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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시커멓던 백로(白鷺)
정몽주(0160)
정몽주(鄭夢周)는 1337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고려 인종과 의종 연간에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다. 정습명 이후 조상 중 큰 벼슬을 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가세가 기운 양반집 자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삭이 된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서 잠이 깬 직후 그를 낳았다 하여 아명은 몽란(夢蘭)이다. 아홉 살 되던 해 다시 어머니가 검은 용이 배나무로 기어오르는 남가일몽(南柯一夢)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배나무에 몽란이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몽룡(夢龍)이라 고쳤다. 몽주는 호패를 만들 때 다시 바꾼 이름이다. 몇 번의 개명(改名)은 아들이 입신양명(立身揚名)할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때 이미 이름이 좋아야 출세한다고 믿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정몽주의 문학적 재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 모른다. 이씨는 글공부하는 아들에게 말하고는 하였다.
“너는 백로여. 까마귀 노는 골에는 아예 가지 마라. 몸 더럽힐라.”
반쯤 운율이 실린 이 말씀을 아들은 가슴속에 깊이 새겼다가 나중에 완전한 시로 만들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러힐까 하노라
대개의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이 백로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정몽주 어머니의 까마귀 곁에 가지 말라는 가르침이 훌륭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정몽주는 결국 선죽교 위에서 까마귀떼로 상징되는 역성혁명파가 휘두른 철퇴를 맞고 죽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가르쳤다면 어떠했을까.
"까마귀하고도 어울릴 줄 알아야 하는 법이여. 혼자 백로인척 하면 따돌림 당한다니께.”
바이오코드는 정몽주가 진정한 백로였는지 속은 새까만 까마귀인데 겉만 백로인지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다.
정몽주는 입신양명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 애써 학문에 정진하였고,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배운 후,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디게 된다.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동문수학한 정도전은 정몽주보다 다섯 살 어리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이렇게 칭찬 했었다.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정몽주가 백로로 성장하여 백로들과만 무리지어 논 것은 아니었다.
정몽주는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올 당시,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소화한 뛰어난 학자인 동시에, 명나라나 왜국과의 외교적 마찰이 생길 때마다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수완을 발휘했던 외교가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異意)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
고려를 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명 태조는 트집을 잡기 위해 지난 5년간 토산품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진상품을 가지고 간 사신의 볼기를 친 다음 유배 보냈었다. 그런 상태에서 명 태조의 생일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선뜻 사신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친원파들이 정몽주를 제거하기 위해 그를 추천하였다. 더구나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생일은 불과 60일을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생일날에 맞추어 남경에 도착하였다. 가고 오는데 대략 5개월이 소유된 일정에서 정몽주와 정도전은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텐데 서로의 속마음은 털어놓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정몽주는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명 태조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언변과 한번 대하면 존경하게 되는 인격을 소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377년에는 왜에 사신으로 가서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저들을 교화시켰다. 이때 왜국에서는 정몽주를 환대하고, 왜의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한다. 귀국 할 때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말해주듯 정몽주가 탁월한 능력을 갖춘 외교가였다는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나뉘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파를 지지했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도 뜻을 같이하며 반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정몽주다. 까마귀들과 그런대로 잘 어울린 셈이다. 그러고 보면 정몽주가 철퇴를 맞은 것은 내내 까마귀들과 잘 어울려 놀다가 자신도 까마귀인 주제에 백로 행세를 했다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드려 뼛속까지 하얀 백로가 되지 못한 정황이 있으니 그의 어머니 교육이 잘못되었거나 정몽주가 잘못 성장한 감이 없지 않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몽주는 이성계를 새 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세력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차츰 역성혁명의 징후가 농후해 지자 더는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이때부터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정도전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이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한 정몽주는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감금시키고, 조준 남은 윤소종 등을 귀양 보내는 조처를 취했다. 지금까지 이성계와 잘 어울리다가 결정적으로 이성계 측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 것이었다. 잘하면 그가 고려의 최고 실력자가 될 기회를 맞이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방원이라는 복병을 간과한 것이었다.
위기를 감지한 이방원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행동을 개시 하였다. 이방원은 황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를 귀경시키는 일에 발벗고 나선다. 이성계는 서둘러 말이 아니라 가마에 실려서 개경으로 돌아 왔다. 그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정몽주는 이때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찾아가서 상황을 살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소와 다름 없이 태연한 자세로 정몽주를 맞이한 이성계에게서는 특이한 요소가 발견되지 않았다. 심증은 굳어 있었지만 모반이 화급하게 발생할 것 같지는 않게 여겨졌다. 정몽주는 위기 감지 능력이 이렇게 둔했었다.
이방원이 돌아가려는 정몽주에게 주안상을 마련했다며 잡아 앉혔다. 술이 한 잔 들어가면 취흥의 도도함을 시로 읊는 것이 이때도 사대부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술상 옆에 준비되어 있던 지필묵을 이용하여 이방원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시 한편을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적었다.
如此亦如何(여차역여하)
如彼亦如何(여피역여하)
城隍堂後垣(성황당후원)
頹落亦何如(퇴비역하여)
吾輩若此爲(오배약차위)
不死亦何如(불사역하여)
이것이 이른바 하여가(何如歌)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순응과 화합을 강조했다. 물 흐르는대로 흘러가자는 회유적 낙관론을 표출한 것이다. 번역하여 읽어보면 뜻이 자연스럽게 전달되어 온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이 붓을 정몽주 앞으로 내밀었다. 정몽주의 화답시를 단심가(丹心歌)라 한다. 포은집에 실린 내용은 아래와 같다.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一百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寧有改理與之(영유개리여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단심가에는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 없어지거나 말거나 일편단심은 지키겠다니 비장감이 흐른다. 그러나 공격적인 칼날을 세운 것이 아니라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써 보수 지향적 심중을 들어내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혁신적인 개혁은 반대한다는 의사표시만은 분명하게 한 것이었다.
더 이상 그를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지교 위에서 습격, 철퇴를 이용하여 쳐죽인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는 56세 였다. 이후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을 정몽주에게 씌워 저자거리에서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냈다. 더 이상 역성혁명을 견제할 세력은 없었다.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으로부터 선양받는 형식을 취해 등극한 다음 새로운 나라 조선의 태조가 되었다.
정몽주의 단심가 '임 향한 일편단심'에서 그 임은 공양왕이다. 자신에게 수문하시중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쥐어준 공양왕이 그의 임이라는 것은 대다수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려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자신의 입신양명만을 돌보았다는 말이 된다. 정몽주는 신돈과 더불어 정치를 했으며 훗날 그 자신의 입으로 신돈의 자식이라고 폄하했던 우왕과 창왕을 보위에 오르도록 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었고, 이성계 일파와 협력하여 두 임금을 다시 끌어내리고 공양왕을 올리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리를 펴기도 했었다. 이런 점이 그가 온전한 백로라고 여길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까마귀들과 어울려 잘 놀다말고 자신을 수문하시중으로 발령한 임명권자에 대해 충절을 맹세한 것이다. 헐벗은 백성을 돌보지 않았으니 가문과 자신의 영달을 위해 그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는 속속들이 사무친 충신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충신일 뿐이다.
정몽주가 의인이었다면, 진실로 유교가 가리키는 진짜 충신이었다면 신돈과 더불어 영화를 누리지 말았어야 한다. 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쿠데타를 지지해서는 안되었다. 또 우왕, 창왕을 옹립하지도 말았어야 하고, 자기가 모시던 우왕,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고 모욕하지 않았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왕,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하는 일에 앞장서선 안 되었다. 그 모든 것을 다한 정몽주가 어떻게 충신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일편단심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의 행동에는 정의가 없다. 진정한 충은 정의를 지키는 마음가짐 속에서 우러난다. 패주든 성군이든 주인이기에 모셔야 한다는 것은 신(信)은 될 수 있을지언정 충은 아니다.
정몽주의 충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충이었던 것이다. 임향한 일편단심이 진정한 충이 되기 위해서는 정의가 살아 있어야 했다. 정몽주의 그런 무조건적인 충은 전제국가 시절의 백성도 비웃었고 요즘 같은 공화국의 국민들은 절대 숭상하지 않는다. 맹목적 충성을 받고 싶어 하는 임금이나 대통령만이 좋아하는 충일 뿐이다.
정몽주는 선지교 사건 이후 오래도록 도당을 이뤄 국기를 문란시킨 간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그가 그를 죽인 이방원에 의해 신원되면서 충신으로 변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죽은 선지교는 절개의 상징인 선죽교로 바뀌고, 붉은색을 띠는 축석은 정몽주의 피가 묻은 돌로 꾸며지는 식으로 윤색되고, 간신 역적을 성리학의 대가이자 충절의 상징으로 만들어 13개의 서원에서 제향을 올리도록 한 장본인은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일 때와 태종이 된 후의 입장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국왕에 충성하는 신하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정도전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쿠데타 동지이자 조선을 설계한 국부(國父)이며,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태종에게는 무찔러야 할 신권(臣權)의 태두며, 정적일 뿐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역적으로 몰아 주살했던 정몽주를 정도전의 신권을 억누를 수 있는 카드로 선택한 것이었다. 신하는 신하일 뿐 오로지 국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 맹목적인 충성심을 발휘했던 정몽주를 이용했다. 보위에 오른 절대 지존에게는 무조건 충성해줄 신하가 필요하지 개혁을 외치거나 임금을 가르치는 정도전 같은 신하는 필요치 않았다. 그 결과 '태조 이성계가 인정한 충신 정도전'은 간신이 되고, '이방원 자신이 규정한 간신 정몽주'는 충신으로 뒤바뀐 것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빛내기 위해 정작 조선 왕조를 최고의 신권 국가, 철학의 나라로 설계한 정도전을 노비 출신의 간신으로 폄하시켰고, 박정희 대통령은 충신 이순신을 만들기 위해 권율, 이순신과 더불어 선무일등공신 3인에 속하는 원균을 교활한 간신으로 격하시켜 놓았다. 태종이 정몽주를 역적에서 충신으로 둔갑시킨 목적이나 박정희가 정몽주나 이순신을 충성의 표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 이유는 같다. 그들과 같은 충성심을 백성이나 국민들에게 요구하기 위해서다. 정몽주는 이렇게 태종 이방원과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진 관제 충신이지, 정의를 지키다 쓰러져간 진정한 충신은 아니다. 백로도 아니고 까마귀도 아닌, 필요에 따라 오고간 기회주의자라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
바이오코드를 분석해 보면 그의 인물 됨됨이가 더 극명해 진다. 그의 바이오코드는 0160이다. 이 코드는 겉으로는 낙천적이고 여유가 많은 것 같아 보이나 실제로는 변덕이 심하고 귀가 얇아 남의 말에 좌우되므로 중심을 잃기 쉽다. G01과 G12의 안전, 명예, 자산 등에 대한 유혹이 있을 때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간다. 유혹을 떨쳐내고 지조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공민왕 때는 신돈과 뜻을 같이 했었고, 우왕 창왕을 보위에 올리는 일에 동조하다가 그들을 폐위시킬 때도 앞장섰던 정몽주는 중심이 확실했던 사람은 절대 아니다.
본인은 가만히 기다리는 것, 말 안하고 버티는 것도 일종의 행동이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지루함을 잘 못느낀다. 그래서 긴장하지 않고 행동이 느리다. 이것은 본질을 보는 시야가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몽주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공양왕을 끼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본인도 허망하게 맞아죽고, 그가 지키려던 공양왕마저 비참하게 죽게 만들었다. 이때 이미 고려 왕조는 이성계가 아니라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여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새로운 활로를 열어야지 무너지는 하늘을 떠받치려 한 것은 본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0160은 내면에 강력한 발전기를 갖고 있다. 안정에 대한 희구가 강해 성미가 급하게 나타날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늘 평온한 듯한 0160에게는 웅변력이 있으며 솔직하고 인간적이고 관대하며 강하다. 게다가 부와 권력, 영향력, 지배와 권세에 대한 야망도 가지고 있다. 이를 볼 때 정몽주가 유능한 외교가였던 것이 우연히 아니며, 공양왕을 모시는 것으로 고려의 최고 실력자가 되고 싶었던 야심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0160은 자체로 합이 되기 때문에 지나치게 주변 정세를 낙관하거나 매사에 긍정적이다. 그만큼 위험에 대한 인지 반응이 느리다. 지나칠 정도로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 0160의 단점이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식으로 안전하다는 확인을 거듭 한 뒤에야 비로소 움직인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더 검토해보자, 더 생각해보자고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길을 찾는다. 정몽주는 이방원에 비해 위기 감지 능력이 뒤졌고, 충분히 절박한 상황임에도 그것을 낙관했으며, 너무 신중을 기하다가 철퇴를 맞은 것이었다.
0160을 당황하게 하는 건 간단하다. 무조건 충동적으로 대하면 아마 크게 놀랄 것이다. 그것도 밑도 끝도 없이, 무원칙, 무논리로 대응하면 더욱 그렇다. 말투가 거칠수록 스트레스를 받는다. 법규, 신호 따위를 지키지 않고, 상스런 말을 자주 내뱉으면 아마 다음에 다시 만날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던 매우 바쁘게, 빠르게 진행하면 거의 따라오지 못한다. 무엇보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존심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0160은 분노할 것이다. 그렇다면 0160에 대한 공략법은 나온 것이다. 0160이 싫어하는 것을 하면 돤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한 것은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이었다. 0160은 그런 기습에 대처하는데 아주 취약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자기를 죽이리라고는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죽여도 기습적인 철퇴가 아니라 누명을 씌워 귀양을 보내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0160은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자신이 그런 누명을 쓸 이유가 없다고 여길만큼 낙관적이다.
세상은 법대로, 원칙대로, 관습대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여기는 낙관론자 정몽주는 철퇴로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행동주의자 이방원으로부터 가해지는 위기를 감지할 능력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격식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그런 착각을 1392년 음 4월 4일 선죽교 위에서 철퇴로 철저하게 응징하였다.
정몽주는 이방원이 이런 인물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미구에 자기를 죽일 사람인데도 그가 적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었다. 다만 이성계를 경계했을 뿐 이방원은 애송이에 불과했었다. 정몽주의 적은 이성계가 아니라 이방원이었는데도 그것을 몰랐다. 이성계는 아들로부터 정몽주를 죽였다는 보고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죽여서 어떻게 민심을 얻겠는냐고 화를 냈었다고 하니, 분명 정몽주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성계를 한심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가한 꼰대라는 지적은 받을만 하다. 이방원이 나서지 않았다면 공양왕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던 정몽주에 의해 이성계가 거세될 수도 있었다. 한심한 것은 정몽주다. 주적이 누군지도 몰랐고, 위기상황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고, 너무 몸을 사렸다. 나이도 어린놈이 감히 고려국의 대 수문하시중인 나를 어쩌겠는가. 이러면서 무시한 감이 있다. 그러나 성격에 무슨 노소의 차이가 있는가. 철퇴 휘두르라는 지령을 내리는데 큰 힘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나이같은 것은 애시당초 개입할 여지도 없다. 생각과 그에 따른 말이 전광석화와 같았을 뿐이다. 생각은 나이가 아니라 바이오코드가 결정하는 일이다.
이방원은 원래 그런 인물이었다. 왕자의 난을 두 번이나 일으켜 건국 공신인 정도전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보위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었다. 정몽주는 그런 이방원을 애송이 쯤으로 여기는 타고난 성격의 특성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도리어 상대에게 더 쉬운 기회를 헌납한 바보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정승화나 최규하가 전두환에게, 이회창이 김대중과 노무현에게 정권을 내준 것처럼 역사가 바뀌는 갈림길에는 이와 같은 별들이 나타나 전쟁을 벌이는데, 결과는 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래서 별들의 전쟁사를 돌아보는 일이 재미있다.
첫댓글 0160은 자체로 합이 되기 때문에 지나치게 주변 정세를 낙관하거나 매사에 긍정적이다. 정몽주에게는 이것이 문제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