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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國版圖佐郞追封匡靖大夫僉議府贊成事 陽川許公 冠***
***(고려국판도좌랑추봉광정대부첨의부찬송사 양천허공 관)***
公의 諱는 冠. 양천허씨로 시조 공암촌주 諱 宣文의 11世孫 이다.
할아버지(祖父)는 樞密院副使 禮部尙書(추밀원부사 예부상서) 諱 수(遂) 이고 아버지(父)는
忠烈王廟庭(충렬왕묘정) 配享功臣(배향공신) 僉議府中贊(첨의부중찬) 修文殿太學士(수문전태학사) 世子師(세자사) 諡 文敬公(시 문경공) 諱 珙이며 母夫人은 尹氏로 政堂文學(정당문학) 克敏(극민)의 따님과 崔氏로 同知樞密院事(동지추밀원사) 澄之(징지)의 따님 두 분인데 公은 尹氏 소생으로 五兄弟중 셋째이다.
맏형은 東州使(동주사) 程(정)이고 둘째는 檢校政丞(검교정승) 嵩(숭)이며 아래로는 上將軍(상장군) 寵(총)과 藝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 富(부)이다.
高麗史列傳(고려사열전)에 따르면 당시 國制(국제)는 六品 이상의 관원은 과거에 응시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으나 謝恩(사은)하지 않은 사람은 예외로 하였다.
公이 郎將(낭장)에 제수 된지 4년이 지나도록 사은하지 않고 과거를 보자 公의 장인 송분(宋 王分)이"벼슬하는길이 많은데 하필 과거를 보려 하느냐"고 물으니 公은 "先人(선인)께서 제게 과거에 응시하라는 遺志(유지)를 남기셨으니 비록 수차례 응시해서 급제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父命을 어찌 어기겠습니까"라고 했다.
公은 마침내 1309년(충렬왕29년) 朴理의 방에 병과 1등으로 급제 했고 그 소문을 들은 왕이簾前(염전)에 불러 보시고 병풍과 띠를 하사했다.
公의 벼슬이 奉承郞 版圖佐郞(봉승랑 판도좌랑)에 오르고 5년뒤 致仕(치사)하니 匡靖大夫 僉議府贊成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광정대부 첨의부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로 추봉됐다. 1315년(충숙왕 2년)에 단비를 반기는 임금의 詩에 응답한 喜雨應製詩(희우웅제시) 두수와 出仕를 바라는 陳情詩(진정시) 한 수가 麗史列傳(여사열전)에 전하고 있다.
부인은 礪山宋氏(여산송씨)로 礪陽府院君 貞烈公(여양부원군 정렬공) 분(王分)의 따님으로
3男 3女를 두었다. 맏이는 백(伯.中書門下平章事 陽川君 諡 文正公)이고, 둘째는 선(文贊成事), 셋째는 교(僑. 開城尹)다.女는 덕수李千善,金仁軾,全義 李光起(判事)에게 출가 하였다.
그후 자손들이 크게 顯達(현달) 하여 증손 금(錦.典理司判書 諡 文正公)이고, 현손 기(梅軒公)는 廣州牧使 判奉常寺事(광주목사 판봉상시사)를 사양하고 향리풍양에 은거하며 지조를 지키고 학행에 힘씀으로서 그 덕행이 이름났다.
조선조 에서는 정승5인(琮, 琛, 頊, 穆, 積), 찬성2인(石宏, 磁), 공신 9인(琮, 琛, 惟禮, 石桑, 石廣, 磁, 浚, 적, 계, 選), 청백리 6인 (琮, 琛, 曄, 潛, 頊, 晶)이다.
그외에도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난 曄, 筬, 봉, 筠, 蘭雪軒楚姬, 厚, 필, 또 동의보감을 편찬한 醫聖許浚, 南宗畵의 맥을 일군 鍊, 瀅, 百鍊, 楗, 조선말 성리학의 마지막 맥을 이은 傳(性齋)
등이 모두 公의 裔孫이다.
公의 묘가 開城森樹里(개성삼수리)에 있으나 남북 분단으로 성묘의 길이 없어 서울 강동구 고덕동 산 93 - 2 제양군 묘역에 壇碑를 세워 추모의 念을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