領相公(諱 錫) 거주지 탐색
영상공(領相公) 諱 錫 께 서는 1495 年 10월 11일 서울에서 독자로 출생하셨다
정암 조광조 선생에 수업하셔서 도학 문장으로 사림 들에게 명성이 높으셨으나 성균진사로 벼슬에 나가지 않으셨다.
1519년(중종 14년)을유사화에 정암 조광조 가 연루되어있음을 알게되어,
서울 용산 주자동에서 홀로되신 자당 의성 김씨와 부인 행주기씨, 5세가된 충갑 을 존거하여
외가댁인 괴산군 문광면 으로 피하셨으며,
슬하에 5남 2녀를 두셨는데 諱 충갑,효갑,우갑,제갑,인갑 이라하여 오갑 이라합니다.
문법3리 입구에는 좌측산 능선이 끝부분으로부터 편안한 선을 그리며 살짝 가라앉듯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숲이 보인다.
490여 년 전 영상공의 주창으로 세워진 일명 문법숲이다.
문법리에 사시면서 이 마을의 지세를 세밀히 살핀 공께서 남쪽이 허한 것을 발견하고는
이곳에 높은 둑을 세우든가 숲을 조성하여 멀리 대로가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며 조성하신
숲이라 전한다
영상공의 모친이신 의성김씨 의 고향이며 외가로하여,
이곳에 정착하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영상공의 외가인 의성김씨 집성촌은 이곳으로부터 청천쪽으로 조금 더 가서 있는 옆 마을인 양곡리이다.
문법숲을 조성한 것은 약 490여 년 전부터 영상공의 주창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계속해서 식목을 해 왔으며 주 수종은 느티나무와 참나무이다.
일부에서는 경주김씨가 먼저 조성하기 시작했다가 후에 영상공께서 이어서 이 사업을 지속했다고 전하는 말이 있다고 하나 이는 잘못이다.
일찍이 이곳에 경주김씨가 살았던 적이 없다.
주변 산에 경주김씨 묘는 없고 온통 우리 안동김씨 묘만 있다는 것은 이 말의 와전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문거리표(里門距離表) 표석은 마을 입구라는 의미로 490여 년전 영상공께서 세우신 것인데 글씨는 없는 것 같다.
원래는 현 위치(문법숲 입구에 설치)가 아니라 문법 3리 마을(문법숲 상단 위쪽) 좌측 끝 가옥에서 약 50m 좌측의 논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오래 전에 한 사람이 이 돌을 자기네 논의 물고 위에 작은 다리 용도로 썼다.
그 후 그는 갑자기 몸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이를 다시 원 자리에 세우니 신기하게도 아프던 몸이 나았다. 약 30년 전에 김천응종친(참봉공 후손)이 이를 현 위치인 문법숲 아래로 옮겨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