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눈벌의 논문. 제목: 공주의 비류백제유물과 온조백제의 유물. 목적: 잃어버린 공주의 역사를 올바게 하나라도 ?기위해. 일본인들이 강탈하여간 한반도의 비류백제역사서와, 온조백제서와, 유물들을 가지고 일본의 역사서를 만들고, 조선을 침탈 강점하여 식민지화한 것을 정당화하려고, 유물들(칠지도의 글, 모든 역사서, 유물)을 왜곡하여 뜻을 바꾸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그중에서도 공주와 부여, 가야지방의 유물들을 집중적으로 도굴하여다가 자기들의 중심의 역사를 만들었다. 공주가 자기들의 본향이라고 ?아 오는 것은, 공주와, 부여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아직도 유물들을 다 못 훔쳐갔기 때문에 ?아오는 것이라고, 왕눈벌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백제 삼서=百濟記, 百濟新撰, 百濟本記로 일본고서기를 쓰다. 백제기=신대기, 응신기. 백제신찬= 웅략기, 무열기. 백제본기=계체기,침명기 쓰다.
백제기로 쓴 신대기와, 응신기가 비류백제의 역사이다. 신대기에 나와 있는 신공 46년조, 신공 52년조의 글을 집중하여보자. 칠지도가 신공52년(김성호=230년 /왜=369년) 구저가 칠지도를 신공황후에게 받쳤다고 함과, 계미동경도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할 때 받쳐진 유물이라고 한다. 칠지도의 년대와= 230년과, 계미동경 년대=503년과, 273년의 시차가 생기고 있으며, 일본이 주장하는 369년보다도 134년의 시차가 있는 유물들이다. 斯麻를 신공 46년(김성호=224년/왜=363년)에 久저와 斯麻宿彌를 동시대에 등장시킴은, 두 작물의 유물이 한곳에서 도굴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충남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유물임이 확실하다. 각기 다른 연대에 만들어진 유물들을 송산리 5호분과, 6호분에서 동시에 도굴하여다가 신공황후에게 받쳐졌다는 인물들이 동시대에 등장시킴이다.
일본 考古국보 1호 = 七支刀. 1932년 충남 공주시 송산리 5호분에서 도굴해간 작물이라고 확신함. 혹시, 1936년 충남 부여군 군수리에서 칠지도상을 도굴하여 발표없이 삼킨 것? 七支刀 글.
前面.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出?百兵宣復供侯王뭐뭐뭐뭐作. 後面.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視後世. 63자의 글자중 파기한 글자가 9자, 변조 1자(侯자를倭).
前面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 出?百兵宜復供侯王_______作.=34자, 파기9자. “태화 4년(위,AD230년) 5월16일 병오 정양(谷那)백연철로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 백병을 막아낸 제왕제후들에게, 골고루 공여 할수 있도록 칠지도의 동류품을 제작하시오“. 後面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侯(倭)王旨造傳示後世. =27자. 변조=후-왜, 라고 변조함. “선세이래로 이 같은 칼은 없었으나 백제 왕세자는 성음의 뜻을 받들어, 제왕제후들을 위해, 이 칼(칠지도)을 만들어 후세에 전시하시오.“
왜의 해석= 1.과거의 해석=“태화4년(369년) 5월 16일 日中의 백연철로 칠지도 를 만들어 백병을 막아 낸 후왕에게 주다 ----작. 이전엔 이 같은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세자 기생성음이 일왕 지를 위해 이 칼을 만드니 후세에 전시하라”. 2. 현제의 왜인들의 해석=“태화4년(369) 5월 16일 병오일 正午에 백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 도를 만들다. (이칼을 소지 하게되면)모든 병해(兵害)를 물리칠수 있으며 순탄하게 후왕 으로 나아가는 것이 미땅하다. XXXX작. 선세이래 이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치세에 기묘하게 얻은 성스러운 소식이 생긴 고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왜인들의 역사서를 백제삼서(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로서 가공의 역사서를 만들었기에 모순적인 역사를 숨기고 자기들의 전통적인 것이라는 없는 역사를 사실로 만들기 위한 조작하기 위함이다. 백제기로 쓰여진, 神功記(146~247)와 應神記(390~405)는 공주의 비류백제의 역사. 왜인들이 근초고왕 24년(369己巳年)에 칠지도가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그때에 역사적인 사건이 무엇이었나? 230년 구수왕 18년, 226~228년엔 비류백제가 아라가야와의 전쟁으로 전투에 참여했든 담로의 제왕 제후들에게 골고루 칠지도를 만들어 군주로써 인증하는 증표로써 만들어 주었든 것이 칠지도이다. 역사적으로 비류백제(BC18~396년?)의 역사를 매장시키고, 倭의 역사로 조작함이다. 칠지도의 글이 비류백제왕이 곡나의 철광지에 참전토록, 담로왕과 제후들을 격려하고 , 독려한 격문과 군주로의 증표로 만들어 나누워 준 부장품이다. 그 글들에는 공주의 固麻那利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마나리에서 맴돌고 있다.
왜가 正陽(谷那-예성강우역의 철광산지.)을 日中(일본)이라고 하드니 지금에는 正午라고 함은 은패 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파손시킨 글자들은 그대로 비류백제라는 것이 나타남으로써 그것을 지우기 위함으로 파기 변조시킴이다. 후면에 나타난 故爲侯王(제왕,제후)라는 글을 故爲倭王(왜왕을위해)이라는 것은 ) 으로 뜻을 왜로둔갑을 시켜, 왜가 正陽(곡나=예성강유역) 철광지에 까지 전투에 참여한 것처럼 꾸미어 임나일본부설을 합리화 시켜, 왜가 조선침탈을 침략이 아니라, 고토를 회복이라고 합리화하기 위함이다. 왜인들이 만든 신공기 46년조에 구저와, 사마숙미를 동시대에 출연시키고 있음은 그 유물들(칠지도와 계미동경)이 한곳에서 도굴해갔음을 뜻한다.
칠지도는 충남 공주 송산리 5호, 6호의 고분군의 유물이라는 증거다. 그 이유는 칠지도를 가져다 바?다(신공52년조)는 구저와 사마를 동시대에 출현시킴이며, 글자속의 인물들이 고마나루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리적인 특성이다.
뒤에 나오는 응신기는?=비류백제의 마지막왕? 396년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나는 웅진에서 격파하여 멸하였다는 이잔국이 비류백제였으며 그때 멸망하였다는 응신왕인데, 응신왕은 일본으로 망명한 것이 아니라, 송산리 고분군 1~4호기의 주인이 아닐까? 1932년에 도굴 하여다가 일본에 묻어두었다가 발굴형식으로 나타냄일 것이다. 응신왕이 공주에서 이동경로도 없이, 하늘로 ?았나, 땅속으로 숨었나, 하늘에서 떨어졌나, 믿도 끝도없이 갑자기 가네조에 나타나 왕국을 이뤘다고 함은, 만화에나 나올법한 만화 이야기 정도 밖에는 안된다. 고서기에 나타나는 왕명들과 천황들이 비류백제의 왕들이 아닐까? 왜의 역사로 둔갑 시키는 것, 모두가 백제서의 담로왕들의 기록을 왜로 둔갑시킴. 임나일본부 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구 일뿐이다. 남해안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든 고대국가들, 가야, 역사의 기록없이 사라진 집단 국가들은 비류백제의 담노왕국들을 왜의 역사로 조작 함이 비류백제의 역사이다. 악랄한 일본인들에 의하여 짖밟힌 정당한 우리역사를 ?아야 된다.
칠지도의 중심이 고마나리가 공주였으며, 칠지도와 신대기, 응신기는 비류백제의 역사다. 담노왕들에게 예성강 유역의 철산지 곡나를 지키기 위한 백제대왕의 고뇌의 작품으로 칠지도를 만들어 하나로 결집을 다짐하는 증표의 물건이었다. 侯王(제왕제후)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신임묻는 증표로써 만들어진 격문이었다. 백제는 멸망한 국가의 역사로 역사의 뒤안길속으로 묻어버렸든, 패망국의 과거사로 매장하였든 것에 비하여, 찬란한 문화를 가진 나라였었다. 인류의 문명은 먹을거리가 많은 곳, 사람들이 모이고 문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신라나, 고구려의 지리적인 좋은 여건속에서 삼국중 찬란문화를 간직 했든것 같다.
백제의 역사의 섬세한 세공기술부터 다시보는 230년대의 칠지도, 503년의 사마의 동경, 등 모두가 백제의 얼을 잘 지켜가야 하겠다.
일본이 1951년에 考古국보 2호 우전팔번경=계미동경.
계체기와 침명기는 온조백제의 기록인 백제본기의 기록. 왜의 고고국보 2호=우전8번신사경.=癸未銅竟. 일본인들이 만든 설화=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할 때, 그곳 사람들이 황후에게 헌상했다는 설화로 만들고(신공46년 226년), 1914년 대정3년 高喬가 우전8번신사경을 보고 “참으로 海內無比의 진귀한 자료이고 古史기재의 결함을 보충할수 있는 극히 유익한 유물이라”고 왜곡 보도함은 지어낸 조작서다. 1932년에 충남 공주시 송산리 6호분에서 輕部지온이 도굴해간 도굴품을 다른 유물들은 각기 분산 왜곡했으나, 이경만은 斯麻라는 글자 때문에 우전8번신사에 숨겨고, 2년후부터 1934년(소화9년)에 금석명문 해석의 권위자 福山이체계적인 판독함. “소진철 교수님의 우전팔번경”
일본인들이 우전8번동경이라고 하는 것, 9인의 인물화상, 48자의 글자. 일본인들이 1951년 9월 6일, 考古국보 2호로지정, 동경박물관에 소장한 계미동경으로써, 충남 공주 송산리 6호분에서 1932년에 도굴해간 유물이다.
癸未銅竟의 탁본. 유의하여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글자= 遺자, 遣자이다.
斯麻王이 男弟王에게 만들어준 동경, 6호분의 주인=開中費直의 능이시다.
隅田八幡鏡의 글.=48자.=1951년 6월 9일 국보2호로 지정함.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麻 念長壽遺開中費直 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比竟
1. 계민년 8월 10일 대왕년(503) 남제왕이 의자사가궁에 있을때 사마가 개중비직이 장수하기를 염원하며, 예맥인 금주리 2인등에 최상의 동 2백한으로 경을 만들어 주다. 1. 사마대왕년 계미년(503년) 8월 10일에 의자사가궁에 있는 남제왕 개중비직의 장수를 위하여, 예맥인 금주리와 다른 한사람을 시켜 양질의 백동 2백한으로 경을 만들다.=遺자에 관심을 .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麻 念長壽遣開中費直 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比竟 일본학계에서는 遣(보낼견)자라고 =탁본을 자세히 보면 빌유 遺자가 분명함. 대왕년 계미년(443년) 8월 10일 의자사가궁에 있는 남제왕(男大迹王=繼體天皇)의 장수를 위하여 開中費直濊人今州利(가네河內費直)와 다른한사람을 시켜 양질 백동 2백한으로 경을 만들어 남제왕위하여 길이 봉사하기위해 받친(헌상된) 공물이라고 함.
경의 원만한 해석은 사마가 등장해야지, 사마를 뒷전에 묻고는, 해석이 할 수가 없다. 뚜렷하게 나타난 글자, 그대로 읽고 해석하면 되는 것을 말도 안되는 說을 만드는 것은 경의 뜻을 고의적으로 파묻어버려 사마의역사를 은폐하여 일본역사의 허구성을 감추려 하는 술수인 것이다.
사마왕의 계미년=503년이며, 계체가 등극년은=507년인데 이루워 질수 없는 사건이다. 사마대왕이 일본의 계체천황에게 헌상 했다면, 당연히 백제 사마왕이라고 되어야 함인데, 사마라고 표기된 것은 백제의 국내에 남제왕이 있었기에 자연적인 현상이다. 계체천황을 남제왕으로 만들기 위하여 遣(견)開中費直濊人今州利를 河內費直濊人今州利로 만들다. 濊人은=예맥인인데, 개중비직예인금주리 라는한사람이 될 수가 없다. 도대체 어데에 그런 이름이 존재할까? 竟중에 念長壽遺(유)를=念長壽遣(견)으로, 정확한 뜻의? 해석을 부탁함.
고대사에서 경을 만들때는 -불로장수같은 길상구로 사용됨. 鏡은 = 祭魔具이며, 權位상징, 神器이며, 信任을 부여함에 쓰여진물건이지 헌상품은 아니다.
1971년에 충남공주시 송산리 고분군 5,6호분의 뒷편 수로공사를 하든중에 발견된 무녕왕능에서 수많은 유물들과 지석이 출토되었다.
지석에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 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 세겨짐.
기록 되어 있다. 무녕왕능 마저 일본인들한테 도굴 되었드라면, 우리나라의 역사서인 삼국사기 는 완전히 사라 졌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그자들은 백제의 왕들의 승하를, 薨(훙, 제후들의 죽음에 사용하는글자)라고 폄하한 역사서로 만들어 놓았으며, 한국의 모든 역사가 일본의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칠지도와 계미동경을 신공황후에 헌공된 것으로 만듬이 두유물이 한자리에서 도굴됨을 뜻한다. 5호분옆에 6호분이 같이 붙어 있다. 6호분의 유물이 1932년 가루베에 의하여 도굴된 유물이 계미동경이다. 6호분은 담노왕인 남제왕은 건강이 좋지를 못하였었다는 것이 동경에 나타나고, 또한 자신의 능을 만들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자신의 능을 만들어 내세를 생각하여 6호분은 정성들여 축조하였는데, 무녕왕(兄왕)이 급작히 승하하자, 남제왕 개중비직이 자기능의 상좌에다 급작스럽게 兄왕능(무녕왕능)을 만든 것이라는 것은, 무녕왕능이 6호분보다 부실공사로 됨과 무녕왕능의 입구를 막은 마지막 벽돌이 6호분의 벽돌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여 주고있는 것이다. 武寧王陵은 男弟王 開中費直의 작품이다.
사마왕대의 계미년 대왕년(503년)인데, 4년 후에 나타나는 계체(507년)에게 주기위하여 경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없는 모순이 아닌가? 계체 년대에는 계미년은 없다.
왜인들은 글자 그대로 잃고 해석하면 될것을 역사를 왜곡시키고 감추려고 금기시한다. 왜 그럴까? 경에 나타난 주인공 斯麻라는 글자 때문이다. 명문의 사마를 은폐 시켜, 영구 봉쇄하여 해석하는 것을 방해하여 송산리의 도굴품 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한 공작이며, 일본역사서의 허구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사마가 삼국사기의 기록에 백제의 무녕왕의 이름으로 기록됨으로 도굴작물이라는 것이 나타남으로써 사마를 왜인으로 만들려고 출생의 비밀을 만들고, 백제를 왜의 속국으로 폄하하여, 사마가 왜국에서 백제에 돌아와서 백제왕위에 올랐다고 하기 위함 이다. 사마는 왜에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담로제국의 담로왕으로 군림하다가 웅진(공주)으로 돌아와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71년 7월, 사마왕의 지석이 발굴 이전까지 얼마나 사마를 죽이기기에 수 많은 허구로써, 심열을 기울여 왔다. 없는 허구의 역사라고 죽이어 매장하려 했든가? 왜 사마 죽이기기를 시도 ?을까?
경속의 사마가 남제왕(남자弟(아우)왕)= 개중비직에게 주어진 동경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공주에서 도굴해간 작물임이 드러나면, 일본역사서 모두가 백제역사서로 쓰여진 것이 탄로나니까? 은폐시켜 매장하기 위함이다. 백제기라는 백제역사서로 쓰여진, 신공기와 응신기가 비류백제의 역사로 드러남을 은폐시키려고 칠지도, 계미동경을 신공기의 삼한정벌할 때 신공황후에게 헌상된 작물이라고 은폐의 역사서를 만들어 왜곡하는 것이다. 우전8번신사경의 타당성을 인정받고, 6호분의 유물임을 감추고 일본의 보물이라고 하기 위하여 사마를 뒷전의 구경꾼으로 만들려고 하나 주인공 없는 글들을 해석불능으로 만들어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려 하는 것이다. 왕눈벌은 우전8번신사경을 계미동경이라고 한다. 계미동경은 1932년 왜인 가루베가 공주 송산리 6호분을 도굴하여간 도굴품중의 일부로써 다른 유물들은 일본 각지로 분산시켜 국보로 소장하면서도 , 계미동경은 경속의 글자 사마 때문에 내어 놓지 못하다가, 1934년부터 경을 해석하고 법석이다가, 역사가 고스란히 나타나자 쉬쉬 숨겨 두었다가, 1950년 한국동란으로 한국의 혼란 중에 슬그머니 내어놓으면서 이렇게 귀중한 것이 이곳에 있다고--. 그러면서 한국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휠난 하면서 1951년 6월 9일에 일본 考古국보2호로 만든 것이다.
사마를 왜인으로 만들기 작업을 시도함을 살펴보자. 오비야동굴의 전설을 만들어 사마의 이름을 필요로하여 왜인으로 은폐시킴 ! 사마는 곤지(개루왕의 아우)가 왜의 청병사로 갈적에 만삭이된 개로왕의 왕비(형수)를 데리고가다가 오비야의 동굴에서 태어났기에 倭語로 섬이 시마라서 시마왕시마왕하다가 사마라고 하였다는 전설을 만든 자들이다. 그렇게 사마라는 이름이 필요하여 만든 자들이기에 ---. 그리고 사마는 곤지의 아들로 만들려고 하였다. 1910년대에 발간된 全古大方이라는 책자(한국)에 사마왕은 蓋婁王의子로 되어있다. (1932년 계미동경 도굴이전의 한국의 책자.) 신공 46년조=224년대에 斯麻宿彌 인물이 있었다면 굳이 사마라는 이름을 만들이유가 없지 않은가? 경속에 나오는 사마는 사마숙미의 후손이라고 하면 될것을.... 칠지도를 가져다 바친 久저(신공황후 52년, 230년)와 사마숙미(신공46년 224년)의 가상 인물을 공동 출연시킴과, 칠지도와 계미동경을 신공황후때의 유물이라 함은 두 유물이 한 장소에서 나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바로 1932년에 가루베가 왜경의 철통같은 수비속에 한국인들은 접근도 못하게 하고 공주송산리 고분군, 모두와 5, 6호분의 유물을 도굴하여 간 것이다. 경속의 주체가 사마왕(503)이며, 받는분이 男弟王=開中費直인데, 서로다른 각각의 인물로 분류하여 남제왕을=계체천왕(507년)으로 만들며, 개중비직은 남제왕의 이름인데, 경을 만든 장인으로 만들고 있으며, 계미년엔 존재치 않았든 계체천황에게 헌상했다고 하는 도굴유물로 역사를 은폐시킴의 조작하는 도적들이다., 503년 계미년에 동경을 만들어 두었다가 507년에 왕으로 오른 계체천황에 주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 아닌 허구다. 1932년부터 삼국사기의 역사를 부정하드니, 1971년 이후에는 사마의 출생의 비밀을 만들고, 男弟王(남자동생왕) 을 계체천왕으로 만들고만 아이러니한 역사를 만든 자들이다. 동경속에 나타난 인물은 사마왕의 남제(아우)왕은 개중비직이며, 만든사람은 예맥인 금주리와 다른 한사람, 2인이 만들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왜인들은 念長壽遺(장수하길 염원하며)를 念長壽로 만들고, 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개중비직예인금주리)1인을 보내어, 다른 한사람(2인등)을 시켜서 만들었다고 왜곡시킴 타당할까?. 遣(견)자가 문맥에 맞지를 않으며, 遺자여야만 맞는 것이다. 開中費直濊人今州利를 河內費直濊人今州利라고 하는 것. 상식을 저버린 자들이다. 만든 사람이 예맥인금주리 1인과 다른 1인이었기에 2인등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하니 개중비직이 6호분의 주인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한은폐의 술수이다. 한자권에서도 가장 정교한 해석을 요하고 정확성한 뜻을 말하는 일본인들이 이경만은 모르세로 함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경과 같이 완벽한 보존이 된 것은, 무녕왕능의 유물의 동경도 똑같으며, 크기, 모양과 만든 기법이 그 시대의 것이다 일본의 황국사관과는 연관관계가 전연 없는 것을, 도적들이 백제역사서를 일본의 역사로 만들어 상관관계를 만들려하며, 백제의 문명과 동등선상의 역사로 만들기 위함이며, 일본이 백제서를 가지고 있음은, 일본속에 백제의 기록과 백제문화가 찬란히 꽃피우고 있음이 말하여 주는 것이다. 칠지도의 파괴와 글자의 候자를 倭자로 왜곡과, 계미동경의 遺자를 遣자로 왜곡함을 알지도 못하는 문의한들은 아닌지?.
한국의 역사 사학자라는 사람들도 이러한 아이러니한 수수께기의 해석에, 어느 누구하나 반론도 못하는 학자들을 학자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 한심 함.
일본 속에는 백제의 본향인 공주, 부여보다도 더 찬란히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은 백제의 역사서=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의 삼서가 일본에 있다는 것을 나타냄이며, 백제기로 쓰여진= 신대기와 응신기는 비류백제의 역사이며, 백제신찬으로 쓰여진=웅략기와, 무열기는 ???. 백제본기로 쓰여진=계체기,침명기는 온조백제역사서??. 그속엔 백제의 역사가 있으며, 백제의 역사로 왜의 역사로 둔갑 조작시킨 왜곡의 역사인 것? ??. 과연 일본의 역사는 어데서 부터 시작이며 끝일까? 한국의 사학자들이여! 두눈 크게뜨고 진실된 역사를 위하여 총 매진합시다.
한국의 역사는 친일파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그자들의 입김에 좌우되고 있다. 이승만이 독립투사 였을까? 그는 어용의 인물로 자기몸 보신 밖에는 없었든 사람이었고, 미국이 자기들의 꼭두각시로 한국 정부를 세우고, 독립투사들을 좌경으로 몰아 매장하고, 친일의 앞잡이들을 고용하여, 친일반역자들의 세상이 되어 현재에 이른 것. 그러므로 한국이 친일의 어용집단이 득세하는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그 조카 이병도는 역사를 팔아먹고, 그 손자 이장무는 MB정권이 들어서고 서울대 총장을 하고, 그의동생 이건무는 2008.3월부터 문화재청장으로 하고 있다. 세상이 친일한놈들의 세상이다. L씨들이 우리나라를 말아 먹는자들의 세상이 아니 었나!. -----. 친일앞잡이들은 민주투사의 탈을쓴 어용교수 들이, 민주투사로 군림하며, 국수주의자나, 독립투사들과 국민들을 좌익 빨갱이로 몰아 매장하고 있는 것은 친일을 청산하지 못함의 댓가이다. 이러고도 한국의 얼이 있다고 하겠는가?
지금도 독립투사의 집안은 어렵운 생활을 하고 있다. 친일에 앞잡이들은 지금도 큰소리치며 온갖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부를 누리고 있음이 통한스럽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지금이라도 과거 청산을하지못하면 미래가 불투명하다. 나라의 지도자상은= 국민의 4대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사람으로 국익우선 해야한다. 군대의무를 회피한자들이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않된다. 정도의 정의가 다스려지는 민주주의를 이룩하자.
국가의 훌륭한 지도자가 출연되면, 국가의 기강이 확립되어 국민들이 태평성대를 노래하며, 평안의 생을 영위하고 발전한다. 국가의 지도자가 잘못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인간들은 전장터에 나가 싸우지 않고, 힘없는 민초들만이 나라를 지킨다. 정치가들의 거개는 말들만 앞세우고 나라 팔아먹는데 앞잡이가 된다. 그리고 민초들을 핍박하고 착취하고 학살하는 것이 권력자,그자들의 단골 메뉴이다. 군대에가서 병역을 필하는 자는 힘없고 빽없는 백성들의 몫이고, 힘있고, 돈있고 빽있는자들은 도망가기 선수이고, 이권에 개입하는데는 늑대들이 되어 국민들의 호랑이로 군림하는 정치가 놈들이다. 지금의 한국의 우두머리들이라는 자들을 보라! 군대 않 갔다 온놈들의 세상이 아닌가? 군의 장군이라는 자들도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 항상, 재주부리는 것은, 힘없는 사람들의 몫이고, 힘있고 똑똑한 놈들은 실리와 권력과 재물을 독차지 하고 있질 않는가? 한국이 민주주의나라이거든, 나라를 통치하는 통치자는 반드시 군필자들이어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 지켜지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한 규율이 서지 않으면 항상 제이, 제삼의 이완용이는 계속이 배출되게될 것이다. 그자들은 자기의 안일과 자신 밖에 없는 놈들이다.
국가관이 뚜렷치 않은자들은 고위공직자에서 축출해야된다. 2010. 10. 12. 왕눈벌. 강환창.010-3403-3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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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꿀짱 왕눈벌 원문보기 글쓴이: 왕눈벌
첫댓글 왕눈벌의 덤의 인생에 할일이 두가지일중 목숨걸고 할일의 하나이다.
공주에 살고있음으로 공주의 정확한 역사 찿아 나선것이다.
다른하나는 벌꿀을 소비자가 알기쉽게, 천연벌꿀에만 벌꿀이라하고
설탕먹인것은 설탕물이라고, 설탕에 임버타제로 만든것은 가짜꿀로 표기되어야함.,
천연벌꿀만이 벌꿀이라고 하여야한다..
2013.6.25일 공주시회보에 왜인들이 왜곡시킨 "무녕왕이 일본의 가카리시마 오비야의 동굴에서 곤지왕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 기고문을 읽으며 분노가 치밀어 오금이 저려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위혀 왕눈벌이 나섰다 .
1913년에 발간된 전고대방이라는 역사서에는 개로왕의 아드님으로 기록 되어있다. 일본넘들이 사마를 알지못했을 적이다, 1932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 모두와 5호분과 6호분을 가루베가 완전히 도굴하여다가 다른유물들은 에다후나야마 유물로 만들었으나 6호분의 계미동경(우전8번신사경)만은 사마라는 글자때문에 우전8번신사에 숨겨두고, 갖가지 권모술수로 왜의 역사로 만든것. 사마癸未年은 503년, 신공황후 년대? 본문중 壽=寿글자를 못찿았다가 약자를 찿아서 바꾸고자함.
삼국사기를 모략비방하며 허구의 역사서로 몰아가다가 1971년에 무녕왕능의 발굴로 지석에 정확한 기록때문에 더이상은 말못하고, 함구하다가 1972년에 사마를 곤지왕의 아들로 만들기 시작한것(이병도-왈, 서기 撰者들이 백제신찬을 미루어 設을 설화로 적어 넣음)을, 왜 우리 공주인들이 그들의 놀음에 휘둘려야 되는가? 한심스럽고 수치스럽다.
일본의 고고국보2호로 만든 우전8번신사경(계미동경)을 신공황후가 백제를 정벌할적에 백제인이 받친 물건으로 만들고 있는데, 어찌하여 신공연대와 사마왕의 연대가 같단 말인가? 천인공로할 역사인것이다. 계미동경은 6호분의 유물이며, 사마왕이 담로왕이었든 아우 개중비직에게 만들어 준 동
남제왕은 남자동생 말하는 것이고 사마의 아우를 일 컷고있는 것이다. 사마왕은 곤지왕의 아들도 아니며 일본에서 태어나지도 아니 한것이다. 사마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써 의자사궁(의당 수촌 성책) 담로왕으로 군림하다가 동성왕이 암살된후에 왕에 오른 것이다. 수촌 고분군중, 1호분은 문주왕. 4호분은 삼근왕, 5호분은 삼근왕비 묘이다.
일본고서기는 일본의 역사가 아니라, 비류백제의 역사를 왜의 역사서 둔갑시킨 것이다.
야마대국, 신공기, 응신기가 비류백제사 이다.
응신왕 이후의 역사는 남하된 기록들이다.
시간나는 대로 까페지기 님께서 올린 글을 읽어 보도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뵙고 싶습니다 ()()()
사마는 일에서 탄생하지 않고 한성에서 개로왕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475년애 한성이 초톼화 되고, 개로왕이 살해되어 아우 문주가 왕족들을 수습하여 공주로 내려와서 공주에 정착하고,의당 수촌고분주위 토성주위가 의자가궁으로 한성 개로왕족 기거. 담로왕으로 계시다가 동성왕이 살해되자의자사궁에서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산성에 입성하여 왕에오른 것.. 수촌의 1호고분군이 문주왕능이고, 2호분이 문주왕비, 3호분이 곤지표? 4호분이 삼근왕의 능이고, 5호분이 삼근왕비의 묘이다. 송산리 6호분의 주인이 사마의 아우, 남제왕(의자사가궁의 담로왕으로 군림하든 개중비직의 능이다. 개중비직이 6호분을 만들고, 형 사마왕이 급서하자 자기능의 상좌에다 무령왕능을 만듬
남제왕 개중비직이 무령왕능을 만든 분이고, 6호분을 무령왕능 보다 먼저 개중비직이 자기의 능을 만드신 것이다. 일본의 에다후나야마 (선산)의 유물이란 것이 공주6호분의 유물이다. 환두대도의 글자를 발표되었기에 찿을수 있는 것이다. 옳바른 역사를 뒤돌리도록 힘모아 찿아나섭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백제 아신왕398년 ~전지왕429년까지 왜국이라는 글자가 나타나는데, 김부식이 웅진(공주)의 비류백제를 왜로 기록한것이며, 430년~653년 까지(의자왕 13년) 225년간 왜라는 글자가 자체가 없다. 일본서기라는 조작된 왜의 기록만이 백제와의 관계를 만들어 넣은것이다. 허구의 역사이다. 6호분에서 훔쳐간 역사로 만든 일본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