쉬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자신이 만든 빵을 이웃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소동이 끝나고도 미리암과 그녀의 자매들은 일년 내내 즐거운 마음으로 축제날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이 이야기는 모두가 미리암이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옆에서 들어 알게 된 것이다.
미리암의 가족은 모두가 훌륭한 자이오니스트들이었으며, 미리암도 어릴 때부터 팔레스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러한 탓인지 그녀도 언젠가는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서 살리라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 팔레스타인으로 가게 되면, 넌 거기서 무얼 할래 ? 』
하고 아버지가 물으면,
『 농원에서 일 할래요. 』
라고 곧잘 대답했다.
『 팔레스타인에는 너와 같은 여자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더라도 ? 』
팔레스타인의 농원에서는 여자가 일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그녀를 가볍게 놀려대며 좋아라 했다. 그렇지만 미리암은 주먹을 곱아쥐고 분명하게 소리쳤다.
『 두고 보시라구요 ! 언젠가는 가만히 있어도 알게 될 날이 오고야 말 터이니까요. 』
열 한 살이 됐을 무렵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미리암의 집에는 이제까지의 밝고 명랑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사라져버리고, 아버지마져 기를 꺽였다. 그렇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한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가족들의 확고한 유대아 정신과 기어히 팔레스타인으로 가고야 말겠다는 신념이었다.
먼저 큰 오빠가 떠나기로 했다. 촉망받는 학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낼 것이라고 기대를 모으고 있던 오빠는 미련없이 모든 걸 내어 던졌다. 팔레스타인으로 여행한다는 것은 아주 엄청난 계획이었지만, 오빠는 여행을 위해 마련한 경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데에만 거의 넉 달이 걸렸고, 거기서 보낸 편지가 도착하는 데에만 해도 두 달이 걸렸다. 그는 리션에 있는 포도짜기 공장에서 일꺼리를 찾아내었다.
곧 이어 둘째 오빠가 팔레스타인으로 떠났고,그도 역시 생활터전을 잡았다. 그러자 집에 남아 있던 미리암은 두 오빠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도 팔레스타인으로 불러 주기를 간청했다. 한 오빠가 휴가를 얻어 귀향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미리암의 여동생과 막내 오빠를 데리고 갔다. 큰 언니는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못갔다. 아버지가 딸 중에 하나는 집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바람에 막상 남기로 된 것은 미리암이었다. 그 이유는 미리암 자신은 언제라도 팔레스타인으로 가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왕 가는 바에야 가족이 몽땅 가기를 바랬고, 따라서 이참에 누이동생이 가지 못하게 되면, 결국 누이동생은 영원히 못가게 될런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 있는 데다가,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결국은 가족 모두가 이주하려던 본래의 꿈이 무산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 겁났기 때문이었다.
1906년 여름, 마침내 아버지가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서 크파사바 가까운 곳에다 아몬드 나무를 심는데 적격인 땅 백 듀남을 사들였다.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오자 아버지는 미리암이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사촌형제 한 사람과 함께 이주하는 걸 허락해 주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아버지도 미리암의 일행과 합류했다.
미리암은 아버지가 사들인 크파사바의 땅에서 살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와 나이어린 형제를 데리고 팔레스타인으로 왔지만, 그녀에게는 농사에 필요한 도구는 물론이고, 농사에 대해서는 아무러한 경험이나 지식도 없었으면, 게다가 할아버지가 운영해 보려고 시도했던 작은 식당마져 문을 닫아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집안의 젊은이들은 뿔뿌리 흩어져 일자리를 찾아 나섰고, 노인들은 하는 일도 없이 무료하게 집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두 세 달이 지나서 형제 중의 한 사람이 페타 티크바에다 일자리를 잡게 되자, 이참에 가족 전체가 페타 티크바로 이주했다. 페타 티크바는 1878년 경 예루살렘에서 이주해 온 유대아 사람들이 건설한 귤밭 마을이었다. 미리암도 살아갈 양식을 마련하려고 부단히 애썼지만, 당신 페타 티크바에서는 소녀를 고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평범하고 단순한 일이긴 했지만, 임시로라도 귤밭에 고용되어 일할 수 있게 되자, 미리암은 이마져도 아주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녀는 꺽기지 않고 무슨 일이든 억척스럽게 해치워 냈고, 대지 위에서 일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해 했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 일 잘하는 처녀 」로 소문이 났다.
그녀에게도 행운이 찾아들 날이 왔다. 러시아 출신의 농장주인 크로르란 사람은 유대아인의 고용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단 하나의 농장주이었는데, 귤나무 열매나 어린 나무를 돌보아 주기 위하여 정식으로 미리암을 고용했다. 미리암은 하루종일 조그마한 화분에 흙을 채워 넣거나, 먼 곳에서 물을 길어다 두 개의 양철통을 이용하여 나무에다 물을 뿌려 주었다. 그녀는 해가 지더라도 크로르가 다가와서 일을 멈추라고 할 때까지 절대로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연인, 미리암
팔레스타인의 개척자들 가운데 우크라이나에서 온 한무더기의 일단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자이오니스트 청년운동의 일원으로서, 그들 모두가 함께 협동체를 이루어 살기를 바랬다. 이들이 이를 실천에 옮기자, 이를 계기로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협동적인 생활방식을 본뜨려고 했다. 바로 나 자신이나 우리들의 동료들이 예루살렘에서 생각해 낸 것처럼 협동생활을 하게 되면 개척생활이 이제보다 훨씬 쉬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자기들 자신의 토지를 개척하기를 꿈꾸어 왔는데, 그해 봄 마침내 그러한 기회가 찾아들었다.
유대아 국민재단은 1906년부터 재단이 모은 돈으로 밴 셰멘에 있는 리치다 근교와 라무래 근교의 홀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의 서안 등지의 토지를 사 모으고 있었다. 다른 한편 재단은 독일 출신의 경제학자인 루핀 박사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 토지개발 사무소를 개설하였다.
1908년 갈릴리의 키네레트에서는 재단이 세운 작업계획의 막이 올랐고, 밴 셰멘에서는 「 헤르츨의 식림계획 」에 기초하여 최초의 식림사업이 착수되었다. 처음 이 일은 아랍인 노동자를 고용하여 시작되었지만, 루핀 박사는 나름대로 유대인 노동자를 구하기 위하여 이리저리로 쏘아 다녔다. 이들 사업에 발을 디딘 최초의 유대아인 이주자 속에는 로무니 사람들도 끼어 있었는데, 이 그룹의 사람 중의 일단은 키네레트로 가고 다른 일단은 「 헤르츨의 숲」으로 갔다.
2월의 퓨림절이 지나자 페타 티크바에서는 한쌍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 결혼식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이들 신랑신부와 함께 밤새워 춤을 추다가, 아침이 되자 페타 티크바를 떠나 밴 셰멘으로 갔다. 태어나서 한번도 운 적이 없는 미리암조차 이때는 그들을 떠내보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들과 함께 그녀도 가기를 바랬지만, 현지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젊은 남자들이었다.
샤바스 날이 되자 그녀는 여러 명의 여성들과 함께 그들을 방문했다. 이 날은 공휴일인지라 레호보트나 쟈파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숲에다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정말로 경이로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팔레스타인이 젖과 꿀을 얻지 못하는 황량한 땅으로 전락해버린 것은 옛적부터 산양떼들이 나무를 갉아 먹어치웠기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은 미리암이 그곳에서 그들을 위하여 가사를 맡아주기를 간청했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미리암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그녀 자신도 자신이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강렬하게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 몇 사람을 위하여 요리를 한다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생활비를 마련할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했고, 그들 역시 그녀가 집안살림 외에도 나무를 심는 일을 하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암은 도리없이 페타 티크바로 되돌아 가야 했다.
얼마 안가 그녀는 키네레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옛날 한 시절, 키네레트는 그곳을 거쳐가는 여행객들의 중간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그 뒤로는 내동댕이 처진 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고 있던 곳이었다. 젊은이들은 언덕 꼭대기에 부서진 채로 남아 있던 대상들의 숙영지에서 지내고 있었다. 숙영터 바로 밑에는 옛날 병사들의 요새로 쓰였던 폐허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갈릴리 호수 쪽으로 눈을 돌리면, 호수의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에 이르기 까지 한 눈에 들어왔고, 아득히 먼 곳에는 하얀 눈을 이은 헤르몬 산의 꼭대기도 눈에 잡혔다. 그곳은 분명 아름다운 곳이기는 했지만, 이와는 반대로 살아가기에는 척박하기 그지 없는 곳이었다.
겨울철이면 부서진 벽 사이로 비바람이 마구 들이쳤고, 여름철이면 달아오른 양철바닥처럼 불같이 따갑기만 한 폭염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꼼짝 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맥을 추지 못하게 했다. 밭에는 헤아릴 수 없는 돌맹이들이 내딩굴고 있었고, 암석도 폭약을 터트려야만 제거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개척자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던 유목민들이 갑작스러이 습격하여 오거나, 걸핏하면 애써 거두어 들인 곡물단에다 불을 질러댔다.
그곳 사람들이 미리암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때까지 이곳에서 가사일을 돌봐주고 있던 사라 마르킨이 갑자기 몸져 눕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미리암은 곧 작은 짐꾸러미와 여행용 빵과 올리브를 챙겨서 그날 중으로 키네레트행 마차를 탔다. 이튿날 그녀는 키네레트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미리암은 그지없이 분주했다. 그곳에는 30여 명의 개척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녀는 꼭두새벽 세 시부터 일을 시작하여밤 늦게까지 종일토록 빨래, 바느질, 바람막이도 없는 화덕불 위에서의 요리 등의 일에 매달려야 했다.
미리암은 키네레트에서 넉 달 가량 체류했다. 그 무렵 그녀에게 번뇌가 생겼다. 젊은이들마다 그녀를 연모했지만, 그녀는 그들 중 아무하고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라 마르킨이 회복돼서 돌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또 다른 개척지인 미츠바로 이동했다. 키네레트와 마찬가지로 갈릴리 지방의 조그마한 촌락인 미츠바에서는 그녀의 벗 여섯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곳 역시 키네레트와 마찬가지로 적막하고 위험하기는 앞서와 다름이 없었다. 남자들이 일하러 나가고 나면 미리암은 혼자 남아 가사일을 꾸려 나가야 했는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그녀는 항상 가까이에 있는 벽에다 커다란 식칼을 걸어 두고 있었다.
어느날 개척자 중의 한 한 사람인 드브슈베이거가 부상을 입고 운반되어 들어왔다. 그는 최초의 자경단을 만들어낸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참으로 착하고, 명랑하고, 일 잘하는 젊은이였다. 그는 인근 촌락에서 일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다, 갑작스러운 유목민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던 것이었다. 미리암은 정성을 다하여 상처를 소독한 후 붕대로 김쌌다. 그런 다음 그를 병원으로 옮기려 했지만, 드브슈베이거는 완강하게 옮기기를 거부했다. 가까스로 병원으로 가는 것을 승낙받고 나서야 티베리아스로 데리고 갔지만, 이미 시기를 놓쳐버리는 바람에 그는 죽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열 여덟
그런 사건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미리암은 페타 티크바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급히 돌아와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녀의 가족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곤궁했다. 시간이 갈수록 노인들은 기력을 잃어가는 데다가, 급기야는 병으로 기동하기조차 어려워졌고, 벤 셰멘에서의 일을 마므리하고 돌아온 작은 오빠는 일자리가 마땅치 않아 집에서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다. 오빠가 아니라도 그 시절에는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것은 특히 가혹한 기후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미리암은 슬픔이나 죽음을 모르고 자랐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들여다 보면, 오래된 정착지에는 일꺼리가 없었고, 새로운 개척지는 비인간적인 환경에 휘둘려 있는 데다가, 매사가 잘 풀리리라는 전망마져 전무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제껏 지녀온 자기의 소중하고도 유일한 재산으로 지녀온 희망과 용기를 잃는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꿈과 희망을 등지고 유럽으로 되돌아 간 사람들도 꽤나 되었는데, 미리암의 두 오빠도 일단은 유럽으로 건너 갔다가, 한참 뒤에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와 이 땅에 정착했다. 젊은이들 중에는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미리암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려고 페타 티크바로 갔다 ( 내가 그녀를 처음으로 본 것은 그녀가 조부모를 만나러 가는 도중의 일이었다 ). 그녀는 잠시 그들의 곁에서 그들을 위로하면서 같이 지냈지만, 그곳에는 그녀가 할 만한 일꺼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즈음 북부지방에서는 두 팔을 걷어부치고 일할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텔라나 사마리아 지방에서도 농장주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잡초를 뽑아내는, 뼈빠지게 힘든 일을 맡아줄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이 일의 응모자들 ( 그래봐야 미리암과 예멘 소년들 뿐이었지만 ) 은 일단 페타 티크바의 교외에 모여 있다가 걸어서 헤데라까지 갔다. 그것은 길고도 먼 여행이었다. 하루 온종일 뜨거운 모래밭 한 가운데를 통과해야 할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사바스 날에 헤데라에 도착했다. 금방 소문이 퍼져 나갔다.
『 처녀가 일하러 왔다네 ! 』
사람들은 호기심어린 눈길로 그녀를 맞으며 웃었다. 다음날로 미리암은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그녀를 맞아주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가까스로 보수없이 그녀를 써보겠다는 농장주를 만났다. 얼마 안 있어 농장주는 그녀가 무척이나 일을 잘 한다는 것을 알고나서는 곧 남자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그녀를 고용했다. 그곳에서 김매기 일을 끝맺고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도중 말라리아에 걸리는 바람에 티크론에 있는 죠페 박사에게로 보내어졌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됐던 것인데, 그녀는 그때 막 열 아홉 살에 들어서고 있던 때였다. 그때까지 그녀는 수많은 고난을 겪어 나가면서도 나름대로는 고뇌도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고뇌를 웃음으로 단 한방에 날려버릴 줄도 알고 있었다.
유대아 사람들의 삶의 방식
티크론의 개척자들에게는 쉴 짬이 없었다. 우리들은 대지 위에서 일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고 만족해 했지만, 오래된 정착민들의 생활방법은 개척자들이 품은 이상적 형태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유대아 사람들이 주인 노릇을 해가며 아랍 사람들을 부려 먹는다는 것은 우리들이 바라온, 새로이 유대아 사람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우리들의 이상과는 크게 동떨어진 것이었다. 우리들은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만큼은 고용하는 사람과 고용 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했다. 팔레스타인에서 만큼은 「 순박한 유대아 사람들 」이 모여 함께 살아야 할 터인데, 어떠한 방법으로 이를 실현해 내야 할까 ? 서로가 서로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
아직 우리들이 꿈꿔온 이상적인 생활형태를 실현해내지는 못했지만, 우리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점차 갈릴리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상하리만큼 야릇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래 된 정착민들은 단순하고도 규칙적인 생활양식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랬지만, 우리들 개척자들은 모두가 유대아 국민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새로운 토지로 가기를 바랬다. 갈릴리에서도 오래 된 정착민들은 아랍 사람들은 물론 유대아 사람도 고용해서 옥수수나 보리를 재배했다. 일꺼리는 격하고 힘들어도 흥미있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위험과 혼란, 질병과 약타리 잇달았다.
쟈파나 하이파에서도 어쩌다 우리들이 농장주를 만나게 되면, 그가 입은 옷만 보고도 대뜸 그가 갈릴리에서 온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차렸다. 왜냐 하면 갈릴리 사람들이 입은 옷은 간편하고도 실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붉은 색깔을 띄운 아랍인 구두를 신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쿠피야 ( 머리에 끈으로 묶여져, 목이나 어깨 너머로 늘어져 있는 사각형의 보자기 ) 를 두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의 언어나 동작은 팔레스타인 어느곳 보다도 단순하고 활달했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가 갈릴리로 가게 되기 까지에는 그 뒤에도 1년이란 세월을 더 보내야 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지방의 헤데라에서의 노동은 티크론에서 보다도 격하고 위험했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일을 이겨낸다는 것은 곧 개척자로서의 의무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키네레트에 있는 로무니 그룹의 사람들이 편지로 미리암에게 연락해서, 헤데라에서의 일자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키네레트에서 유대아 국민재단이 임명한 감독 밑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감독이란 자는 로무니 그룹이 지닌 용기만큼은 가상히 여기면서도, 경험이 없는 점으로 보아 그들이 지향하고 있는 생활방법에 대해서 만큼은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한술 더 떠서 감독은 로무니 그룹 사람들이 이제껏 살아온 방법에 대해서는 이해해 보려고도 않고, 무작정 로무니 그룹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이상이 현실화되기에는 시기상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로무니 그룹 사람들이 헤데라로 이동하자 나도 티크론을 떠나 그들과 합류했다.
새해 첫날 저녁 미리암과의 약혼을 발표
헤데라에서의 한 해로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대단히 힘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쾌하고 흥미진진했다. 우리들의 생활환경은 원시적인 데다가 일마져 격렬했지만, 이에 비해 수입이라고는 입에 풀칠한 정도에 불과했다. 키니네를 복용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리는 바람에, 생각에 비해 유카리 나무도 많이 심지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들 나름대로는 농사짓는 방법을 익히게 됨과 동시에, 이러한 기회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깊숙이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구체적으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그릴 수 있게도 되었다.
우리들은 농장주 개개인을 위하여 일했지만, 생활은 크브챠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해냈다. 벌어들인 수입은 한데 모아, 매주에 한번씩 미리암에게 건내 주었다. 미리암은 전적으로 우리의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하여 오랜지 밭일을 그만 두었다. 미리암은 미리암 스스로가 알맞다고 생각하는 먹을 것 또는 각자가 필요로 하는 물품, 이를테면 어떤 사람을 위하여서는 구두, 또 다른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셔츠나 바지를 마련했다. 수개월이 지난 후 사라 마르킨이 크브챠에 합류하게 되자, 귀찮고 자잘구레한 일들은 모두 두 사람이 도맡아 처리했다.
우리들의 생활은 우리가 마음 먹은대로 진행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생활이 곧 우리들이 염원해 왔던 생활방식이로구나 하는 확신이 깊어져 갔다.
지금에 와서도 미리암은 당실를 되돌아 볼 때에는 - 지금부터 약 4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 자신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채 스무 살도 안된 나이에 그런 큰 일을 떠맡아, 그렇게 거뜬하고, 솜씨 좋게 해낼 수 있었는지..... 』
어떻든 미리암은 이런 일을 해냈다. 어머니가 가족들한테 하는 것처럼, 개척자의 촌락을 위하여 온갖 어려움을 굳굳하게 헤쳐 나갔다.
지금도 간혹 누군가가 나에게
『 그녀가 그렇게 험난한 생활을 버티며 이겨 나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연유한 것으로 보시나요 ? 』
라고 묻기라도 할 때에는, 나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 그녀 속에 깃들어 있는 따듯한 모성애로서의 본능은 일찌기 그녀가 태어난 보그슬라프에서 그녀의 부모님으로부터 이어받은 게 틀림이 없어요. 이웃 사람들과 함께. 이웃 사람들이 지닌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인간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아무러한 구김살도 없이, 늘 포근하고 관대하며, 명랑하고 쾌활하게 대했던 보그슬라브의 그녀의 가정생활에서 연유된 것임에 틀림이 없어요. 』
라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미리암보다 나이가 많은 사라가 와서 함께 살림을 하게 되자,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바깥의 일은 바깥의 일대로 열심히 해내고, 집안 일 모두는 전적으로 사라에게 맡긴 채, 부지런히 그녀의 일을 거들어 주는 방식으로. 마치 자신이 그들의 딸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했다.
그해 9월, 유대아의 새해 첫날, 미리암과 나는 약혼을 발표했고, 더불어 우리는 파아티를 열었다. 우리들에게는 별로 먹을 만한 음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돈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단지 미리암이 지니고 있던 약간의 터어키 산 메지다를 빵과 쌀, 납작콩과 기름으로 바꾸어서, 기분좋게 잔치를 벌였다. 그날 밤은 모두가 행복에 젖어, 다음날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춤을 추었다.
개척지는 개척자의 손으로
어느날 러시아의 작가인 솔로비에프가 우리들을 만나러 왔다. 그는 착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위대한 사상가로서, 협동생활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날 동안을 우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들에게 카나다에서의 듀고폴스나, 그밖의 다른 여러 촌락에서의 협동생활의 모습을 들려 주었다.
이때 키네레트에서도 새로운 상황이 싹트고 있었다. 키네레트에 있는 유대아 재단의 팔레스타인 사무소 사무국장인 루핀 박사는, 위대한 사상과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제까지의 키네레트에서의 토지관리 방식에 대해 만족스러워 하지 않고 있던 중, 어느날 이렇게 결정했다.
『 유대아 재단의 모든 토지는 개척자 자신들이 책임지고 개간할 수 있도록, 토지의 관리 일체를 개척자들에게 이양하기로 한다 ! 』
이러한 방식을 대대적으로 시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키네레트에는 요르단 강의 동쪽과 서쪽 양 방향에 토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아랍 촌락의 이름에서 따온 우무 유니라고 불리우는 동쪽 부분은 키네레트 사람들의 힘으로 경작하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겨울철이 되어 갑자기 요르단 강이 범람하기라도 할 상황이 되면, 키네레트에서 우무 유니까지는 전혀 말이나 마차를 이용하기가 불가능했으며, 이에 따라서 줄지어 문제가 발생했다. 개척자들에게 관리가 이양된 것은 키네레트의 토지 중 바로 이 부분의 토지 3백 듀남 ( 약 750 에이커 ) 이었다.
이 토지에다 첫 삽을 댄 것은 팔레스타인에서도 가장 우수한 노동자 그룹이었지만, 애초부터 그들에게는 우무 유니에 정착할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일 년 동안 생활해 보고나서, 우무 유니에서의 실험이 훌륭하게 성사될 경우에는, 자기들이 가꾸던 토지 일체를 이곳에 정주할 그룹에게 양도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헤데라에서는 우리들의 동료중의 한 사람인 이스라엘 브로크가 이들과 합류했다. 이스라엘 브로크는 그 해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자세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왔다. 같은 시간 우리들은 루핀 박사로부터, 앞으로는 우무 유니의 땅을 우리들이 개척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들은 뛸듯이 행복하고 유쾌했다.
이때까지 우리들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들이 쌓은 경험은 많았고, 서로서로가 동지로서 일체감을 느끼고 있는 데다가, 지식도 풍부했다. 남은 건 우리들이 가진 이상을 우리들의 토지 위에다 실현해 내는 일뿐이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의 밑바닥에는 우리들이 공통으로 품고 있는 인생관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르돈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좀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고르돈이야말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 가장 훌륭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론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지만, 정작 우리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결코 이론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요구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우리들의 손 안에 거머쥘 수 있는 해답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대지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들 유대아 사람들이 나라를 잃고 유랑하는 동안,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 대지는 풍요로움을 잃어버렸다. 유대아 사람들도 대지를 떠나 있었던 탓으로, 정신적으로거칠대로 거칠어지고, 황막해질대로 황막해진 게 아닌가 ? 그런 까닭에 우리들은 이 기회에 대지에다 우리들의 힘을 힘차게 쏟아붓지 않으면 아니되며, 그럼으로써 대지는 잃어버렸던 창조력을 되살려 낼 수 있지 않겠는가 ?
제디아 지방 촌락의 농장주들은 오랜 동안 수출용 농작물을 재배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여 왔기 때문에, 고용 노동력을 필요로 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심지어는 필수품마져 촌락 밖에서 사들이고 있지 않은가 ? 이제부터는 유대아인 스스로가 중노동에도 참가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상태는 옛보다 진일보한 것임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대아 사람들이 이러한 정도에서 안주해 버리고 만다면, 상황은 어떻게 되겠는가 ? 생활의 기반은 모두가 옛 그대로, 도회지에 의탁하게 되어버림으로써, 결국 유대아 사회는 아무것도 바꾸어지는 게 없이, 옛 그대로, 중간계급이나 관리자 또는 임금 노동자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 그렇게 되면 우리 유대아 사람들이 가진 결점은 결점대로 남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들에게는 유대아 민족을 부활시켜볼 여지가 모조리 없어져 버릴 것임이 명약관화해 보였다.
좀더 가까이, 좀더 멀리
자급자족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찾아내려고 한 것은 상부상조와 더불어, 대지와의 끊임없는 교감을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만족감을 최대화하는 한편, 임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노동을 실현하는 데 있었다. 상황이 냉혹하기만 한 새로운 나라 팔레스타인에서 우리는 개인이든 가족이든 간에 혼자만의 힘으로는 전혀 견뎌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가깝고도 건강하고 튼튼한 상부상조야 말로 가장 절실한 문제라는 사실을 절감했고, 전체가 좀더 끈끈하게 뭉쳐 협동한다면, 보다 많은 물질을 생산해 낼 수 있으리라는 사실도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에서 좀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대량으로 보다 많은 작물을 생산해 내는 것이 중요했지만, 우리들은 이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생산해 낸다는 사실, 즉 물질을 만들어낸다는 것 말고도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한 문제는 우리들의 인간생활 전체와 관련하여, 생산과정 자체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했다.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유대아인이 추방되어 있는 기나긴 세월 동안, 유대아인의 몸에서 빠져나간 것은 이러한 전체성에 관한 문제였다.
우리들 유대아인은 추방당해 있는 곳에서 자연하고는 물론이고, 근본적인 인간존재의 의미에서도 소외된 채, 자기 한몸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던 바람에, 가족들 마져 자기만의 성채를 쌓아놓고 지내왔다. 안전보장은 돈을 주고 사야만 했으며,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놓고 보려고 머리를 썼다. 우리는 두뇌를 이용해서 생활해 왔으며, 인생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측면하고는 두텁게 담을 쌓은 채 생활하여 왔고, 자연이란 측면하고도 절연된 채 생활하여 왔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지력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여 왔다. 유대아인이 무미건조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한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과거 우리들은 물건을 얻기 위하여 우리들의 두뇌를 써야 했지만, 이제부터야말로 우리들은 모든 것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우리들의 두뇌가 아니라, 우리들의 두 손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더불어 우리들의 생활 안에서는 돈의 개념을 털어내 보내려고 애썼다. 우리네 속에는 주인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돈을 주고 부려먹는 머슴도 없었고, 다만 대지와 하나와 되어, 서로간의 필요에 따라, 온몸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아무도 야심을 품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본인이나 가족들의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사회가 개인을 보호하고, 사회 전체의 사람들이 개인의 완성을 도웁게 되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모든 힘을 대지에 쏟아부은 결과, 질병이든 곤경이든 위험에 부딪힐 때마다 전체의 힘을 이루 말할 수 없이 강했다. 우리들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고, 비록 가진 것도 변변치 못했지만, 협동의 방식으로 바르고 평화롭고 생산적인 생활을 영위해 가기 위해 힘썼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제하려 들지를 않았다. 우리들 가운데 몇몇 사람은, 유대아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이러한 생활방식을 채택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은 우리들을 매혹시킨 이와같은 방식이, 실제로는 일반대중이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우리들의 시도가 성공하고,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시도되기를 바랬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들에게는 새로이 터득해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때 우리들이 맞부딪혀야 했던 많은 문제들 가운데, 조그마한 것 어느 하나라도 전혀 그의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책으로부터는 얻어낼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들이 체득했던 것은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팔레스타인의 현실 속에서 얻은 것이었으며, 체험을 통해서만 실제적으로 좀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될 것들이었다.
우리들은 오순절 주간에 헤데라를 출발했다. 제디아를 여행할 때, 우리들의 계획을 전해들은 많은 개척자들이 우리들의 계획을 그들에게도 설명해 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우리들은 쟈파에 도착한 후 오순절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 하포에 하차이르 」의 모임에 출석하여 우리들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 모임은 곧 개척자의 대회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우리들은 마음 속 깊이 우리들의 비원을 간직한 채, 기쁜 마음으로 우무 유니로의 여행을 계속해 나갔다.
〈 주 〉키부츠 : 헤브라이 말로 나뭇가지의 한 마디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써, 철저한
공동생활체이다. 대체로 100에서 500가호 정도로 집단부락을 형성하여 생
활하며, 부부 가 쓰는 조그마한 침실이 있는 주택말고는 전부가 공동으로
쓰인다. 농장의 노동배치는 키부츠 위원회에서 정 하고, 식사, 회합, 선거,
결혼, 장례식, 오락 등은 주로 촌락의 대강당에서 이루어진다. 한 주일의 한
번씩은 모두가 참여하는 총회를 열어, 키부츠 최고의 결정을 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