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베드로의 세례와 이벽의 전교
이벽은 승훈이 북경 사절단에 자기 아버지를 따가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였다. 즉시 그를 찾아갔는데 그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이승훈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횔세.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 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 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의 남북극 원리며, 천체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강생이며,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이승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감탄하며 그 책을 몇 권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벽이 가지 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보고 나서 기쁨이 넘쳐 자기로서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벽은 대답하였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지고 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이벽의 이 말은 학문의 갈증보다도 종교의 갈증이 그에게 더욱 절실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준비한 것이니 그에게는 구령대사(救靈大事)가 점점 더 유일한 중대 사가 되어 가던 것이다. 그 말은 이승훈의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승훈은 그것을 스승의 말처 럼 받아들였고 자기들의 공통된 소원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 “大道師님의 말씀으로(la parole du Maitre)" 이승훈은 드디어 1783년말 경에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여 북당을 찾아가 탕(湯) 알렉산델 주교를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 탕 주교는 곧 유명한 알렉산델 데 구베아(de Gov ea) 주교였다. 포르투갈 인이요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원으로서 매우 박학하고 중국 천주교회가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주교 중 한 분이다. 그리고 그는 중국 천주교인들로 하여금 의식에 관한 교황 성좌의 교서를 충실히 지키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가장 많이 노력한 이들 중 한 분이었다. 조선의 기록에 의하면 이승훈은 북경에서 나이가 90여세나 되지만 근력이 좋고 외양이 지극히 인자 한 서양사람 삭덕초(索德超)를 만났고, 또 양(梁)이라는 젊은 사람도 만나보았다고 한다. 북경 시내 의 네군데 성당에는 약 60여 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승훈은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미구에 영세를 받을 준비가 다 되었다. 귀국길에 오르기 전에 성세성사를 받았는데 그가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영세 명을 받았다. --- 중략 --- 갑진년(1784년) 봄에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받은 많은 서적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몇 가지 이상 한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에게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벽은 그동안 날을 세어가며 사신들의 귀국을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벽은 친구가 보내준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집을 세내어 그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앉았다. 이제 그는 종교의 진리의 더 많은 증거와,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과, 7성사의 해설과, 교리문답과, 복음성서의 주해와, 그 날 그날의 성인행적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 나가는데 따라서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신앙이 커가고 신앙과 더불어 자기 동료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알려 주고자 하는 욕망도 커갔다. 얼마동안 연구한 뒤에 자기 은신처에서 나와 이승훈과 정약전, 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요,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야 하오.” 이벽 자신은 곧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후 중인 계급의 친구들 중, 학식과 덕망이 뛰어 난 몇 사람에게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활기 있고 박력 있는 말을 듣고서 거의 즉시 응하였 다. 그들 중에는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가 있었다. 이벽은 여러 양반들에게도 전교하고 그들을 입교시켰다. 샤를르 달레 著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p. 303-308 ....................... 註. 1. Govea 주교 : 중국명 탕사선(湯士選), 1782년 12월 북경주교로 임명 2. de Almeida 신부 : 중국명 삭덕초(索德超),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 당시 57세. 3. 그라몽(Grammont)신부 : 중국명 양동재(梁棟材), 프랑스계 예수회 신부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줌. 4. 당시 이벽의 집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많은 서적이 있었으며 특히 그의 5대 조부인 '이상'이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가 1645년에 귀국할 때 서장관으로 수행했는데 소현세자는 독일인 아담 샬과 친교를 맺고 천주교 관련 많은 서적과 성물을 갖고 귀국한 사실로 보아 이때 이경상도 많은 서적을 가져 온 것으로 추측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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