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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활의술과 전문의술의 협력관계
의술은 생활의술과 전문의술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생활의술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병증을 고치고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의술이라 할 수 있는데, 자연의술이나 민간의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문의술은 전문적으로 병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사람에 의해 형성된 의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학문의술이나, 제도의술, 귀족의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경계는 모호하여 어디까지가 생활의술이고 어디가지가 전문의술인가에 대해서는 시대나 사회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전통의술, 생활의술, 자연의술이 전문화되고 학문화되어 전문의술로 발전됐다고 할 수 있다.
침(鍼)과 뜸(灸)의 기원은 인류의 원시사회에서 비롯된다. 그 기원이 적어도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의술이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전통적 요법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생활의술로서의 특성을 갖고 있다. 현재도 침구요법은 임상각과에 걸쳐 활용범위가 넓으며, 비교적 효과가 빠르고, 매우 경제적이고, 시술이 간편하고, 비교적 부작용이 적은 특징이 있는 것으로 침구요법의 특징이 요약된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배운 만큼 활용할 수가 있다.
침구술은 민간에 퍼져서 전승되어 왔다. 생활의술로서의 침구술은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고, 전문적으로 발전하면서 그러한 성과가 다시 직접적 전승이나 서적을 통하여 민간의 생활 속으로 다시 스며드는 경향도 있게 된다.
허임 침구학은 전문화의 길을 걸어온 전문의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문화된 침구술이 다시 『침구경험방』이라는 실용적인 서적으로 편찬이 되어 다시 광범위하게 생활 속으로 퍼져 나갔다.
당대의 문필가 이경석이 『침구경험방』 발문에서도 전하고자 하는 요지도 이런 맥락에서 쓰였다. 『침구경험방』의 발문은 ‘허임 침구학의 현대적 계승’에 관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이 『침구경험방』은 태의 허임이 지은 것이다. 화와 편작 이후로 의원으로 이름 있는 자가 세상에는 없지 않으나, 사람마다 제각각 저술이 있으며, 그 처방은 오래되었고 그 비결은 은밀하여 노사들도 알기 어렵다고 근심하였다. 하물며 저자거리의 보잘 것 없는 무리들에 있어서랴.
태의 허임은 평소에 신의 의술로 일컬어졌고 평생 동안 치료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경우도 많아 일세에 명성을 떨쳤으며 침의들에게서는 으뜸으로 추앙되었다. 지금 이 경험방의 글은 귀로 듣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손으로 시험해 본 것이다. 분명치 않은 것은 분명하게 하고, 번거로운 것은 요약하고, 틀린 것은 바로잡았다. 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중요한 묘방이 한번 책을 열면 곧바로 눈앞에 선명하니 간략하면서도 쉽고 요약되었으면서도 상세하다고 할 수 있다.
증세를 살펴 효과를 거두는 것은 약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우수마발이라도 평소에 모아두지 않으면 마련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금석단사의 귀한 약재를 궁벽한 곳에서 어찌 구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물며 한번 복용하여 병이 낫기를 기약할 수 없음에랴.
침놓는 것과 뜸뜨는 것은 그렇지 않다. 구비하기가 쉬우면서도 그 효과는 매우 빠르니 그 처방은 지침 중에도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이 경험방을 얻어서 증세에 따라 치료하면 집집마다 신의 의술을 만날 수 있으니 그 구제하는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마땅히 세상이 공유하여 널리 전하여야 할 것이며 없애거나 함부로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수상인 북저 김 류가 내국의 도제조를 맡고 있고 내가 마침 그 아래 있어 이 경험방을 호남관찰사 목성선공에게 부탁하여 간행하게 하였으니 임금님께서 만백성을 건강하게 살도록 하려는 뜻을 받든 것이다. 훗날 이런 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이 말을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시중의 의서들이 너무나 어려워 일반 백성들은 접근조차 안 되는데, 침의들 중에서 최고인 허임이 실용적이고 효과가 뛰어난 침구요법을 간략하면서도 쉽게 정리했다. 이를 책으로 펴내어 집집마다 갖춰 놓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세상이 공유(共有)하여 널리 활용하도록 하라’는 뜻이다.
이렇듯 생활의술->전문의술->생활의술->전문의술 … 의 경로로 전통의술인 침구요법은 발전해 왔다.
그런데 서세동점(西勢東漸)시대에 동양의 정통요법인 침뜸이 서양의학에 밀려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비주류 요법으로 전락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게다가 한국의 경우는 해방 후 침구사도 의료집단간의 업권경쟁에서 밀려 제도권 내에서 침구전문업종으로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민간침구인들에 대한 정부의 단속이 반복되어 전통침구술은 명맥을 잇기도 어려울 정도의 수난을 겪어오고 있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자라온 전통요법은 질경이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아무리 밟아도 다시 살아난다.
조선시대 실록에서 임금에 대한 침구치료 장면 기록을 보면 의관은 아니지만 내의원 제조와 부제조 등 조정 관료들도 경혈과 경락 등 침구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식인들 중에도 의학적 상식은 기본적인 미덕이었다. 이들에 의해 침구학은 생활의술로 활용되기도 했다.
오늘날 같이 문자의 보급율이 높아져 있고, 국민들의 기본적인 교양 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인체에 대한 이해가 높은 시기에 효과적인 전통 민간요법인 침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익혀 활용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침구경험방』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한 박문현은 2001년 허임 『침구경험방』을 소개하며 이를 토대로 침·뜸·경혈요법 자가 활용 가이드를 월간지 신동아에 실었다. 그는 여기서 『침구경험방』을 활용하는 방법을 안내했다.
오늘날도 이같이 직접 『침구경험방』을 건강관리에 활용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 나아가 침구학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전통 생명학의 원리를 국민들이 이해하고, 건강관리에 활용하도록 하는 방안도 있다.
사실 오늘날 침뜸 도구는 조선시대와 비교해서 훨씬 편리하고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다. 침의 종류도 대단히 다양해 졌고, 뜸의 형태도 여러 가지로 개발되어 있다. 앞에서고 언급했지만 침이나 뜸의 재료나 도구의 개발방향은 효과는 유지하면서도 활용하기 쉽고, 안전하한 쪽으로 나아왔다. 곧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쪽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무교육의 확대로 조선시대와는 달리 사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지식인이 되어 있어 인체에 대한 교양의 정도가 상당 수준에 이르러 있다. 약간의 해부학적인 지식과 안전에 대한 교육만 있으면 침구술은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지근거리에 있는 민간요법이 될 수 있다. 거기다가 정보통신의 발달로 침구에 관한 정보가 널려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경락과 경혈에 정보를 무한정 접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정보는 공유되고 있다. 침구학과 같이 실용성이 뛰어 난 경우는 더욱 급속도로 생활 속으로 파고 들 수 있다. 이것은 대세이다. 인류사의 큰 흐름에 역행하여 어느 특정 집단만이 이 전통요법을 독점할 수는 없는 시대이다. 실제로 인터넷을 접속하면 경락과 경혈에 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리고 침구요법과 관련한 책자도 계속 출판되고 있고, 대중적으로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진 책들을 어디서든 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이 임진왜란 직후 의학입문의 침뜸 부분을 정리하여 침구요결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침과 뜸은 효험이 빠르니 향리(鄕里) 사람으로 침놓는 법을 거칠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처방을 살펴 혈자리를 구하면 스스로 가히 병을 치료할 수 있어 번거롭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고, “장차 언해로 번역해 내어 우매한 아낙네라도 가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며 침뜸을 백성들의 생활의술로 자리 잡도록 하려고 했다.
유성룡 시대에 비하면 지금은 천지가 개벽했다고 할 정도로 침구의 도구는 발전했고, 사람들의 교양 수준은 높아졌다.
『침구경험방』의 발문에서 “침놓는 것과 뜸뜨는 것은 구비하기가 쉬우면서도 그 효과는 매우 빠르니 그 처방을 얻어서 증세에 따라 치료하면 집집마다 신의 의술을 만날 수 있으니 그 구제하는 바를 헤아릴 수가 없다”고 강조한 것처럼, 침구는 이제 마땅히 ‘세상이 공유하여’집집마다 전해질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 되었다.
침구학의 기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생활건강관리에 활용하도록 하는 것은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국가적으로 대단히 뜻 깊은 사업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생활의술로서 침구술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애용되고 있을 때 제도권 내에서 전문적 영역도 자리를 잡아 발전할 수 있고, 학문의 깊이도 더해 질 수 있다. 이것은 민간전통의술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역대 정권이 무면허 의료행위라고 반세기 이상 강력한 단속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침뜸은 생활요법으로 뿌리깊이 자리를 잡아 생활의술로서의 명맥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여 침뜸으로 좋은 효과를 보이는 노인성 질환이 만연하고, 현대 문명이 가져온 각종 질병으로 자연치유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침뜸은 다시 서민들의 생활 속으로 확산되고 있다.
침뜸은 백성들 생활 속에서 발전해 온 전통 민간의술이다. 민족의학을 살리기 위해서는 민족의 구성원들이 전통적 생활 가운데서 써오던 의술을 수렴해 내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중국이 중의학을 세계화시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60년대부터 시작한 재야 민간의료인들을 발굴하여 제도권 내로 흡수, 이들의 의술을 검증하고 체계화하여 발전시킨 데 따른 것이다. 북한이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의술로 침뜸을 요긴하게 쓰게 된 것은 50년대부터 민간 침구인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활동하도록 해 온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고령화 사회의 의료 수요를 가장 효과적으로 흡수할 방법으로 침구를 채택할 수 있는 것도 20세기 초반부터 민간 침구인을 지방자치단체에서 꾸준히 발굴하여 활동하도록 만든 기초 위에서 이루어 졌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경우는 해방 이후 단 한 차례도 민간 침구인들을 제도권 내로 정식 흡수하는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무면허 돌팔이라며 단속과 처벌만을 계속하여 왔다. 이로 인하여 수천 혹은 수만 년 동안 다양하게 발전해온 전통침구요법의 생태계에서 많은 종류의 침구술법이 멸종됐거나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서 한국한의학연구원 침구경락연구센터가 지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 동안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각 지역 및 중국 내 북한 접경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한국 침법 발굴 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조사한 침구치료기술 중 29가지를 정리한 책자를 2009년에 발간했다.
책자에는 침요법 13건(정통사암오행침, 격팔상생역침, 기문둔갑침법, 도암 사대체질팔상침법, 황구침법, 황제침법-인영촌구맥진법, 석호침법, 삼극침법, 목침요법, 파동침법, 평평침법, 곡운침법, 금진옥액사혈요법), 뜸요법 3건(태곤왕뜸, 용화당 인산뜸, 마야구), 부항요법 1건(독맥부항요법), 생물요법 2건(벌침요법, 거머리요법), 기타 혈위자극 요법 10건(수경요법, 에너지 테라피 침법, 파동공진요법, 편자요법, 오기침법, 혈위매선요법, 금사주입요법, 청자괄사요법, EFT, SI기법)으로 총 29건이다.
이 책자는 한국의 한의사들에 의해 임상 시술되고 있거나, 제도권이 아니더라도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한국 침법을 발굴 조사하여 기록하고 각 치료기술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평가하여 임상에 보급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조사방식은 연구진이 직접 방문하거나 공중보건한의사들을 ‘한국침구치료기술 조사단’으로 위촉하여 조사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졌다. 책자에는 보유 침구치료기술 대상자의 인적 사항, 경력, 치료법의 명칭, 치료원리 및 특징, 치료도구의 종류, 시술 시 주의사항, 부작용, 진단 시 고려사항, 예후 판정, 병용 약물 여부, 연구 성과, 치료경험 사례, 시술 장면 등이 담겨 있다.
한의학연구원은 보고서 발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침구치료기술은 연구용 기록물 형태로만 보관하고 있으며, 침구법이 특이하다거나 용하다는 소문이 있으면 보유자의 면허 소지에 관계없이 방문하여 광범위하게 수집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침구법 연구에 의미 있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조사는 되었지만 책자에는 수록되지 않은 침구기술이나 방법은 조선대침, 태극침술, 한서자기요법, 타임라인의학, 무극보양뜸, 화주경락온침요법, 체절신경조절요법, 주행침법, 소침도침법, 증완침법, 수시경락팔체질침요법, 매장요법, 평침화침, 화인기경요법, 오기도인침법, 요통특화뜸요법, 화침요법, 한침, 바이오마그요법, 눈침, 신침 등이다.
이렇게 민간에서 전승되어온 침구법을 조사 연구하는 것도 중요한 사업이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민간 침구인들을 제도권 내로 수렴하는 적극적인 정책이 아울러 이루어지면 더욱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www.heoim.net) 대표이사 손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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