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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양반의 경제생활 : 유희춘의『미암일기』
이 성 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우리는 양반의 경제생활 내지 그들의 경제관념에 대하여 상당히 추상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양반이라 하면 의례히 경제관념이 없으며, 대부분의 학자가 청념(淸廉)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선비는 모름지기 학문에만 전념하고, 빈곤을 견디고 재산을 축적하는 일은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당대를 살아갔던 생활인이며 경제활동의 주체이다.
조선시대는 토지와 노비 외에는 별다른 생산기반을 가지지 못한 어렵고 힘든 사회였다. 이러한 때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경제관념이나 경제의식을 갖게 마련이다.
조선의 최고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도 그의 생전에 서너채의 집, 150여 명의 노비(奴婢), 수천 두락(斗落)의 전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규모 있고 효과적인 재산관리의 결과라고 한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으로 인하여 정치적 혼란기에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어긋나지 않고 시종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날 수 있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퇴계 이황뿐만 아니라 당시의 양반들에게 있어서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대체적인 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즉, 학자의 지조와 절개도 비교적 안정된 경제적 기반위에서 만이 가능한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양반들은 집안의 가계운용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경제관념 또한 철저하였다. 아울러 고위 관직자에게 있어서 관직은 그 자체가 광범위하게 재산을 확대하는 토대가 되며, 개인이 가지고 있는 친족망과 교유관계가 그의 경제생활과 직결되고 있었다.
1. 녹봉(祿俸)과 그 의미
조선시대 양반이 관직에 나아가게 되면 국가로부터 녹봉(祿俸)을 받게 된다.
고위 관직자의 경우 제주(提調職, 본직 이외의 겸직을 말한다)의 겸임정도에 따라 구종(丘從)을 배정받기도 하지만, 나머지의 경우는 녹봉만을 받는다.
녹봉은 기본적으로 관인이 염치를 길러 부정에 빠져들지 않고 청렴하게 관직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조세로 거두어 들인 쌀 등을 현물형태로 지급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이래 16세기 중엽까지는 관리의 처우 내지는 생활보장 차원에서 과전(科田)도 지급되어 상당량의 수조권(收租權)도 지녔으나 과전의 지급이 중단된 이후로는 녹봉만이 지급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각 과의 녹(祿)은 실직(實職)에 따르며 4계절의 첫 달에 나누어 준다”고 규정되어 있다.
즉, 관직자가 지니고 있는 실직을 18과(科,등급)로 나누어 1년에 4차례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녹(祿)과 봉(俸)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으로, 녹은 3개월마다 지급하는 경우이며 봉은 월 단 위 이하로 지급하는 것이다. 즉 근무일수가 채워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녹이 아니라 봉을 지급하였다.
1671년(현종 12)부터는 관료들에게 급여를 매달 지급하는 월봉(月俸) 체제로 바뀌게 된다. 이후부터 관리들은 매달 월급을 지급받게 되었다.
그러면 1년간 관료들이 받는 녹봉은 어느 정도이고, 그것이 관직자에게 주는 경제적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녹봉을 받는 인물이 유희춘(柳希春, 1513~1577)과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다. 즉, 이들이 남긴 『미암일기(眉巖日記)』와 『묵재일기(默齋日記)』를 통해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녹봉을 받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먼저 유희춘의 경우부터 보기로 한다.
유희춘은 1568년(선조 1))부터 1575(선조 8)까지 총 17회의 녹(祿)과 1회의 봉(俸)을 받았다.
『경국대전』과 비교 검토할 때 유희춘이 정해진 양을 수록한 경우는 모두 6회에 불과하였다.
즉, 17회 중 정해진 규모의 녹봉을 받은 경우는 6회(35%)에 불과하고 나머지는(65%)는 모두 실제보다 적은 양을 받았다.
녹봉을 줄이는 이유는 매우 많았다. 즉, 흉년이 들었다거나 중국 사신의 왕래로 지출이 많아졌다는 이유로 줄이기도 하지만, 아예 실제보다 낮은 등급의 녹봉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즉, 국가에서는 녹봉을 국가재정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면 이문건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문건은 유희춘에 비하여 짧은 기간동안 관직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문건이 녹봉을 받은 회수는 3회에 불과하다. 1545년(인종 1) 4월에는 쌀(米) 9섬ㆍ보리(小麥) 3섬, 포(布) 3필을 수록하였다. 당시 이문건의 관직은 승문원 판교로 정3품 당하관록(제5과 하등, 중미(中米) 2섬, 조미(糙米 8섬, 보리 3섬, 명주(silk) 1필, 포(布) 3필)을 수록해야 하나 실제 수록한 것은 이것보다 등급이 낮은 것이었다.
이상에서와 같이 시기가 지날수록 녹봉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 갔다. 그리하여 녹봉이 관료의 처우 내지는 생활보장이라는 그 본래의 의미를 지니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러면 유희춘이 1년 동안 받은 녹봉은 어느 정도일까.
이를 위해 비교적 중하위직을 지내던 때와 당상관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하던 시기를 비교하여 보도록 하겠다.
선조 원년(1568), 백미 32섬, 콩(太) 14섬, 보리 6섬, 명주(紬) 4필, 포 12필.
선조 6년(1573), 백미 50섬, 콩(太) 16섬, 보리 8섬, 명주(紬) 4필, 포 14필.
이를 『미암일기』에서 거래되던 물품의 가격으로 1필에, 보리 2섬이 오승목 5필로, 명주(紬) 2필이 미 24말에 거래) 바꾸어 계산하면 1568년(선조 1)의 경우 백미 51섬 정도가 된다. 같은 시기에 공노비로부터 수취한 선상가(選上價)가 26여 섬, 지방관이나 친인척들로부터 받은 선물(膳物)이 쌀로 186여 섬, 토지에서의 수확량이 83여 섬이다. 1573년(선조 6)의 경우는 전체가 81섬 정도가 된다. 이 시기ㅊ수확량은 알 수 없으나 선상ㆍ보병가가 104여 섬, 선물로 받은 쌀이 49섬 6말이었다. 당시 관료들에게 녹봉은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국가에서는 녹봉을 관료들의 처우 내지는 생활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지급하지만, 실제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녹봉만으로는 상당히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녹봉은 관료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는 녹봉의 사용처를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유희춘의 경제적 기반은 해남과 담양에 있었고,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만 임시로 남의 집을 빌려 생활하고 있었다.
<1652년(孝宗3)에 이조(吏曹)에서 윤선도(尹善道)에게 발급한 녹패(祿牌)>
유희춘은 관직생활 내내 한양에 집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양의 집값이 상당히 비쌌기 때문이다. 남의 집 일부를 빌려서 생활하다 보니 녹봉을 받아도 쌓아둘 만한 창고가 없었다. 그렇다고 녹봉을 받는 즉시 고향으로 실어 보낼 수도 없었다. 실어 보내기 위해서는 운반비가 적지 않게 들기 때문이다.
유희춘의 녹봉은 대부분 한양에서 소비되었다. 우선 녹봉을 받으면 한양에 올라와 있는 친인척에게 일부 나누어 주고,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에게 삭료(朔料)를 지급한다. 이는 한양에서 함께 생활하는 노비들의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것이다. 나머지 남은 것은 아는 사람의 집에 쌓아두었다. 이는 이문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녹봉을 받자마자 청파에 사는 누이 등 친인척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희춘은 녹봉을 주로 한양에 올라와 있는 가족과 노비의 양식, 손님접대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중국으로부터 필요한 책을 구입하고, 효과가 뛰어난 약재를 구입하는가 하면 품질이 좋은 관복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유희춘이 필요한 중국산 물품을 구입하는 방식은 사신을 쫒아가는 통사(通事)를 통해서였다. 즉, 유희춘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하면, 그들은 기꺼이 사다 주었다. 또한 유희춘은 자신의 부인(宋德峰)을 위해 한양의 시전(市廛)에서 값비싼 단자(緞子, 일종의 고급 silk)와 명주(明紬, silk) 등을 구입하였다.
당시 품질이 좋은 비단은 한양(漢陽)에서만 구할 수 있었으며, 그 가격은 상당히 높았다.
유희춘은 녹봉을 사용하고도 남으면 쌀을 면포(綿布)로 바꾸어서 집에 보관하였다. 이는 쌀보다는 면포가 보관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쌀은 시간이 지나면 변질될 가능성이 높았다. 유희춘은 관직생활 중간에 여러 차례 고향에 내려갔다. 그 기간은 짧은 경우도 있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머무는 적도 있었다.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야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를 한양에 올라와 있는 친인척에게 넘기고 간다. 운반비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희춘의 경제관념이 상당히 낮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유희춘은 녹봉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녹봉을 받은 후에는 줄어들었는지를 살피고, 그 까닭을 알아본다. 규정량을 받았을 때는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다든지, 전에 볼 수 없는 일이라고 기뻐하였다. 쌀이 품질이 좋으면 매우 흡족해 하였다.
더구나 유희춘은 충의위(忠義衛) 박명성(朴命星)의 녹봉을 대신 받아 사용하였다.
박명성은 담양에 연고가 있는 인물로 유희춘과는 친분이 두터웠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자 병조에서 서리가 파견되고 이어 광흥창에서 봉사ㆍ부봉사가 나와 박명성 녹패(祿牌)를 반납하라고 요청하지만 유희춘은 대답만 할 뿐 실제로는 반납하지 않았다.
요컨대 16세기 중엽 이후 관료의 처우 내지는 생활보장이라는 녹봉의 의미는 점차 퇴색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녹봉을 통해 양반으로서의 체모까지 유지하기는 어려워, 이제 새로운 방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2. 양반 사회의 선물경제
1) 선물의 실태
양반관료의 경제생활에서 녹봉의 의미가 퇴색하자 언제부터인가는 지방관(地方官)으로부터 정례(情禮)로 거두어 들이는 선물(膳物)이 보다 큰 경제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선물은 단순한 선물수수가 아니라 일상화된 경제 형태로 유희춘ㆍ오희문ㆍ이문건의 경제생활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유희춘은 지방관을 비롯한 동료관인ㆍ친인척ㆍ제자ㆍ지인으로부터 물품을 거두어 들이고 있다. 10여 년 동안 유희춘은 2,855회에 걸쳐 선물을 받았다. 이는 매월 평균 42회에 이르는 것이다.
선조 4년(1571) 3월부터 10월까지는 선물을 받기보다는 주는 입장이 되고 있다. 이는 유희춘이 지방관(전라감사, 1571년 3월∼10월)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지방관일 때는 물품을 받기보다는 주는 입장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희춘에게 물품을 보내 온 사람의 절반 이상이 지방관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선물의 종류는 곡물류를 비롯하여 면포ㆍ의류, 생활용구류, 문방구류, 치계(雉鷄)ㆍ포육(脯肉)류, 어패류, 찬물류, 과채류, 견과ㆍ약재류, 시초(柴草) 등 일상용품에서 사치품까지 망라되어 있다.
물품의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양도 상당히 많아 이것만으로 생활한다 하여도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나아가 이는 유희춘 집안의 재산증식과 연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면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선조 즉위년(1567) 10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그가 비교적 중ㆍ하위직에 있었던 시기와, 그가 고위직에 올라 있었던 선조 6년(1573)의 쌀과 면포의 선물규모를 비교해 보도록 하였다. 앞 시기에는 쌀 187섬, 면포 49필을, 그리고 뒷 시기에는 쌀 50섬ㆍ면포 29필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앞서 살펴 본 녹봉이나 토지 수확량보다 많은 것이다.
쌀과 면포만으로 볼 때는 오히려 고위직보다는 중하위직일 때의 규모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유희춘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고위직에 있을때는 한양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쌀ㆍ면포와 같은 생활필수품 보다는 다른 물품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쌀과 면포는 중하위직을 역임하던 선조 즉위년(1567)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4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보내졌다.
쌀은 81%(150섬)가, 면포는 91%(45필)가 이 때에 들어온 것이다.
유희춘은 오래 동안 유배(流配)생활을 하다가 성균관 직강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선조 원년(1568) 10월 한양에 올라와 임금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 한 후 11월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다음해 1월에야 돌아오고 있다. 이 때 그는 20여 년의 유배생활로 형편없이 망가진 토지와 조상의 묘소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여기에는 많은 재원과 물품이 필요하였다.
충청도 논산에서 한양로, 한양에서 다시 전라도 담양―해남―순천으로 옮겨 다니면서 유희춘은 인근의 지방관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거둬들였다. 이러한 선물이 겉으로는 지방관의 자발적인 형태로 나타나나, 이는 기본적으로 유희춘과 증여자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것은 오희문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해주오씨는 한양 관동에 근거를 둔 양반가문으로 오희문대에는 한미하지만 아들ㆍ손자대에 상당히 번성하는 가문이다. 이들은 현재 경기도 용인에 근거지를 갖고 있는데, 오윤겸(吳允謙, 1559∼1636) 호를 따서 추탄공파(楸灘公派)라 한다. 아들 오윤겸은 인조반정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사헌을 시작으로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고, 손자 오달제(吳達濟)는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그러면 오희문이 받은 선물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오희문의 『쇄미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피란생활 하던 일기이다.
그는 충청도 임천과 강원도 평강에서 피란생활을 하였다. 주목되는 사실은 임천과 평강의 선물 규모가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임천에서는(1593.6~1594.4) 153회인 반면 평강에서는(1597.4~1598.3) 357회의 선물을 받고 있었다. 평균해서 매월 13회와 30회를 받은 셈이다.
이와 같이 차이를 보인 결정적인 이유는 오희문이 가지고 있는 인적인 연망(network)의 차이에 연유한다.
임천에서는 이 지역과 별다른 연고가 없었고, 평강에서는 아들 오윤겸이 이 지역의 수령으로 있어 많은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아들이 수령인 까닭에 오희문은 필요한 물품은 언제든지 가져다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자 할 때에는 아들이 대신 보내도록 하였다. 대체로 오희문의 선물 회수는 유희춘의 절반 정도이다. 이는 유희춘이 고위 현직관료로 여러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는 반면 오희문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연유할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라는 전쟁 시기에 놓인 오희문을 생각할 때 그의 선물 규모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오희문가의 선물로 받은 곡물의 규모는 62섬(임천피란기)와 64섬(평강피란기)인 것으로 나타난다.
곡물류란 쌀ㆍ콩ㆍ보리ㆍ팥ㆍ녹두ㆍ조ㆍ기장ㆍ들깨ㆍ밀가루 등 을 말한다. 평강피란기의 선물회수가 임천피란기의 두 배가 넘는 데도 불구하고 규모에 있어서는 비슷하다. 이 때에는 곡물보다는 다른 물품의 선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유희춘의 경우와 유사하다. 가계가 넉넉치 못하고 형편이 좋지 않을수록 쌀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규모는 증가하게 된다. 이는 선물이 대체로 양반가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평강피란기보다 임천피란기에는 잡곡류보다 쌀의 비중이 높다. 이는 임천이 금강에 접한 평야지대이고, 평강은 산곡간에 위치한 연유이겠다. 선조 31년(1598) 오희문가의 경작소출은 64섬 정도이다. 그러나 이는 쌀이 아니라 잡곡류가 중심이다. 따라서 경작소출과 선물의 규모가 같더라도 경제적 가치는 선물이 훨씬 높은 것이다.
이문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문건은 한양에 근거를 두고 있는 양반관료로 중종ㆍ인종 때에 승문원 주서, 시강원 설서, 사간원 정언,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조카 이휘(李輝, ?∼1545)가 명종 초기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게 되어, 연좌죄로 경상도 성주(星州)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22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나지 못하고 죽게 된다.
유배 중인데도 이문건의 선물은 끊이지 않고 보내졌던 것이다. 그러나 유배 초반기와 중반기의 상황이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유배 초기(1545.10~1546.9)와 중반기(1556.1~12) 선물 받은 회수는 각각 535회와 269회로 나타난다. 평균하여 45회와 22회가 된다. 그러나 이는 이문건이 유배되기 이전 시묘살이를 하던 기간이나 관직생활 하던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유배기 만을 볼 때 이문건의 선물 회수는 유희춘과 오희문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이는 유배생활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문건의 유배생활은 그리 궁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당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유배자 모두가 그랬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문건과 경상도 성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성주는 이문건의 관향으로 선대의 산소와 토지가 분포해 있었으며, 같은 성씨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유배 초기 그의 선물 회수는 유희춘을 능가하고 있다. 이문건이 유배되자 주위에서는 그가 오래지 않아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유배는 양반관료의 정치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상화된 형벌로 누구에게나 닥칠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 당시에는 유배가 갖는 종신형적 의미는 이미 흐려져있었다. 따라서 인근의 지방관과 친인척들은 이문건에게 여러 가지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문건도 유배를 당한 이후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친분이 있는 지방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문건은 상당수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고, 사용하고 남은 것은 그의 본가가 있는 괴산으로 실어 갔다. 괴산의 가족들도 이문건의 선물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다음에는 상황이 변하게 된다. 이문건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다시 관직에 나가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고, 이문건 스스로도 유배지에 정착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선물의 회수도 절반으로 줄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이러한 선물을 보내주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유희춘에게 선물을 보낸 사람을 지방관과 비지방관으로 구분해 보았다. 여기서 지방관이란 관찰사를 비롯하여 병사(兵使)ㆍ첨사(僉使)ㆍ수령(守令)ㆍ만호(萬戶)ㆍ훈도(訓導) 등을 말하고 비지방관은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로 친인척, 지인, 문도 등이 포함된다. 인적인 관계가 중복될 경우 지방관으로 처리하였다. 이는 선물의 재원이 사적인 것인지 공적인 것 인지를 고려한 것이다.
여기서 561명 중 285명(51%)이, 468명 중 260명(56%)이 지방관인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55%인 것이다.
이문건과 오희문의 경우는 유희춘보다도 지방관의 비중이 훨씬 높은데, 이는 교유 폭이 제한적이고 이들이 지방에 거주한 때문으로 이해된다. 또한 지방관과 비지방관은 보낸 물품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인다. 비지방관의 선물이 단순한 예물형식이라면 지방관의 것은 규모도 상당히 많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자면 지방관의 비중이 휠씬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방관과의 친분정도와 양반가의 경제생활은 일정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이는 친분관계가 높을수록 많은 경제적인 혜택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오희문은 피란생활 중에도 인근의 지방관이 바뀌게 되면 누가 부임하게 되고, 자신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가를 열심히 따져보고 있다.
지방관은 유희춘가의 대소사와 가내사정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제때에 필요한 선물을 보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토(加土), 소분(掃墳), 조사(造舍), 혼례, 상례, 제례 뿐만 아니라 토지ㆍ노비를 구입할 때에도 선물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 유희춘은 이를 거절하거나 사양하지 않고 대체로 흔쾌히 받고 있다.
기 대 이상으로 보내오면 매우 흡족해 하며 ‘매우 넉넉하다’ ‘손이 크다고 하겠다’ ‘크게 도움이 된다’ ‘우리 집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후하다’ ‘지나치게 많다’이라 하고 있다. 오히려 상대가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보내온 물품이 생각보다 적을 경우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유희춘이 이러한 선물을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선물은 유희춘 본인은 물론이고 강진과 남원에는 사는 누나와 여동생, 순천의 사촌동생, 해남의 첩과 그 자식들에까지 보내졌다. 그러므로 선물로 일족(一族)이 먹고 살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사람에게 물품을 주고자 할 때에는 인근 지방관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마치 관물(官物)을 사물(私物)과 다름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2) 선물이 갖는 의미
근대적인 시각으로 볼 때 16세기에 행해진 양반의 경제생활에는 부정적이고 불합리한 측면이 적지 않다. 그들의 생활에서 선물 수수와 위법청탁(違法請託)은 일상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관권(官權)을 등에 없고 둔전(屯田)을 경작하기도 하고, 방납(防納)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도 전근대 사회의 경제운용체제에 서는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갖는 것이다.
근대의 국가경제, 재정은 재원의 소비에 있어서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고, 징수에 있어서도 공적인 징수만이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외에 사적인 징수나 사적인 재원지출은 바로 바로 뇌물이나 공금횡령과 직결되는 문제로 이해된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의 국가경제는 소비와 징수에 있어서 이러한 공사(公私)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혹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재정운영에 있어서 근대적인 관점으로 공적이지 않다고 여겨지 는 것을 모두 부정부패와 연결지울 수는 없다.
16세기 양반관료의 선물수수 행위는 상당히 보편화된 경제운영 체제라 하겠다.
관직을 매개로 한 선물형태는 지방관이 양반관료에게 지급하는 것이었으며, 관직을 배경으로 하고 재원을 지방관아에서 출연한다는 특징이 있다. 선물에 국가가 일정부분 관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국가 재분배체제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양반관료가 지방관이나 친인척으로부터 정례적으로 받은 선물은 정형화(定形化)된 하나의 경제 형태였다. 즉, 선물 수수는 소소하면서도 빈번하게 그리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선물을 주고받는 당사자도 당연하게 여겨 도덕적으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로 하는 물자를 요구하였고, 상대가 호의적이었을 경우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선물을 뇌물로 인식했다면 그 상황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일기는 개인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일종의 비망기(備忘記)였다. 선물 수수를 자세히 기록하는 것은 그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기회가 되면 보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즉, 선물은 갚을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일종의 빚이며 부담이다. 구매력이 높은 양반관료의 선물수취는 장시 활용을 제한하여 시장경제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유희춘이 10여 년 동안 물자를 구입하거나 제작한 경우는 극히 제한적 이었다(물품구입 66회, 물품제작 37회). 이들은 선물로 구하기 어려운 품목만을 구입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서책, 고급비단, 약재, 붓 등이다. 이러한 물품은 시장에서도 쉽게 구하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에 오희문과 같이 일반적인 양반은 선물의 규모가 제한되어 시장을 활용하는 비율이 높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은 구매력은 상대적으로 약하여 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희문의 경우도 시장보다는 선물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취득하는 사례가 더욱 많았다.
지방관의 선물은 물자획득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정도가 지나칠 때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서로의 묵인 아래 선물을 주고 받더라도 서로간의 이해가 달라지면 상황은 반전될 수 있었다. 이는 유희춘과 남원판관 이원욱(李元旭)의 관계를 통해 확인된다.
전라감사였던 유희춘은 선조 4년(1571) 4월 남원판관 이원욱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어 정사를 돌보지 못하자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다하여 파직시켰다. 이에 섭섭함을 느꼈던 이원욱은 한양에 올라가 유희춘에 대한 잡다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 즉, 유희춘이 순행(巡行)할 때 사사로이 개인집에서 자고, 관장(官匠)을 이용해 집을 짓는가 하면, 영리(營吏)로 하여금 집짓는 일을 감독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한양에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 때에 유희춘은 한양의 동향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자칫 잘못하던 커다란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별탈없이 무마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유희춘의 학문적인 위치, 선조(宣祖)의 특별한 신임, 유희춘의 인적 배경 등이 작용하였다.
그러나 만일 유희춘의 정치적인 상황이 좋지 않았다면 크게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3) 특별한 선물, 칭념(稱念)
조선 중기 일기류 자료에는 정형화된 형태의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칭념(稱念)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이는 양반의 생활방식이나 경제운용 형태, 교유관계 등을 담고 있는 용어이다.
전근대 사회일수록 경제생활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ㆍ정치적인 역량이나 인적인 네트워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칭념은 수령을 통해 자신의 노비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서로 친분이 있는 인물들 사이에 마음을 전달하는 예물(禮物)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추가할 수 있다. 양반은 이러한 칭념을 통해 자신의 인적인 연망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노비문제는 제외하고 선물로서의 칭념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미암일기』와 『묵재일기』는 상호 보완적인 자료이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충청도 은진(恩津)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곧바로 풀리어 중앙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시기의 기록이다. 반면에 『묵재일기』는 이문건이 중앙에서 잠깐 활약하다가 성주로 유배되어 생활하던 모습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미암일기』에서는 칭념(부탁)하는 자의 모습을, 『묵재일기』에서는 칭념(부탁) 받는 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칭념이라는 용어는 원래 불교에서 시작된 것이다. 즉, 불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칭념제불(稱念諸佛)은 ‘마음 속에 염원한 바를 들어내다’, ‘부탁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칭념은 대체로 지방관을 통해 전달된다. 신임관은 부임하기 전에 정부의 주요 부서인 의정부, 인사를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 사헌부와 사간원 및 해당 군현 관료를 만나 교시와 조언을 청취하고 하직인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신임관이 부임 할 때는 관례적으로 동료 관인들이 전별연을 열어주었다. 칭념은 대개 이러한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유희춘도 마찬가지여서, 전라도 지역에 임명된 지방관은 부임하기에 앞서 의례적으로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유희춘의 본가는 물론 외가ㆍ처가가 모두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부임하는 자들도 유희춘을 찾아 뵙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유희춘이 중앙의 유력한 관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리를 통해 중요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부탁(稱念)이 오고가게 된다. 만일 직접적으로 선이 닿지 않을 경우 다른 통로를 통해 부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칭념의 범주는 상당히 넓을 수 있다.
이들 지방관은 임지에 도착하면 곧 바로 칭념을 처리하였다. 즉, 수령은 현지에 있는 양반을 직접 찾아가 칭념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경상도 성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문건은 지방관의 부임을 계기로 하여 한양에 있는 중앙 관료로부터 칭념을 받게 된다. 227개월 안 107회에 걸쳐 받은 셈이다. 대개 2달에 한번 정도인 것이다.
문제는 칭념의 구체적인 내역이 ‘현물의 전달’이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물품은 칭념자가 부담하는 것이고, 수령은 단지 전달자의 역할만을 한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부탁하는 자는 단지 칭념자의 명부만을 전달할 뿐이고, 그 나머지 과정은 지방관이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사실 새롭게 부임하는 지방관이 부탁받은 물품들을 실고 간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지방관이 가지고 가는 단자(單子)에는 부탁받는 자와 물목의 내용만을 기재할 뿐이었다. 임지에 도착한 지방관은 그 지방의 재원을 가지고 이들에게 선물을 지급하였다. 이들 칭념은 지방관이 자신의 재원으로 처리하는 것인 만큼 개인에게 직접적인 부담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지방관의 업무를 증대시키고 지방 재원을 고갈시키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는 결국 관아의 힘을 빌어 서로간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선물을 받은 자는 지방관이 아니라 칭념자에게 고마운 뜻을 표하게 된다. 이로서 서로간의 인적 네트워크를 보다 공고히 하게 되는 것이다. 칭념의 전달자가 지방관이고, 재원이 지방관아에서 출연된다는 점에서 이는 지방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물론 선물 중에도 지방관이 보내는 부분이 절반 이상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선물은 지방관이 직접적인 시혜자이지만 칭념의 경우는 중간 전달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선물을 받은 인물이 지방관에게 특별히 고마움을 표할 이유는 없다고 하겠다. 그러면 이들 칭념자는 이문건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16세기는 조선후기와 달리 교유관계가 학파나 붕당(朋黨)과 관련되지 않고 지연ㆍ학연ㆍ혈연의 복잡하고 중층적인 교유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칭념자와 이문건과의 관계를 추적한다면, 16세기의 교유형태가 드나날 것이다.
그러면 칭념은 어떠한 규모로 보내졌을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칭념은 선물만큼 흔한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선물처럼 물목이 다양한 것도 아니다. 대개는 쌀1섬ㆍ콩 1섬으로 정액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칭념은 다소 정치적인 성격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칭념의 규모는 지방관의 교체와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다. 지방관의 교체가 잦을수록 칭념의 규모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인 상황과도 일정하게 관련이 된다. 이문건은 유배초기와 명종 20년(1565)에 다소 늘어나고 있다. 유배 초기는 유배를 위로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었을 것이다. 명종 20년은 정치적인 상황의 반전과 관련이 있다.
명종 중반기부터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화를 입은 자들에 대한 신원(伸寃)의 기운이 감돌더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고 윤원형(尹元衡)이 축출 되면서 본격적인 신원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문건 본인은 물론이고 주위에서도 머지 않아 상경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중앙의 관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때가 되면 갑자기 칭념의 수효가 늘어나고, 하나의 단자에 여러 명이 칭념을 하기도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30명이 한꺼번에 칭념한 경우도 확인된다. 그러나 칭념자의 수효와 물품의 규모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30명이 칭념을 하더라도 이들이 별도로 하지 않는 한 물품의 규모는 1명이 할 때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