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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장군 정기룡(鄭起龍, 1562~1622) 장군을 아십니까?
-60전 60승!
상승장군(常勝將軍)이란 언제나 이기는 장군을 뜻한데 해상에서는 단연 이순신이요,
육지에서는 정기룡장군을 꼽는다.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도 상승장군이요 일본의 히데요시도 상승장군이라 하지만
바다의 이순신장군은 익히 알고들 있어 육지의 정기룡장군에 대해서 올리고저 한다.
정기룡장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분이 많지 않으리라 본다.
* 출 신
본관은 진주.곤양 정씨(昆陽鄭氏)의 시조. 초명은 무수(茂壽) 호는 매헌(梅軒).
1562년 경남 하동군 금남면에서 증좌찬성 정호(鄭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그의 아버지도 그의 이러한 기질을 아는지라 굳이
글공부를 시키지 않고 어릴 때부터 무술을 연마하게 하였다.
1580년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조의 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한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서 일하였고, 다음 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전 적
무과에 급제 한후 159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립(申砬) 휘하로 들어가 이듬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돌격장이 되어 금산과 거창에서 일본군 500명을 격퇴시켰다.
☞ 장군은 합천의 야로로 진군하여 적병 10여명을 목베고, 안음(安陰)을 습격하고 거창을 들이쳐 적군 100여명을 사살하니, 장군의 위풍에 놀라 왜적들은 장군이 나타났다는 소리만 들으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되어 버렸다.
☞ 금산 전투에서 정기룡의 직속상관인 조경을 필마단기로 뛰어들어 구출하였는데 이 모습이 마치 당양에서 아두 유선을 구하려고 뛰어든 조운과 흡사하여 '임진왜란의 조자룡'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이때 조경의 실수로 완전히 적의 포위망에 둘러쌓이게 되자, 그는 단지 나무몽둥이 하나로 좌충우돌하면서 부하들을 데리고 적의 포위망을 뚫은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
그때 그의 뒤를 따라 살아난 김태허는 병사(兵使)가 된 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한다.
"정장군은 언제나 적병만 보면 더욱 용기가 솟구치고 찢어질 듯한 눈은 더욱 커졌다. 노기에 차서 이를 가는 그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든든했었다."
그리고 정기룡 그는 언제나 자기가 벤 수급(首級)을 모조리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이에 대해서도 김태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기는 다음번에 갖겠다고 하고서는 또 그다음 전투에도 마찬가지로 남에게 적의수급을 주어 공을 세우게 해주었다. 생각하면 오늘날 나의 지위도 정장군의 덕택이다."
☞ 금산 전투에서 조경을 구출한 뒤 곤양의 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데결정적 공을 세웠다.
☞ 상주성을 얻는데 성공하고 계속하여 여러 공을 세우게 되어 왜란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정기룡은 유격전의 달인으로 왜군이 보는 앞에서 왜군의 배를 갈라 생간을 씹어먹으며 돌격해 7일동안 25개의 왜군부대 총9천명에 가까운 왜적을 고작 700명의 병사로 해치우는 등 당시 왜군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다.
☞ 한번은 달아나는 적병을 낙동강변까지 쫓아 50병을 목잘라 버리고 다시 성주로 돌아와 백성을 안도(安堵)시키니 "제갈량(諸葛亮)이 다시 살아났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 이어 영남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부름을 받고 임시로 상주판관이 되었는데, 그때 일본군을 많이 격파한 공으로 상주목사 겸 감사군대장이 되었다.
☞ 불과 1년 사이에 무려 10품계나 뛰어올라 전쟁 1년 만인 1593년 32세의 나이로 경상도북부 28개 고을을 관장하는 상주목사(정3품)가 되는 파격을 누렸다.
☞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부름을 받고 대장으로 임명되어 9읍(邑)의 장관과 함께 금오산성을 지키고 고령에 나가 적을 격파해 적장을 참수했으며, 일본 장수 중 하나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를 보은 사암에서 수십 명을 격살하고 그 공으로 경상우병사가 되었다.
☞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고령(高靈)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사로잡는등 큰전과를 올리고 계속 성주, 합천(陜川), 초계(草溪), 의령(宜寧), 고령 등 여러성을 탈환,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승진하고, 이어 경주, 울산(蔚山)을 수복했다.
☞ 또한 명나라의 장수 양호(楊鎬)의 선봉으로 울산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摠兵)을 대행해 경상도 방면에 남아 있던 일본군을 소탕하여 용양위부호군이 되었다.
1592년에서 1598년에 걸친 7년간의 임진·정유왜란에서 아무리 적은 군대를 이끌고도 한 번도 왜군과 싸워 져본 일이 없는 상승장군(常勝將軍.60전60승)으로 해전(海戰)에서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있듯이 육전에서의 충무공에 비길 수 있는 지략과 담략과 무용을 겸비한 장군이며 왜군이 쳐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한 경상도가 그나마 다행한 것은 정기룡 장군과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경상도 출신으로 소수의 군사로 유격전법(遊擊戰法)을 도처에서 벌여 왜군을 무찔러서 백성을 도탄에서 건졌기 때문이다.
대소 100회가(공식적으로60전60승) 훨씬 넘는 전투에서 정기룡은 한번도 패한 일이
없었고, 빗발치듯 날아오는 총탄에 한번도 몸을 상한 일이 없었으며, 항상 유격전술을 써서 훈련되고 정예화된 왜군의 허를 찔러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 전장에서 갈증이 나면 왜병을 죽여 간을 꺼내어 목을 추길 정도로 용맹하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후일 정기룡의 3대선조를 추봉(追封)하고 그에게 용양위 부호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가선대부(嘉善大夫), 김해군호부사가 주어졌으며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봉해지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재임되었다.
그 후 계속해서 선조가 베푼 그에 대한 애정은 삼도통제사,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내리기도 했다.
선조가 항상 말하기를, "기룡이 아니었던들 영남이 없었고, 영남을 잃었던들 나라를 잃었을 것이다."
(선조가 이순신장군은 질시하고 미워했는데, 정기룡장군은 어린까닭에 총애했다한다.)
1671년 광해군 때에는 3도 수군통제사에 올랐다.
*공훈에서 배제
다만 정기룡은 이순신 못지 않은 활약을 육지에서 보여 당연히 선무공신이 되어야 마땅 했으나 이미 사망한 이순신이나 환갑을 넘긴 권율과는 달리 임진왜란이 종결된
시점에서 정기룡은 40살도 채 안된 상태였으므로 선조는 정기룡을 정치적으로 경계하기 위해 선무공신에 선발하지 않았다.
혹자는 "정기룡 장군이 초기에 전쟁 공신에서 배제된 것은, 이미 사망한 이순신과 원균, 환갑이 넘은 권율에게만 선무 1등 공신에 추품한 것만 봐도 안다"며
"37살의 젊은 살아있는 전쟁영웅이 선조는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해석하며
여운을 남겼다.
한편, 정기룡 장군이 이렇게 상승장군으로 활약하였는데도 그 이름이 생각보다 덜 알려진 이유는 임진왜란 끝나고 전공을 세운 장수를 선정할 때 당시 임금 선조는 정기룡 장군이 30대로 아직 어렸고, 그의 힘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소 의식적으로 누락시켰다고 한다.
훗날 5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선무1등 공신으로 추대하여 그의 전공을 인정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잘못된 공신목록을 바로 잡는다는 전교와 함께...
*일 화
전설에 따르면 정기룡 장군의 어머니는 홍역에 걸려 출산중 죽게 되는데, 가족이 염을 하던 중 그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가 있는 것을 보고 어찌할줄 몰랐다.
사흘후 어머니는 사망하고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정기룡이라고 한다.
정기룡은 태어날 때부터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고 하늘엔 무지개가 떠 마을 사람들은영웅이 탄생한 것이라 믿었다. 정기룡은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용감하였으며, 진주성싸움에서 강씨 부인을 잃는 슬픔에도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강씨 부인을 잃은 후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그의 부인 또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웠으나 주위성화에도 결혼 않다가 노처녀가 되고 정기룡장군을 만나고 나서야 정기룡 장군과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장군은 전란중의 상황과 그의 옛 부인을 떠올리며 고민했지만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고 부인(권씨)은 말을 키우고 있었는데 날쌔고 힘이 세어 정기룡 장군이 늘 타고 다녔다고 하며, 이 말이 장군이 공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전해진다.
정기룡장군의 본명은 정무수로 정기룡이 된 사연은 이렇다.
정무수는 과거를 보러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그 당시 임금인 선조가 꿈을 꾸자 그 꿈에종각에서 용이 자고 있었고 그래서 종각에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무수였다.그가 무과 시험에서 무용이 출중하여 급제하자 선조가 ‘起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민간신앙의 대상으로도 널리 퍼져 상주 등지에서 호랑이나 용도 장군에게 꼼짝 못했다는 전설과 황소에게 갑옷을 입히고, 그 꼬리에 불을 질러 왜적의 진중을 교란케 함으로서 승전고를 올렸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그것은 결국 그의 무훈(武勳)과 백성들의 그에 대한 기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전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실로 그는 단순한 명장을 넘어서 민중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무인(武人)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 망
1622년(광해군 14년), 3도수군통제사로 통영(統營:지금의 통영시) 진중에서 향년 61세에 병사하였다.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그의 묘가 있으며 경북 기념물 제13호이다.
또한 출생지인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마을에 사당인 '경충사'가 있고 중평리 당산골 정씨사당 아래쪽 100m지점이 정기룡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밭이 되어 있고 생가 뒤쪽에 있던 대밭이 약간 남아 있다.
낙동강변 경천대에는 정장군 동상이 서있으며
묘소는 고향(경남 하동군 금남면)이 아니라 어머니 묘소가 있고 자신이 목사(牧使)로 근무했으며 상주성 탈환에 피를 흘렸던 상주에 묻혔다.
상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정기룡 장군님을 기억하고 후세에 길이 전파하자..
- 정기룡 장군 활터 충 의 정 -
첫댓글 충의공 정기룡 장군
나라를 구한 영웅을 현세에 아는이가 드물다
이기는 전투만 하여 이긴 장군보다
전투만하면 이기는 정기룡장군을 어찌 조용히 기억하겠는가?
충의공이 있어 상주가있고
상주가있어 조선이 있다
그리고
조선의 심장같은 상주땅에
충의공 정기룡 장군을 기억하고자
활터를 세우고
충의정이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