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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 설문조사에서 복권에 당첨되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은가
* 방걸레질 하는 소리.......
내 뒷바라지 하느라 그렇게 됐다는 게, 아내의 해묵은 레퍼토리다. 그 얘기 나오기 전에 어서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끌어모아 술을 마셨다. 번의 전화가 왔다. 받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는 배터리를 빼 버렸다.)
* 대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 (그리고 새벽 1시쯤 난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내가 소파 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자나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욕실로 향하는데.......) 여 : (아픈 듯) 어디 갔다 이제 와? 남 : 어. 친구들이랑 술 한잔.... 어디 아파? 여 : 낮에 비빔밥 먹은 게 얹혔나봐. 약 좀 사오라고 그렇게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고... 남 : 아... 배터리가 떨어졌어. 여 : 손이라도 좀 따줘. 남 : 그러게... 그렇게 먹어대더라니... 좀 천천히 못 먹냐? 여 : 버릇이 돼서 그렇지 뭐... 맨날 집안일 하다 보면, 그냥 대강 빨리 먹고 치우고... 이랬던 게... (어깨에서 손으로 피를 몰아서 손끝을 바늘로 땄다. 아내의 어깨가 어느새 많이 말라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또 소파에서 웅크린 자세로 엎드려 있다.) 남 : 여보... 들어가서 자. 여 : 여보... 나 배가 또 안 좋으네. 남 : 체한 게 아직 안 내려갔나? 여 : 그런가봐. 소화제 먹었는데도 계속 그래. 남 : 손 이리 내봐. (아내의 손끝은 상처 투성이였다.) 남 : 이거 왜 이래? 당신이 손 땄어? 여 : 어. 너무 답답해서... 남 : (버럭) 이 사람아! 병원을 갔어야지! 왜 이렇게 미련하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느 때 같으면, 마누라한테 미련 하냐는 말이 뭐냐며 대들만도 한데, 아내는 그럴 힘도 없는 모양이었 다. 그냥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내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남 : 가만 있어봐. 검사 받아야 되니까. 여 : 아니... 진짜 말짱해. 아까 잠깐 그렇게 아팠나봐. 남 : 온 김에 검사 받고 가. 여 : 뭐하러 그래~ 응급실 얼마나 비싼데~ 내일 병원 문 열면, 가서 검사 받을게. 남 :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여 : 가자니까. 완전 바가지야. (잡을 틈도 없이, 아내는 먼저 일어나 나간다. 나도 머쓱하게 아내를 따라 나온다. 하긴 아내의 말처럼 응급실은 보통 진료비보다 훨씬 비싸다.)
* 거리 소음 + 걷는 소리....... 남 : 진짜 괜찮아? 여 : 응. 나 학교 다닐 때도, 시험 보기 전날이면, 배 아프고 그랬다? 그런데 병원만 딱 오면, 배가 안 아픈 거야. 그게 다 신경성이라 그런가봐. 남 : 그러게, 사람 놀래키고 그래~~ 아프면 바로바로 병원 가고 그래. 여 : 어머~ 당신 놀랬어? 어유~ 그래도 홀아비 되긴 싫었나봐? 남 : 싫긴 뭐가 싫으냐? 홀아비 되면, 젊은 마누라도 새로 들이고 좋지. 여 :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남 : 바쁜데... 여 : 회사 앞까지 왔는데? 남 : 그래. 알았다. 병원은 갔다 왔어? 여 : 어. 신경성 위염이래. 남편이 속썩이냐고 물어보더라. 의사선생님이....... 남 : 나만큼 잘하는 남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뭐 먹고 싶어? 여 : 죽 먹자. 요즘 좋은 죽집 많다며? 그런 데 가서 우아하게 먹어보고 싶다. * 죽 떠먹는 소리....... 남 : 여기 괜찮지? 여 : 횟집에서 죽도 파네? 남 : 어. 우리 회식할 때 자주 오는 데야. 여 : 그런데 너무 비싸다. 죽 한 그릇에 만 오천 원씩이나 해? 태어나서 이렇게 비싼 죽은 처음 먹어보네. * 바닥까지 긁어먹는 소리....... (갑자기 열심히 죽을 먹는 아내가 안쓰러워 보였다. 만 오천 원짜리 죽 한 그릇이 아까워, 그릇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는 아내... 난 몇 십만 원짜리 술도 아무렇지 않게 먹는데... 내 아내는 태어나 이렇게 비싼 죽을 처음 먹어 본단다. 그동안 내가 뭘 하고 살았나 생각이 들었다.)
남 : 어, 얘기해. 여 : 추석 때 있잖아. 친정부터 가면 안 될까? 남 : 왜 또 그래~ 어머니 성격 알면서~ 여 : 그러게. 30년 넘게 어머니 성격 아니까, 명절 때마다 당신 집부터 갔잖아? 남 : 명절 때 시댁부터 가는 건, 당연한 거야. 여 : 당신 집은 오남매야. 우리 집은 오빠랑 나밖에 없잖아. 엄마가 얼마나 외로워하시는데....... 남 : 추석 끝나고 가면 되잖아. 여 : 어머니도, 당신도 웃겨. 당신! 남 : 여보.... 왜 이래. 새삼스럽게. 여 : 그럼 이렇게 해. 추석 때 당신은 당신 집 가. 난 우리 집 갈 거야. 남 : 어머니가 가만 계시겠어? 여 : 안계시면 어떡 할 건데? 나도 할 만큼 했어. 맘대로 하라 그래. 남 : 당신, 오늘 좀 이상하다. 여 : 30년 동안, 그만큼 이기적으로 부려먹었으면 됐잖아. 내가 이정도 얘기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해?
(큰소리친 대로, 아내는 추석이 되자, 짐을 몽땅 싸서 친정으로 가 버렸다. 나 혼자 고향집으로 내려가자, 어머니는 노발대발하시며, 세상천지에 며느리가 이러는 법은 없다고 난리를 치셨다.
지난 30년동안 한번도 없었던 일이니, 이번만큼은 노엽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여동생은 여동생대로 제 새언니 흉을 보면서, 무슨 며느리가 그렇 하는 말마다 행동마다 참 얄미울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을 거야. 처음엔 조금 슬프겠지만, 금방 잊을 거야! 남 : ..... 여보?!.....
여 : (울며) 여보. 나 명절 때 친정에 가 있었던 거 아니야. 나,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 받았어. 당신이 한번 전화만 해봤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야.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랬어. 그래서, 내가 어디로 갔을까 놀라서 나를 찾아주길 바랬어. 침대에 혼자 누워서 당신이 헐레벌떡 나타나 주면, 뭐라고 하면서 안길까... 혼자 상상 했었어. 그런데, 당신 끝내 안 나타나더라. 끝내 나 혼자 두더라. (아내의 병은 가벼운 위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날 나와 아내는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검사 결과에 대해 얘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가는 내내 아내는 무거운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남 : 죽으러 가냐? 여 :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남 : 요즘 위암? 아무것도 아니야. 요즘은 다 고쳐. 여 : 그래. 누가 뭐래. 남 : 악성도 다 고친다구. 내 친구 차교수 알지? 그 친구도 위암3기였 는데, 멀쩡하잖아. 요샌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 거! 진짜 아무 것도 아니라구!!! (누구를 위로하기 위해 큰소리를 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내를 안 심시키기 위한 건지,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건지... 큰 소리 치 면서도 운전대 잡은 손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그러면서도 난 끝까 지 중얼거렸다.) 남 : 암? 쳇! 그런 거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난 의사의 입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말하 고 있는 건가, 내 아내가 위암이라고? 전이될 대로 전이가 돼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수술도 하기 어려운 상태니 마음의 준비 를 하시라고.... 가고 싶은 데 있다고 하면 데려가 주고, 먹고 싶은 거 있다고 하면 먹게 해 주라고.... 삼 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자기가 뭔데. 자기가 하나님인가. 자기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아나. 내 아내가 내 곁에서 3개월을 살지, 3년을 살지, 30년을 살지 어떻게 알고.... 저렇게 함부로 말을 한단 말인가.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멱살이라도 잡고,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의사의 입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맑았다.) 여 : ...... 여보!!...... (아내의 음성이 조용히 귓가에 내려 앉는다. 아내가 살포시 팔짱을 끼고,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다. 지금 그녀를 보면, 절망으로 가득한 내 얼굴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러긴 싫었다.) 여 : 여보.... 남 : (무뚝뚝) 왜! 여 : ...........미안해. 남 :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내가 아까 말했지? 차교수도 처음에 병원 갔을 때, 똑같이 말했대. 차교수도 3개월, 아니 2개월 산다 그랬대! 그런데 지금 봐. 멀쩡하게 다니잖아. 그 친구가 나보다 힘도 더 세고 더 튼튼해! 의사 자식들이 하는 말, 저거... 다 뻥이야! 사람 겁주고... 어? 겁줘서 돈 뜯어낼라고 하는 소리야! 믿지 마, 저런 말!! ( 나는 바보다. 끝까지 아내 앞에선 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큰소리 치고 있다. 하지만 난 지금 너무 무섭다. 아내가 잡고 있는 내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너무너무 겁나고 무섭다. 아내의 따뜻한 손 이 내손을 꼭, 더 꼭 잡아준다.)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요즘 들어 아내는 내 손을 잡는 걸 좋아한다.) 남 : 내가 뭐라 그랬는데.... 여 : 사랑한다 어쩐다 그런 말, 닭살 맞아서 질색이라 그랬잖아? 남 : 그랬나.. 여 :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당신이 나보고 사랑한다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 그거 알지? 남 : 그랬나... 여 : 어쩔 땐 그런 소리 듣고 싶기도 하더라. 남 : ..... 자!.....
나도 깜박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커튼이 뜯어진 창문으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여 : ............... (좋아하며 일어나야 할 아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난 떨리는 손으로 아내를 흔들어 본다.) 남 : 여보.... 장모님이 나 가면, 좋아하실텐데.... 여보, 안 일어나면, 안간다! 여보?!..... 여보!?...... ( 이제 아내는 웃지도, 기뻐하지도, 잔소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난 아내 위로 무너지며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어젯밤.... 이 얘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김기덕이 진행하는 모 방송프로그램에 나왔던 실제 이야기입니다 http://cafe.daum.net/endolpi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