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어느덧 마야부인이 임신을 한 지 10개월이 지나,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태어날 때가 되었다.
마야부인이 새벽산책을 나가 유민수(流民樹:무우수) 아래를 지나자, 백화가 만발했다. 밝은 별이
출현했을 때, 부인이 나무 가지를 쥐어 잡자 태동이 있었고 산실로 돌아갈 틈도 없이 부인의 산통과
동시에 세상에 나왔다. 봄날 기후가 온화하여 아침의 맑은 하늘과 감미로운 바람결에 순식간에
탄생하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걷고 일성을 하였다는 것은 픽션으로 보자.)
"온 우주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엄하다. 이 세상에 가득 찬 고통을 내 반드시 평정하리라."
(「수행본기경」) 부처님의 탄생게(誕生偈),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세개고 오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世皆苦 吾當安之)"는 "이 세상에 가득 찬 고통을 내 반드시 평정하리라" 고대인도
사회는 바라문교라는 신본주의 종교가 대세를 이루며, 사회적으로는 신분계급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고착화시키고 있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에 부여되는 카스트에 종속되어 운명적으로 정해진 삶을 살아야 하고, 그
질서를 창조한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을 만들어낸 절대 신이라고 하는 논리가 통용되는 한, 인간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주체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탄생게 속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현대식 표현으로 고친다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야말로
존엄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말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흔한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것도 일국의 왕비가 장자(長子)를 낳고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마야부인은 즉시
정반왕에게 가서 탄생을 말했고, 이에 정반왕은 설산에서 수행하는 최고의 한 선인(仙人)을 초빙하여
왕자의 앞길을 살펴봐 주길 부탁했다.
"기뻐하십시오. 길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태자는 상호(相好)가 좋아 집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되실
겁니다. 만일 세상을 가엾게 여겨 출가한다면 부처님이 되어서 삼계를 돕고 감로(甘露)로 널리
세속을 건지며 의심의 그물을 끊게 되실 겁니다."(「불설보요경」) 선인은 어린왕자에게 큰절을 하며
자신이 나이가 많아 위대하신 성자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선인의 길상을 들은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선인의 말에는 국왕인 아버지
정반왕과 태자인 부처님 간에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장차 생길 수도 있음을 예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 카필라는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있는 약소국가였기 때문에,
왕을 위시한 모든 백성들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타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전륜성왕이란
베다성전에 자주 나오는 말로서,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세계를 지배할 강력한 군주를 의미한다.
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은 선인의 말에 기쁨과 함께 갈등도 느낀다.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士)며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인 부처님의 부모가 되는 것도 큰 영광이지만, 세속적인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들이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 더 나을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왕자가 태어 난지 십일 전 후로 마야부인이 산고로 세상을 뜨자 마야부인 동생인 이모가 태자를 맡아
기르며 훈육을 한다. 후일 이모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태자가 왕궁에서 자라나던 어린아이
때에는 놀기만 하고 배우지 않았다가, 나이 여덟 살이 되어 문을 나와 학당에 들어갔다. 비사바밀다라와
인천의 두 높은 스승 곁에서 모든 서적과 일체 논(論)과 군사와 온갖 술법을 읽고 배워 4년이 지나 열두
살에 이르렀을 때에는 갖가지 기능을 두루 다 섭렵하여 이미 통달했다.
그리고 눈으로 즐기고 마음대로 노닐며 노래와 색을 따라 다녔다.(「불본행집경」) 부처님의 어린 시절은
다른 사람에 비해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다. 물론 총명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통달한 사람처럼
고상하게 지냈던 것은 아니었다. 신에게 선택된 자로서의 특수한 생활을 영위한 게 아니라 여느
아이들처럼 공부하고 놀러 다녔던 것이다. 부처님이 어린 시절에 보통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처님의 장차 깨달음이 오직 개인의 특수한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님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의 깨달음은 만인이 납득할 만한 보편성을 갖고
있으며, 누구든지 적절한 학습과 수행만 한다면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12세 때 농경의 행사를 행하려 성 밖으로 나가서 보았던 광경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모든 농부들이
발가숭이로 몹시 고생하면서 소에 보습을 매어 밭을 가는데, 소가 늦게 걸으면 때때로 고삐로 후려쳤다.
해가 길고 날이 뜨거워 헐떡거리고 땀을 흘리며, 사람과 소가 다 고달프고 주리고 목말라했다. 사람들은
몸이 수척하여 뼈만 있었으며, 보습에서 흙이 파 뒤집히자 벌레들이 나왔으며, 사람과 보습이 지나간
뒤에는 뭇 새들이 다투어서 날아와 그 벌레들을 쪼아 먹었다.
태자는 보습을 끄는 소가 피로할 대로 피로한데 또 채찍에 얻어맞고 멍에와 고삐에 목이 졸려 피가
흘러내리고 가죽과 살이 터지는 것을 보았다. 또 햇볕에 등이 탄 농부도 발가숭이 몸에 먼지와 흙이
범벅이었고, 까마귀와 새가 날아와 다투어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았다. 태자는 이것을 보고 크게
걱정하고 근심하기를, 마치 사람들이 자기의 친족이 얽매임을 당했을 때 큰 걱정과 근심을 하듯 했고,
태자가 그것들을 불쌍히 여김도 그와 같았다.
태자는 큰 자비심이 우러나와 건척 이란 말에서 내려 조용히 거닐 으며 모든 중생들에게 이런 일이
있음을 생각하고 다시 부르짖어 말했다. "아아, 아아, 세간의 중생들은 극심한 괴로움을 받나니 곧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이며, 겸하여 갖가지 고뇌를 받으면서도 그 가운데 전전하여 떠나지 못하는구나.
어찌하여 이 모든 괴로움을 버리기를 구하지 않으며, 어찌해서 괴로움을 싫어하고 고요한 지혜를 구하지
않으며, 어찌해서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의 괴로운 원인을 벗어나기를 생각지 않는가? 나는 이제 어느
고요하고 한가한 곳을 찾아서 이러한 모든 고뇌의 일을 생각할꼬!"(「불본행집경」)
태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이 백성들의 고생과 세상의 부조리와 비합리성을 보고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시해버릴 수도 있는 타인과
세상의 고통을 자기화해서 스스로 감당하려고 한다. 이 대목은 청소년 시절의 부처님이 사바세계에서
장차 이룰 위대한 업적의 한 계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아버지 정반왕의 숨겨진 고민거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고뇌하는 태자의 모습을 얼핏 본 정반왕은 속으로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태자는 종종 잠부나무숲에서 좌선을 하며 깊은 사유를 행하였다. 태자가 장성하여 나이 19세가
되매 정반왕은 태자를 위하여 삼시전(三時殿)을 지었다. 첫째는 난전(暖殿)이니 겨울을 지내려는
것이요, 둘째는 양전(凉殿)이니 여름 더위에 쓰려는 것이요, 그 세 번째 전각은 봄가을 두 철에
거처하려는 것이었다. 겨울에 거처하려는 전각은 따뜻하기만 하고, 여름에 거처하려는 전각은
시원스럽기만 하고, 봄가을에 거처하려는 전각은 온화함이 알맞아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다. 또 그
궁궐의 뒷동산 가운데는 봇물이 도랑에 흘러 못과 늪을 만들고 갖가지 명화를 재배했으니 우발라 꽃,
파두마 꽃, 구물두 꽃, 분타리 꽃 등을 심은 것은 태자를 기쁘고 즐겁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 여러 사람들을 두어 각각 태자를 시위하는 직책을 맡겼으니, 어떤 이는 태자를 안마하고, 어떤 이는
태자를 보드랍게 맞이하고, 어떤 이는 온갖 향유를 태자에게 바르고, 어떤 이는 목욕할 때 태자를
닦아주고, 어떤 이는 목욕할 때 향탕을 받들고, 머리를 물들이고, 빗질해 상투를 틀고, 혹은 거울을 들어
비취고, 혹 바르는 향을 들고, 혹 눈약을 들고, 혹 옷에 풍기는 향을 들고, 혹 우황을 들고, 혹 꽃다발을
들고, 혹은 온갖 빛의 미묘한 옷을 들고 태자 앞에 서서 항상 받들게 하였다. 태자가 입는 옷은 모두
가시가 옷으로서, 몸을 굽히어 들고 있다가 필요하면 곧 나아가 받들었다. 태자의 부왕인 정반왕이 입는
옷도 속은 가시가지만 겉은 여러 가지 물건으로 만들었으나 태자는 그렇지 않고 그가 입는 옷은 안팎이
모두 가시가로 만든 것이었다.
태자의 좌우 시종과 잡역을 맡은 사람, 동복(童僕) 남녀와 모든 후종(後從)들은 다 식사에 멥쌀밥과
어육과 초장과 혹은 전골 혹은 국이었으나, 태자의 한 몸에는 따로 가장 좋고 아름다운 멥쌀을 정미롭게
가려 뽑은 것이며 국과 전골과 여러 가지 차반이며 백가지 맛난 아름다운 반찬과 갖가지 진수(珍羞)와
떡과 과일 등 이렇게 한량없는 것들을 날마다 따로따로 드리며 밤낮으로 힘을 들여 각각 새로 만들어서
태자에게 공궤했다. 또 흰 일산(日傘, 볕을 가리기 위한 우산처럼 생긴 물건으로 의장의 한 가지)으로
태자 위에 덮었으니 혹 밤에 놀 때 이슬이나 서리나 바람을 두려워함이요, 혹은 낮에 놀 때도 먼지와
티끌이나 해가 비침을 막기 위함이었다.(「불본행집경」)
청소년기의 부처님이 고민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반왕이 취했던 방법은 약소국 카필라로서는
대단한 경제적 지출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태자가 출가할까봐 정반왕이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타의 성인이나 위인들이 곤란한 청소년 시절을 보낸 반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작기는 하지만 일국의 왕자로서 아주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청소년기의
부처님은 만인이 소망하는 그런 자리와 생활에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 정반왕과 석가족의 장로들은
태자의 관심을 어떻게 해서든지 세속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위에서처럼 갖은 노력을 다하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나 보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최후의 처방을 내리려고 한 자리에 모였다.
어느 날 정반왕은 여러 석가족 회의에서 온 덕을 갖춘 장로들과 같이 서로 의논을 하는데, 이때 여러
석가족들이 대왕에게 아뢰었다. "태자의 나이가 많아졌나이다. 신선들과 상(相)을 잘 보는 이들이 한 결
같이 말하기를, 태자께서 만약 집을 떠나면 반드시 부처님이 될 것이요, 만약 집에 있으면 당연히
전륜성왕이 되어 사천하를 다스리되, 열 가지 선으로 만물을 부리고 법으로써 왕이 되어 칠보를 이룩할
터인데,
칠보라 함은 첫째가 윤보(輪寶)요, 둘째가 상보(象寶)요, 셋째가 마보(馬寶)요, 넷째가 주보(珠寶)요,
다섯째가 여보(女寶)요, 여섯째가 주병신보(主兵臣寶)요, 일곱째가 주장신보(主藏臣寶)며, 천의 아들을
완전히 갖추고 단정하며 씩씩하여 적을 잘 항복시키리라고 하였나이다. 대왕이시여, 만약 태자가 집을
떠나지 않게 하면 전륜성왕으로서 틀림없이 모든 작은 왕들을 다 항복시킬 터이므로, 응당 혼처를 구하여
물들고 집착하게 해야 하리니, 이로 연유하여 저절로 집을 떠나지 아니하오이다.(「방광대장엄경」)
태자가 전륜성왕이 되는 일에 카필라국의 존망이 걸려 있다고 생각한 정반왕과 석가족 장로들은 태자를
억지로라도 결혼시켜 왕가에 붙잡아두려고 한다. 이들의 우려는 사실로 입증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석가족은 훗날 코살라국 유리왕의 침공으로 정복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태자는 구리성주 선각왕의
딸이자 외사촌이기도 한 야소다라를 태자비로 맞이하기는 했으나, 정반왕과 석가족 장로들이 바라던
것만큼 결혼생활을 통해 세속에 집착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