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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큰스님은 누구인가?
“금생 세연 다했으니 이제 가련다.” 지난 2003년 11월 12일, 전남 곡성의 성륜사 조실 청화 스님은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종식의 계율에 따라 낮에 한 끼의 공양을 하시고, 저녁에는 상좌들과 법담을 나누셨다. 이 자리에서 스님은 ‘금생 세연이 다했으니 이제 가련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밤 10시 30분 홀연히 입적하셨다. 이어 11월 13일, 전남 곡성군 옥과면의 성륜사에서는 청화 스님의 다비식이 열렸다. |
이어 11월 13일, 전남 곡성군 옥과면의 성륜사에서는 청화 스님의 다비식이 열렸다. 문도들은 다비식에 앞서 평생 청빈을 강조하며 생활하신 청화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일체의 조화를 받지 않는 등 다비식을 하기로 했지만, 이날 곡성은 전례없는 인파의 추모 행렬로 읍내 전체가 몸살을 앓았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불자와 신도들로 인근의 고속도로가 막히고, 곡성 시내까지 주차장이 되다시피 했다. 이날 다비식에 참여한 인원은 2만여 명. 생전에 처화 스님의 가름칠을 받은 신자들도 많았지만, 친견을 하루하루 미루어오다 마침내 입적 소식을 듣고 황망하여 달려온 불자들이 더 많았다. 큰스님의 열반 앞에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조용하고도 경건한 눈물을 뿌렸다. 사리 수습 따위로 법석을 피우지 말라는 스님의 유언에 따라 청화 스님의 사리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비교의 대상을 찾아볼 수 없는 대형 사리들이 쏟아져나왔다. 이 사리들은 현재 곡성 성륜사에서 친견할 수 있다.
입적하시기 전, 스님은 굳이 임종게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게를 남기셨다.
이 세상 저 세상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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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청화 큰스님!
‘반세기 동안 장좌불좌와 일종식을 고집한 당대 최고의 선승.' ‘스승 금타 화상의 뒤를 이어 염불선을 주창하고 이를 현재에 되살린 고승.' ‘불교 사상은 물론 현대의 철학과 자연과학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모든 불교 사상의 회통과 일월화를 주창한 원통불교의 주창자.' ‘끝없는 하심으로 찾아오는 모든 이를 제도한 살아 있는 생불.'
하나같이 청화 스님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수식어들이다. 이러한 청화 스님은 1923년 전남 무안에서 상당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고, 속명은 강호이다. 훗날 교육사업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사찰들을 세우는 데 속가의 재력이 바탕이 되었다. 14세에 일본에 건너가 5년제 중학교를 졸업했고, 귀국해서는 교육사업에 뜻을 두어 다시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친구들과 고향에 망운중학교를 세우고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유학길에 올라 메이지대학교에서 1년을 공부했고, 수학 도중 징용되어 귀국했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출가를 하게 되는데, 그 즈음 스님은 이미 부인과 아들 하나를 둔 가장이 되어 있었다. 출가의 동기와 배경에 대해 스님은 이런 얘기를 남겼다. “내가 청년시절부터 철학을 좋아해서 동서양서적을 섭렵했습니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다 보니 자연히 불교서적을 접하게 되더군요. 불교입문서를 보고 나름대로 윤곽을 잡았었죠. 그런 뒤 절에 있던 집안의 육촌동생이 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바로 따라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수양도 좀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금타 화상을 보는 순간 미련없이 출가를 해버렸지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님은 1947년 전남 장성군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화상을 은사로 출가 득도하게 된다. 금타 화상은 호남 불교의 큰 맥인 송만암 선사의 제자로,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웅 스님과 함께 수학했다. 백양사 방장으로 지잔해 말 청화 스님의 뒤를 이어 입적한 서웅 스님은 스승 금타 화상의 뒤를 이어 좌탈입망의 진기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서웅 스님은 청화 스님의 입적 소식에 ‘내가 먼저 가야하는데 청화가 먼저 갔구나. 나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날부터 곡기를 끊었다고 하며, 청화 스님의 입적 후 약 1개월이 지난 2003년 12월 13일 세수 92세로 입적하였다. 청화 스님 자신이 생불로 묘사했던 금타 화상은 통불교 이론을 주창한 큰스님으로, 1940년에 이미 「우주의 본질과 형량」이라는 논문을 발표할 만큼 현대 물리학에도 조예가 깊은 학승이었다고 한다. 청화 스님의 수행 방법과 이론 체계 대부분이 은사인 금타 화상의 뒤를 잇는 것이어서, 염불선이며 통불교 사상, 장좌불와와 일종식의 수행이 모두 금타 화상이 기초를 다지고 청화 스님이 그 위에 탑을 세운 격이다. 두 분모두 하루 한 끼의 공양을 평생 실천하고, 손수 짚신을 삼아 신고 빨래하는 일을 죽는 날까지 실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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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에는 밀라레빠, 한국에는 청화
금타 화상을 은사로 출가 득도한 청화 스님은 이후 40년 넘게 전국 각지의 토굴에서 수행정진을 계속해 나간다. 대흥사 진불암, 상원암, 남미륵, 월출산 상견성암, 백장암, 벽송사, 백운산 사성암, 혜운사 등이 스님이 수행하던 토굴들이다. 여기서 스님은 묵언과 일종식, 장좌불와를 원칙으로 수행을 해나간다. 스님이 고집한 장좌불와의 수행 원칙은 모든 수도승들에게는 하나의 전설이 되다시피 해서, ‘티벳에 밀라레빠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청화가 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밀라레빠는 티벳 밀교의 성자로, 평생 자리에 누워본 적이 없다는 고승이다. 청화 스님 역시 40년 넘는 세월 동안 장좌불와를 실천한 수행자였다. 스님은 또 일체의 말을 하지 않는 묵언수행으로도 일가를 이루신 분이었다. 1983년 태안사 중창의 원력을 세운 스님은 이후 3년간 도반들과 함께 묵언정진을 수행한다. 이 결사는 지금도 수행자들 사이에서는 묵언정진의 신화로 전해진다. 이후 꼭 10년이 지난 1995년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금강선원’을 개원하면서 다시 3년간의 묵언정진을 수행했다. 스님의 고행 가운데 역시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하루 한 끼만 먹고, 오후에는 일체의 곡기를 먹지 않는 일종식의 수행이다. 그러나 스님에게는 이것이 일시적인 수행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임종하는 날까지 이 원칙을 지켰으나, 다만 다른 중생들과의 만남이나 행사 때문에 몇 번 어긴 일이 있다고 한다. 일종식의 장점에 대해 설명하면서 스님은 이 습관이 자신의 수행중에 굳어진 것임을 이렇게 밝히셨다. “수행정진을 하다 보면 혼자서 여러 끼니를 해먹기가 우선 귀찮다. 부처님 이전부터 오후 불식의 수행은 있었던 것이고, 밥을 여러 끼 먹는 것은 복잡한 속세의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본래의 인간은 하루 한 끼로도 충분하게 되어 있다. 나는 이를 믿고 실천했을 뿐이며, 적게 먹으니까 몸의 기운이 더 맑고 좋아진다. 80이 되어서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수행자라면 마땅히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적당히 먹어야 한다.”
염불선과 통불교, 그리고 태안사
전국의 재방 선원을 운수납자로 떠돌며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하던 스님은 세납 60이 넘은 1983년에 이르러서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곡성 태안사의 중창을 위해서였다.
태안사는 6․25 때 소실된 사찰로, 1983년 당시에는 터만 남아 있던 곳이었다. 여기서 청화 스님은 3년 동안 묵언 정진을 하며 직접 등짐을 지고 터를 닦아 10년만에 다시 태안사를 일으켜세웠다. 태안사는 신라말기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대찰이었으나 현재는 쇠락하여 오히려 구례 화엄사의 말사가 되어 있는 사찰이다. 1983년 당시 청화 스님은 화엄사에서 지내고 계셨는데, 화엄사 주지 스님이 말사든 어디든 한 곳을 정해 맡아달ㄹ라는 예기에 이곳을 정해 중창을 시작했다고 한다. 절터가 아늑하여 마음에 들었고, 옛날의 대찰을 다시 되살리고 싶은 원력에서 태안사를 정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태안사와 청화 스님의 인연은 이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청화 스님이 주창하여 일대 파란을 일으킨 염불선은 본래 무상선사가 창안한 정통적인 수행법이다. 그 수행법을 혜철선사가 이 땅에 퍼뜨린 게 1,30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면서 우리의 선은 오로지 육조 혜능계의 남종선(조사선, 공안선)에만 치우치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세에 이르러 다시 염불선의 불씨가 태안사에서 청화 스님에 의해 피어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염불선을 이 땅에 들여온 혜철선사가 주석하던 곳이 바로 태안사였으니, 혜철과 청화, 태안사와 염불선의 인연은 1,30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맺어진 것이다. 청화 스님이 태안사를 맡을 당시만 하더라도 태안사와 혜철선사, 염불선의 관계가 규명 되기 전이었으며, 청화 스님 역시 그런 인연을 알고 태안사를 택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스님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선과 염불을 회통한 무상대사의 교화행각은 문파와 종파를 초월했으며 불문과 종교 일반의 고징인 법집의 계박을 초탈한 선교방편이어서 모든 종교인의 귀감이 된다.”
이렇게 청화 스님이 다시 주창하고 널리 퍼뜨린 염불선의 주창 동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스님 자신의 법문이 있다.
“지절 성향이 강한 사람에게 걸맞을 공안선이나, 의지력이 많은 사람에게 걸맞을 묵조선을 모두 긍정합니다. 그러나 정통선, 즉 염불선이란 내 마음이; 곧 부처고 천지우주가 역시 부처요, 극락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는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이 빈틈엇이 틀어쥔 상태의 수행인데 지․정․의 모두를 요하는 회통의 방법이지요. 누구에게나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하게 성불할 수 있는 수행 방법이 바로 염불선이고 통불교입니다.”
하지만 공안, 혹은 화두에만 익숙한 우리에게 염불선은 여전히 낯선 주제다. 이에 대해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부처임을 믿는 그 마응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염불은 원효대사에서부터 서산대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전통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위대한 분들은 참선과 염불을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보고 실행하셨습니다. 우리 중생이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부처임을 믿는 것이 곧 염불이죠, 그러므로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단순히 복을 비는 방편 염불에 지나지 않지만, 대상을 떠나 본체를 부처로 설정하고서 그것을 안에서 구하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이 되지요.”
스님은 또한 자신이 주창한 통불교 사상에 대해서도 이렇게 간략하게 정리했다.
"종파성을 지양한 원융한 원통불는 우리 불교가 앞으로 마땅히 지향해 가야 할 부분입니다. 진리 자체가 둘이 아니고 원통무애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정통조사라고 하는 분들은 다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신라의 원효 ․ 의상, 고려의 보조 ․ 나웅, 조선의 서산 ․ 사명 등 시대를 주름잡은 분들이 모두 원통불교를 부르짖었습니다. 필연적으로 회통이 안 될 수 없었는데, 원통불교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불성의 체험에 역점을 두어 정진한다면 반드시 원통불교로 희귀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자신이 주창한 염불선만을 유일한 수행의 방편으로 고집한 분은 아니었다. 공안선과 묵조선을 모두 인정했고, 사람마다 근기와 형편에 따라 수행의 반편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안도 좋고 염불도 좋습니다. 다만 일반인들에게는 부처님의 이름을 염호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에 기반을 둔 염불이 가장 쉬운 방편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름은 그것 자체가 신통한 깨달음의 방편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염불선과 통불교의 주장과 더불어 청화 스님은 ‘마음’의 문제를 천착하면 누구나 불성을 깨닫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을 강조한다.
“우리가 ‘천수다라니’를 외우든 ‘이뭐꼬’의 문자 화두를 들든, 아니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든, 그 구경 목적은 진여불성자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의 자리가 뭡니까. 바로 우리의 마음, 청빈한 마음입니다. 선이란 우리의 그 ‘마음’을 주도실상인 생명의 본질에 머물게 해 산ㅅ란하지 않도록 하는 수행법입니다. 우리가 선을 닦아 삼명육통이 되면 과거나 현재, 미래를 알고 천지우주를 두루 통관하는 안목과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신통력을 모아 최상의 영생의 행복을 느낄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불타의 경지입니다.”
Diamond Zen Road
1985년에 시작되 태안사 중창은 이후 10여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스님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태안사 중창이 마무리 되기 시작한 1991년부터 미주 교포의 새 원력을 세우게 된다. 미국에 있는 유일한 국내 사찰인 캘리포니아의 삼보사에 주석하고 대중들과 몇 차례에 걸친 결제와 강연을 거듭한 끝에, 1995년 5월 마침내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에 금강선원을 개원했다. 스님이 미국으로 간 뜻은 달마가 남인도에서 동쪽인 중국으로 건너간 것과 마찬가지로, 선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미국 불교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미국에는 각국 불교들이 들어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화합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아 한국 불교가 그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면서 각 종파간의 여러 집착과 갈등해소를 하는 데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그런뜻에서 온 것입니다.”
미국에서 금강선원을 개원하고 한국 선의 진수를 펼쳐 보이시던 당시 스님을 만난 적이 있는 문정회 시인은 최근 이런시를 남겼다.
사막에서 만난 꽃
눈부신 맨살 드러낸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몇 년째 묵언중인 스님을 만났다
햇살 부서져 흰 것뿐인 벌판에
기괴하게 몸을 튼 사라쌍수나무
기쁜 웃음 만발한 바위로 앉은
청화 스님, 눕지 않고 그대로 십수년이라
서울서 간 나에게 백지 내밀던
사막에 핀 한 송이 꽃, 오늘 아침에
그 꽃에 태우는 다비 소식 실렸다
그야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한편, 스님이 개원한 금강선원(Diamond Zen Center)앞길이 스님의 생전 소원대로 개명된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본래 Hungry Hollow Road였던 이 길은 2002년 미국 상원의회에서 도로명 변경 법안이 통강되어 금강선원의 이름을 딴 Diamond Zen Road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사찰명을 딴 도로 이름이 개설된 것은 이 길이 처음이다.
우리 시대의 큰 스승
1999년에 금강선원에서 돌아온 청화 스님은 곡성의 성륜사와 서울의 광륜사(2002년 청화 스님 개원)에서 매월 정기법회를 여는 등 활발한 포교 활동을 펼치다가 지난해인 2003년 11월 입적하셨다.
이 책 외에 청화 스님은 『금강신론(편)』『원통불법의 요체(법문집)』『정토삼부경(역)』『약사경(역)』『정통선의 향훈(법문집)』『육조단경(돈황본-역)』『마음, 부처가 사는나라(법문집)』등의 책을 남기셨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