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한반도에는 그 전에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경순왕의 여러 아들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비석이 등장한다.
이름하여 김은열 묘지명(金殷說墓誌銘)이다. 그러나 실체는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대해
"묘지명은 『경주김씨족보(慶州金氏族譜)』(경기 고양, 1985)에 수록되어 있다. 968년(광종19)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찬자는 미상이다. 1784(정조 8)에 발견되었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김은설(金殷說 : ?~968)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 때 관직이 평장사(平章事)였다. 묘지명에 나타난 위의 기록 외에 『고려사』 등에서 그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묘지명도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우선 명문(銘文)이 없다. 또한 가계, 죽은 해, 장례일과 장지, 형제와 아들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어 묘지명의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실물이나 탁본이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족보에만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서 축약되었거나, 발견된 실물이 파손되어 온전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라며 경순왕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고 하고 있다.
묘지석도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탁본도 없다. 그럼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족보조작이 진행되던 시기에 나온 금석문...
묘지석 실체가 전해지지도 않는다...
심지어 탁본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때 관직이 평장사면 정2품 높은 관직인데 고려사에 조차, 또 그 이후 모든 문헌에도 800년 넘게 존재하지
않은 이름이다. 상식적인 생각에서 많은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경순왕은 죽방부인 박씨를 왕비로 맞이했으며, 아들 둘을 두었다고 한다. 그 중에 한 명을 일제시대에 와서야 마의태자라고 우리는 부르고 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1000년간 마의태자란 이름은 없었다. 즉, 국가도 인정을 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묘지석도 없고, 탁본도 없는 족보의 판독문을 살펴 보자.
우선 판독이 안된 글자(?)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新羅敬順王金傅第四子侍中侍郞有高麗平章事殷說卒于戊辰三月初四日己丑葬于城北十里鍾岩下五龍山南麓雙龍合金壬坐之原兄則鎰次?次鳴鍾弟曰重錫曰 鍵曰鐥曰鍾子江陵君泰華 〔출전:『慶州金氏族譜』(1985)〕
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판독문에 대한 김용석씨의 해석은 아래와 같다.
"신라(新羅)1)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네째 아들로, 시중 시랑(侍中 侍郞)이고 고려의 평장사(平章事)인 은설(殷說)이 무진년 3월 초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의 북쪽 10리 되는 종암(鍾岩) 아래 오룡산(五龍山) 남쪽 기슭의 쌍룡(雙龍)이 어우러지는 북쪽[壬坐] 언덕에 장례지냈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굉(?)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18세기말에 혜성처럼 등장한 묘지석도 없고 탁본도 없는 금석문이라고 말하기 이상한 금석문이 등장하면서 8명의 아들들은 모두 후손들이 생겼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내 조상을 보면 아드님이 넷이어도 몇 대 가지 못하고 후손이 다 끊기고 한 분만 후손들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경순왕은 아들 8명이 1000년 넘게 그 후손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조선 고종도 10명이 훨씬 넘는 자녀가 있었으나 하나 둘 사망하고 성인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5명 밖에 되지 않는데, 900년전 고려시대는 첨단 의학의 발전으로 700년 넘게 전혀 사서에 기록조차 없던 수 많은 아들들이 모두 다 죽지 않고 살았나 보다.
신기한건 족보에 대를 잇는데 필요한 아들만 여덟 존재하고 딸(사위)은 일체 나오지 않는 신박한 묘지석.... 거기에 뭐 아들이 여덟인데 야구는 9명이 하니 아들 하나 덤으로 추가해서 9번째 아들은 지금에 와서 울산김씨의 시조라고 하니 허허허...
아무리봐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경순왕 아들 아홉은 근거가 없다.
첫째는 부안김씨 시조
둘째는 나주김씨 시조
셋째는 영분공파 시조,
넷째는 대안군,
다섯째는 의상김씨 시조,
여섯째는 강릉김씨 시조,
일곱째는 언양김씨 시조,
여덟째는 삼척김씨 시조,
아홉째는 울산김씨 시조 등등등...
어디 여기뿐이랴... 아홉째까지 이을데가 없으면 어디 하나 선택해서 아들이 더 있었다고 하고,
또 손자를 시조로 해서 00김씨하면서
거의 모든 김씨들이 모두 경순왕의 후손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라 김씨 왕이 경순왕 한명이었나?
30명이 넘는 김씨 왕이 있었고, 그 일가족 후손을 포함하면 몇백 몇천까지도 갈 수 있을지언데
거의 모든 김씨 조상이 경순왕 후손이다?
족보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경순왕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사실이 아닌 허구에 기반한 허위자료면 그게 족보인가 싶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없다면 신라왕실의 후손이 절대 아니다...
제56대 : 경순왕(敬順王)
?∼979. 신라 제56대왕. 재위 927∼935. 본관은 경주(慶州).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효종이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며, 할아버지는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추봉된 관○(官○)이다. 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 슬하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결혼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935년 그는 신하들과 더불어 국가를 고려에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백료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했는데, 그 지위는 태자의 위였다. 왕건은 또 그에게 녹(祿)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채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무덤은 장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