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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天主敎會 略史 ▣
Ⅰ. 서학 전래와 복음 수용
1.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전래와 연구
명말에서 청초(16세기 말- 18세기 말)에 서양의 학문, 윤리, 사상, 종교, 과학 등을 한문으로 기술한
한역서학서와 과학기기들이 북경 사행원들에 의하여 조선에 전래되었다. 이 때 간행된 한역 서학서
는 총 400여종에 이른다. 이는 동양 여러 나라에 서양 문명 접촉과 전달의 계기가 되었고 사상사적
발전에 큰 영향 미쳤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실학과 천주교 창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당시 들어온 주요 서학서는 <坤與萬國全圖 곤여만국전도>, <天主實義 천주실의>, <七克 칠극>,
<萬物眞原 만물진원>, <治曆緣起 치력연기>, <職方外紀 직방외기>, <眞道自證 진도자증>, <天文
略 천문략> 등이다. 한역서학서들은 실학자들에 의하여 열독, 서학 수용으로까지 발전하였으니, 이
익(1681-1763) 문하에서 권일신, 정약전, 이벽 등과 남인소장학자들이 참석한 주어사강학회를 걸쳐
천주교 교리 연구 시작되고 신앙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편 신후담․ 안정복 등은 전면적 서학을
거부하고, 박지원․ 박제가 등은 서학의 사상측면은 배척하고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한편 조선 사행원들은 연경에 가면 반드시 북경 천주당을 구경하였는데,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 가
까이 있는 남당, 동당을 주로 방문하였다. 홍대용(1781-1783)은 1766년 사신으로 갔을 때 먼저 방문
을 청하는 편지와 예물을 보내고 신부를 만나 성당을 둘러보며 천문, 역산, 망원경 관측법 등을 배우
고 필담으로 교리 문답하였음을 <湛軒燕記 담헌연기>에 기술하고 있다. 박지원(1737-1805)도 1780
년 입경하여 <熱河日記 열하일기>에 ‘북경 천주당기’를 남겼다.
2.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 천주교회 창설
강학은 공통된 주제를 놓고 토론하던 학문 연구의 방법으로 조선시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성행되었
다. 1777년 겨울 주어사에서 권철신의 주도로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남인 소장학자들이
모였고 이벽이 강학 소식을 듣고 가세하였다. 내용은 유교 경전과 한역서학서를 통한 천주교 교리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여러 차례 강학이 계속되어 이를 계기로 천주교 신앙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강학에 참여하였던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6)은 천주교 교리 연구에 전념하여 천주교 창립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유교 사상과 천주교 사상을 접맥시킨 인물로 기록될 수 있다.
이승훈 (베드로, 1756-1801)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고 가성직 제도를
주도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열은 인물로 평가된다.
명례방 김범우(토마스, ?-1786) 집에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이승훈, 이벽, 권일신, 정약용 형제
등이 모여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에 천주교회가 창설(1784)되었다. 선교사의 도움 없이 신앙
선조들에 의하여 학문으로 연구되던 서학을 종교로 승화하여 자발적으로 교회를 창립하였음은 세계
교회사에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평신도에 의하여 자생적으로 창립된 교회는 새로운 고등 종교의
수용과 실천으로 종교적 의미는 물론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사상의 실천으로 봉건 사회에 도전
하며 근대 사회에 접근을 촉진하는 중요한 의미를 사회적 의미를 지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신해박해(1791)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바오로, 1759-1791)과 권상연(야고보, 1751-1791)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다. 윤지충은 전라도 진산 출신으로 1784년 겨울 김범우에게서 천주교 서적 <천
주실의>와 <칠극>을 빌려와 필사하여 연구한 뒤 입교하게 되었다. 1791년 5월 모친 권씨의 상을 당
하여 외종사촌 권상연가 의논하여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정하
였다. 정성껏 정중하게 상례를 갖추었지만 유교의 제사의식대로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
폐제분주(廢祭焚柱) 사실을 안 친척과 이웃 주민들이 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함으로써 사건은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충효의 유교이념을 국시로 하는 조선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여져 척사
자 홍낙안을 위시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의 처형과 천주교 탄압의 상소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체포되어 폐제분주 사건을 고백하고 그것이 천주교 교리에 따른 행동임을 밝히고 감옥에서
공술기(供述記)를 작성하였는데, 훗날 이 ‘공술기’는 신자들에게 영적 독서로 읽혀졌고, 내종질인
정하상이 쓴 ‘上宰相書’의 기초가 되었다.
혹독한 심문을 받으면서도 “천주를 아버지로 알게 된 뒤로 천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께 죄를 지을 수 없다.”며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유교의 전통에 도전하는 패륜의 천주교도를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강경론자의 주장으로 전주
남문 밖(전동 성당 부근)에서 참수치명 하였다. 1791년 12월 8일 오후 3시였다.
Ⅱ. 신유박해(1801)
조선의 초기 천주교회는 국내 신자들의 자생적 노력과 남인학자들의 정치적 배경들이 작용하여 점차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주문모 신부의 입국 및 선교활동에 힘입어 그 교세가 크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799년 천주교 금압정책을 늦추어 오던 남인시파의 영수 채제공이 사망하고 정조
임금 마저 승하하여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고 영조의 계비이며 순조의 증조모가 되는 정순황후
가 수렴청정을 하게 됨으로써 시국은 급변하여 노론벽파에서는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들을
일차적으로 제거하려고 서두르게 되었다. 대왕대비인 정순 왕후 김씨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케 하고 뿌리뽑도록 하라는 사학금압(邪學禁壓) 하교를
내리게 되었다.
1. 전개
† 서울에서의 박해
1800년 12월 17일(음) 중인 최필공(토마스), 12월 19일(음) 최필제(베드로), 오현달(스테파노)이 체포
되었고, 조동섬(유스티노)과 이기연, 1801년 1월 9일(음)에는 총회장 최창현(요한)이 체포되었다.
명도회(明道會) 회장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책 궤짝 사건이 1월 19일(음) 발생하였다. 정약종은
천주교 서적과 성물 및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이 들어 있는 책 궤짝을 임대인(토마스)을 시켜 황사영
(알렉시오)의 집으로 옮기는 도중, 관원에게 발각되어 임대인은 체포되고, 정약종은 체포 심문받게
되었다.
2월 9일(음)에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루가)등을 잡아다가 국문(鞠問)하기 시작하였고,
11일(음)에는 권철신(암브로시오)와 정약종을, 14일(음)에는 정약전을, 16일(음)에는 이기양이 체포
되어 심문을 받았다. 정약종․ 홍낙민(루가)․ 최창현․ 최필공․ 이승훈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으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장기현
과 신지도로 각각 유배당하였다.
† 경기도․ 충청도에서의 박해
충청도에서는 내포지방의 사도였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이 2월 5일(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2월 6일(음) 공주로 이송되어 이종국 등 신자들과 참수 당하였다. 경기도 포천에서는
홍교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아들 홍인(레오)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2월 26일(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3월 13일(음) 여주 성문 밖에서 원경도(요한)․ 임희영․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마르티노)․ 정종호등 5명이 처형되었고, 조용삼(베드로)은 옥사하였다.
양근에서도 같은 무렵에 유한숙과 윤유일(바오로)의 동생 윤유오(야고보)등 13명이 처형되었고,
4월 2일(음)에는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가롤로)과 최필공의 사촌인 최필제(베드로), 정인혁(타데오),
정광수의 처 윤운혜(루치아), 정복혜(칸디다)와 이합규등 6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박해의 확산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 중국으로 피신하려고 황해도 황주까지 갔던 주문모 신부는 다시 서울로 돌아
와 자수하여 4월 19일(음)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은언군
이인의 처 송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 마리아, 강화도로 유배 간 은언군이 3월 17일(음) 사사(賜死)
되었다. 또 노론인 양반 김백순과 많은 종교화를 그린 이희영(루가)이 3월 29일(음) , 김건순은 4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다.
5월 22일(음)에는 강완숙(골롬바), 궁녀 강경복(수산나), 궁녀 문영인( 비비안나), 최인길(마티아)의
동생 최인철(마티아), 김범우의 동생 김현우(마태오), 이희영의 조카 이현, 홍필주(필립보)와 가까운
친척인 홍정호, 김연이(율리안나), 한신애(아가다)등 9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으며, 김범우
의 동생 김이우(바르나바)도 이때 포청에서 고문을 받아 죽었다. 또 이날 정광수의 누이 정순매(바르
바라), 윤유일의 사촌누이 윤점혜(아가다), 고광성, 이국승(바오로), 황(黃)포수 등도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여주․ 양근․ 평산․ 봉산․ 공주로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 전라도에서의 박해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박해 초에 체포된 즉시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 윤지충(바오로)의 동생 윤지헌, 유항검 집안
과 인척간인 이우집등이 체포되어 3월 28일(음)부터 전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았고, 중인 김유산도
붙잡혀 문초를 받았다. 한정흠(스타니슬라오), 유항검 집의 종 김천애(안드레아), 최여겸(마티아)
등은 7월 13일(음) 사형 선고를 받고 고향인 김제․ 전주․ 무장으로 각각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서양 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과 관련된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은 9월 11일(음) 사형
선고를 받고 전주로 압송되어 처형당하였다.
† 백서 사건
충청도 배론 김귀동의 집에 피신해 있던 황사영은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 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하는 내용의〈백서〉를 작성하여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고 하였다. 황심은 중국을 여러 번 왕래한 옥천희와 함께〈백서〉를 북경에 전달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옥천희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책문에서 잡히고, 황심이 9월 15일(음) 체포
됨에 따라 발각되었고, 황사영과 김한빈이 9월 29일(음) 제천에서 잡혔다.
김한빈과 황심은 10월 25일(음) 참수 당하였으며, 황사영․ 옥천희․ 현계흠(바오로)은 11월 5일(음)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정약용․ 정약전 등은 공모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당하였다.
정부에서는 조윤대를 진주사(陳奏使)를 파견하여 신유박해 전반에 관한 청나라의 이해를 촉구하고,
주문모 신부의 처형에 따른 청나라 측의 반발을 예방하고자 하였다. <토사주문>과 불리한 내용을
삭제한 <가백서>(假帛書)가 보고되었다.
대왕대비 김씨는 백성들에게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반교문(頒敎文), 즉〈척사윤음〉을
12월 22일(음) 반포하였으며,남은 사학죄인들을 처형하였는데 12월 22일(음)에는 유항검의 처 신희,
며느리 이순이(루갈다)와 유관검의 처 이육희, 아들 유중철(요한), 유중성(마태오)에 대한 사형
선고가 있었다.
12월 26일(음) 에는 이윤하의 아들 이경도(가롤로)․ 손경윤(제르바시오)․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
니오)․ 최설애․ 김의호․ 송재기․ 장덕유․ 변득중 등은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또 정광수(바르나바)는
여주에서, 김귀동과 황일광(시몬)은 홍주에서, 김일호와 권철신의 양자인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은
양근에서, 한덕운(토마스)은 광주에서, 홍교만의 아들 홍인(레오)은 포천에서 각각 처형당하였다.
2. 결과
첫째, 신유박해는 조선 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 교회를 거의 폐허화시켰
고, 처형된 사람이 100여명, 유배된 사람은 400여명에 이르게 되어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
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유방제(여항덕)신부가 1834년에 입국할 때까지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다. 둘째, 신유박해를 계기로 천주교 신앙이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경기도․ 충청도․강원도 경상도 등의 산간 지방으로 숨어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교우촌 형성) 셋째, 양반 신자들의 대부분이 순교 또는 배교하고 귀양감에 따라 스스로
양반지위를 포기한 민중적 양반이나 중인 이하의 신분층이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교회의 민중적인 성격은 더욱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넷째, 신유박해를 겪으면서 서양의 발달된 과학 기술까지도 탐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서양 군함을
요청하여 신교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황사영의〈백서〉내용이 드러나면서 천주교는 물론이고 발달
된 서양 과학 기술까지도 배척하게 되었다. 때문에 근대화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Ⅲ. 신유박해 이후 기해박해까지의 교회
1. 성직자 영입운동과 1811년 교황 청원서
모진 박해를 거친 교회는 권기인(권철신의 조카)과 내포지방의 권신덕 바오로, 이여진 요한, 신태보
베드로, 홍낙민 루까의 아들 홍우송 등 교우들이 온힘을 기울여 조선천주교회의 재건을 위해 전념하
면서 성직자 영입에 힘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1811년에는 북경주교와 교황께 권기인이 편지를 써서
이여진 요한이 1811년에 신앙의 밀사로 파견되어 전하게 된다.
2. 1815년 : 을해박해
1814년 전국에 기근이 들어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전치수의 탐욕과 지방관의 자의로 중앙의 지시도
없이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1815년 부활축일에 청송고을의 노래산에서 고성운
(베드로), 고성대(요셉) 형제등 35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경주진영으로 압송되었는데 이중 19명은
배교하고 2명은 옥사하였으며 14명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진보의 머루산에서는 김시우(알렉시오)를 비롯하여 33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안동진영에서 20명이
배교하고 13명이 대구감영으로 갔다. 영양의 우련밭에서 김종한(안드레아)등 100여명이 체포되어
안동 진영에서 많은 이들이 배교하고 33명만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 동안 26명이 옥사하고
병사도 하였으며 2년 동안의 옥살이를 하는 동안 7명만이 남아 관덕정에서 참수 당하였다.
3. 1825년 교황 청원서 발송
1816년부터 여러 차례 북경에 다니면서 끊임없이 청원하였고 1824년에 유진길과 정하상이 함께 북경
에 다녀온다. 그 후 유진길이 교황님께 쓴 편지가 움삐에레스 신부에 의해 그의 의견서와 더불어
교황청에 전달되었고, 포교성성은 1827년 각 수도회에 서한을 보내며 우선 파리 외방전교회에 서한
을 보내어 조선 포교지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고 외방전교회는 오래 주저하던 끝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원에 의해 수락하게 된다.
4. 1827년 정해박해 : 전라도
1827년 전라도 곡성을 시작으로 전라도 전역, 경상도 상주,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지역에서 일어난
박해이다. 곡성에서 시작된 박해는 전라도 전역으로 파급되면서 24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어서 4월 22일 전주포졸들이 경상도의 상주에서 신태보(베드로)를 체포,
전주로 압송해가자 이를 계기로 경상도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어 교우촌이 습격을 당하여 많은 교우들
이 체포되었다.
중앙정부가 이번 박해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관장들과 포졸들의 탐욕과 개인적인 밀고에서 비롯된
이 박해는 신자들이 즉시 사형선고를 받지 않고 옥에 갇혀 있다가 1839년 기해박해에 이르러서야
순교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옥안에서 병고와 고통 속에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이 박해의 특징이다.
5. 1831년 9월 9일 : 조선대목구 설정, 초대 조선 대목구장(소 브뤼기애르 주교)
Ⅳ. 기해 박해(1839)
1834년 11월 (음) 순조가 승하하면서 그의 손자인 헌종이 8세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왕대비 순원왕
후(순조 비, 안동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이었으
며, 섭정을 도와주던 대비의 오라버니 김유근도 천주교에 호의적이어서 당상 역관이며 천주교 신자
인 유진길(아우구스티노)과 절친하여 1840년 12월 죽기 전에 그에게서 대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천주교회는 1836년 이후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될 수
있었고, 신자 수는 약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풍양 조씨가 세력을 잡으면서 바뀌게 되었다. 풍양 조씨는 조만영의 딸이 효명세자
익종(헌종의 부친)비로 간택되고, 1827년 익종이 대리 청정을 하게 된 이후부터 새로운 세력으로 등
장하였다. 그러나 1830년 익종이 사망하고, 1837년 안동 김씨 김조근의 딸이 헌종 비(효현왕후)비로
간택되면서 다시 안동 김씨 세력에 밀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김유근이 1836년 무렵부터 중풍에
걸려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하게 되면서 정권은 우의정인 이지연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는 풍양
조씨와 손을 잡고 천주교 박해를 계획하는 동시에 이를 계기로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고자
하였다.
1. 전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이미 1836년 말 부터 시작되었다. 이듬해 1월 16일에 권득인(베드로)이 체포되
었으며, 1월 말에는 강원도에서 최해성(요한)이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투옥되었고, 2월에는 서울
박아기( 안나)가, 3월 21일에는 구산에서 김성우(안토니오)의 두 아우가 체포되었다. 1839년 4월 7일
에는 서울의 회장 남명혁(다미아노), 이광헌(아우구스티노)과 가족들, 4월 15일에는 궁녀 전경협(아
가다)과 박희순(루치아)이 체포되었다. 이처럼 각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면서 감옥은 이미
그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내려져 박해는 더욱 치열해졌다.
이때 배교자인 김순성(일명 여상)의 제보로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조신철(가롤로),
정하상(바오로), 역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이 체포되었다. 이때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호교론서인〈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품안에 품고 있었는데, 체포된 후 조정에 보고되었다.
포졸들은 수리산 교우촌으로 몰려가 최양업(토마)신부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
아), 이에메렌시아 등 여러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포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자수를
결심하고 홀로 포졸들에게 자현(自現)하였으니, 이때가 8월 10일이었다.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의 재난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어 자수를 권고하였고,
이에 따라 두 신부는 9월 6일 충청도 홍주에서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에 앞서 그들은 로마
의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 보고서를 올렸는데, 당시의 교세가 ‘신자수 약 1만명, 영세자 1,200명,
견진자 2,500명, 고해자 4,500명, 영성체자 4,000명, 혼배자 150명, 종부성사 60명, 예비 신자 600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압송되어 오자, 앵베르 주교는 그들과 함께 포청에서 신문을 받은 다음
의금부에서 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그리고 9월 21일 군문효수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정하상․ 유진길 등이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9월 26일에는 조신철, 남이관(세바스티아
노),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 김유리대(율리에타), 전경협(아가다), 박봉손(막달레나),
홍금주(뻬르뻬뚜아), 허계임(막달레나), 김효임 (골롬바), 유대철(베드로)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
었다. 조정에서는 11월 23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함으로써 천주교가 사학임을 다시 한 번 민중
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이 대대적인 박해를 끝내고자 하였다.
2. 결과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 수는 적었으나 박해받은 지역은 더 넓었다는 데 특징이 있
다. 박해 이전에 신자들이 이미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와 경상도 등
지에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강원도에
서도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1백 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와 지도자들을 잃음으로써 침체에 빠지게 되었고, 신앙 공동체는 이전
보다 더 가난한 서민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국경 감시를 강화했고, 살아
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거나 신자임을 감추고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 결과 신자들이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이 짙어지게 되었고, 신앙 내용은 더 복음적이고 교리 실천적
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 교회 서적이 부족하게 되면서 후세나 이웃에게 구전으로 교리를 전수해야
만 했으므로 어린이나 예비 신자들은 깊은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박해의
여파로, 또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 교우촌의 형성으로 더 넓은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는 결과를 낳
게 되었다.(기해박해 순교자 70위 성인)
Ⅴ. 병오 박해(1846)
1. 발단
병오박해는1846년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박해이다. 당시 한국에 입국해 있던 페레올
주교는 포교에 힘쓰는 한편 한국의 입국하기 하기 위해 만주에 머물러 있던 매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맞아들일 방도를 강구하였다. 그런데 육로를 통한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서해에서
비교적 안전한 바닷길을 찾아보도록 하기 위해 김신부를 황해도로 보냈다.
1846년 5월 13일 서울을 떠난 김신부는 황해도 연안의 백령도에 다달아, 중국 무인도를 거쳐 한국에
은밀히 입국하는 바닷길을 구상하고 배를 빌려 메스트로 신부 등을 데려올 방안을 살피던 중 순위도
에서 포졸들에게 우연한 일로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래서 김신부는 배주인인 임성룡, 뱃사공 등과
함께 옹진의 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5일 후에는 해주로 이송되어 신문을 받았는데, 그의 신분
이 알려지자 해주 감사는 일의 중대성에 놀라 그를 곧 서울로 압송하였다.
2. 전개
김신부는 온갖 신문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부임을 밝히며 천주교 탄압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세계의
정세를 알려 정부당국의 강성을 촉구하는 한편, 교우들을 대라는 가혹한 추궁에도 불구하고 이미 밝
혀진 교우들만을 지적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와 관련된 10여명이 잡히게 되었는데 그 해 음력 6월
에는 배주인인 임성룡이 부친 임치백이 붙잡히고 7월에는 <기해일기>를 지은 현석문 등이 잡혔으
며, 8월에는 한이형이 체포되었다.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이 형벌을 받고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Cé
cille)함장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충청도의 외연도)에 나타나 편지 하나를 조선 정부에 전하도록 하였
다. 그때가 1846년 8월 9일이었다. 당시 세실 함장은 기해박해 때 조선에서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해 항의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충청 감사의 장계로 곧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도 옥중에서 판관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헌종과 대신들이 9월 5일에 묘당 회의(廟堂會議)를, 9월 15일에는 희정당(熙政堂)에서
어전 회의를 열었다. 이때 영의정 권돈인과 대신들은 세실의 편지에 대한 회신 여부와 김대건 신부의
처형 문제를 서로 연관지어 헌종에게 건의했고, 헌종은 이를 받아들여 효수 경중(梟首警衆)의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세실 제독의 조선 원정이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고,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신자
들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된 것이다. 이러한 판결에 따라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음 7월 26일) 한강변의 노들 즉 새남터〔沙南基-사남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만 25세였다.
그로부터 3일 뒤인 9월 19일, 그동안 신앙을 굳게 지켜 오던 현석문도 군문 효수형을 받고 49세의 나
이로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한편 포도청의 옥에 남아 있던 임치백(요셉)과 남경문(베드로)은 이튿
날 매를 맞다가 순교하였으며, 한이형(라우렌시오)․ 이간난(아가다)․ 우술임(수산나)․ 김임이(데레
사)․ 정철염(가타리나)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같은 날 함께 장사(杖死)로 순교하였다.(병오박해
순교자 9위 성인)
3. 결과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 온 신자들은 박해 소문을 듣
자마자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일시 활동은 중단하고 안전한 교우촌
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더 이상 신자들을 색출해 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1801년이나
1839년의 박해 때처럼 새로운 척사령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페레올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몇
달 뒤 다시 교우촌 순방을 시작할 수 있었다.
Ⅴ. 병인박해
1. 시대 상황
조선 제 25대 철종(재위 기간 : 1849-1863)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풍양 조씨인 신정왕후는 철종의 8촌
인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왕으로 지명하여 자신의 부군이었던 익종(순조의 아들)의 대통을 계
승하도록 하였다. 이에 1863년 12월 13일에 창덕궁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게 되니 이
가 곧 제 26대 고종이다. 대왕대비는 고종의 배후에서 수렴청정을 하다가 1866년 2월에 수렴청정을
끝내고 물러나자 신왕의 생부인 이하응 대원군이 1873년까지 통치권을 장악하여 사실상 섭정을 행하
였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주변 나라의 상황은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열강들의 이권 다툼 각축장이 되어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조선 역시 서세동점의 시대적 상황에 싸여 조선 해안에 프랑스, 영국, 러
시아, 미국 등 異樣船의 출몰이 잦았으니 1832년에서 1860년 까지 무려 30여 차례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양선의 출몰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서양 열강의 실제적인 무력 위협은 조선 사회를 상당히 불안하
게 하는 실제적인 대외적 요인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계속되는 세도정치아래 악화된 탐관오리들의
폭정으로 동학과 농민들의 봉기와 民亂이 계속되어 더욱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2. 원인
첫째, 서양 세력의 문호 개방 압력이다. 당시 조선의 대외정책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事大交鄰 정책
을 고수하면서 당시의 시대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폈다. 둘째, 북경에 간 사
신이 보고한 편지에서 1866년 1월 하순 중국에서 자행된 서양인의 살육사실이 천주교 박해의 주요한
자극제가 된 것이다. 셋째, 대원군이 정권을 유지를 하고 정적들의 비난을 일식시키기 위함이다.
3. 전개
(1) 1866년 봄
1866년 2월 14일 포졸들이 두 차례나 장 베르뇌 주교가 머물고 있는 홍봉주 집에 찾아와 경복궁의 중
건을 위한 원납전을 추렴하러 왔다고 하면서 조사를 하고 갔다. 이어 천주교 탄압 명령이 내려지자 2
월 23일 베르뇌 주교를 필두로 홍봉주, 이선이 등이 포청에 잡혀감으로써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
다.
3월 1일 남종삼이 잡히게 되었고, 선교사 3명과 정의배, 전장운, 최형 등도 체포되었다. 3월 7일 남종
삼(요한)과 홍봉주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고, 같은 날 새남터 병영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
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등 4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군문효수 되었다. 3월 9일에는 최형(베드로)과
전장운(요한)이 서소문에서 참수, 3월 11일에는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새남터에서, 3월 30일
에는 다블뤼 주교, 위앵,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요셉), 황석두(루가) 등이 충청도 보령 갈매못에서 참
수되었다.
프랑스 선교사와 많은 신자들이 희생당하였으며, 아직 체포되지 않았던 선교사로는 리델, 페롱, 깔
레 신부가 있었다. 리델 신부는 극적으로 조선을 탈출하여 박해 사실을 프랑스 공사관과 해군 사령부
에 알림으로써 프랑스의 개입이 시작되어 병인양요가 발발하게 되었다.
(2) 1866년 가을
리델 신부는 조선 신자 11명과 함께 배편으로 탈출하여 7월 7일 중국에 도착하여, 천진으로 가서 프
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에게 박해의 사실을 알렸다. 로즈 제독은 1866년 9월 26일 한강을 거
슬러 양화진을 거쳐 서강에 다다랐다. 10월 11일에는 로즈 제독은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
사들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강화도를 점령하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프랑스 군인들은 강화읍에 들어가 관아와 무기고를 점령하고, 화약고를 폭파시켰고, 강화행궁을 불
태웠으며, 외규장각의 고문서를 약탈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한
강 양화진에까지 진출한 것을 보고 이는 분명히 천주교 신자가 개입하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고 그
곳을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 장소로 지시하였다.
이에 이의송,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을 비롯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병인양
요 이후 박해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11월 문경에서는 이제현, 김예기, 김인기 등이, 12월 전주 숲정이
에서는 조화서(베드로), 조윤호(요셉), 이명서(베드로),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정원지(베드로), 손선
지(베드로), 한재권(요셉) 등이 순교하였다. 병인양요로 인하여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이 더욱 확
고하게 되었고,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3) 1868년 4월
대원군의 천주교 말살 정책은 1868년 4월 ‘오페르트 남연군 묘 도굴사건’으로 인하여 더욱 가혹해졌
다. 오페르트는 대원군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그 유해를 미끼로 하여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
고자 하였다 그러나 남연군 묘를 도굴하던 중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으며, 이 사건은 당시 국
제적으로도 매우 불미스러운 일로 치부되어 오페르트와 그 일당들은 중국 주재 영사관에서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천주교로써도 안타까운 일은 이 일에 1866년 중국에 피신하였던 페롱 신부가 가담하였다는 데 있다.
이 사건으로 페롱 신부는 조선교구에서 인도로 선교지가 바뀌게 되었다. 이 사건은 대원군으로 하여
금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굴 사건의 안내자는 반드시 천주교 신
자가 개입되었다고 보았다. 이로써 잠시 주춤하였던 박해는 더욱 가열되었고, 장치선, 최인서, 김계
교, 이신규 등이 처형되었다.
(4) 1781년 辛未洋擾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어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평양군민들에 의
해 화공을 당하여 강 위에서 불타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군함 5척을 거느리고 침략하여 왔는데
병인양요 이래 성곽을 수리하고 포대를 축조하는 등 외국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오던 대원군은 강화
도 광성진 전투와 갑곶에 상륙한 미군에게 타격을 가하여 미군을 물리쳤다.
열강과의 무력 충돌에서 연전연승한 대원군과 조야의 민심은 배외의식으로 충만하고 서양은 오랑캐
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잔존해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처형시켰다. 이로써 쇄국 정책은 더욱 굳
어졌고, 斥洋의 결의를 다지고자 전국 각 요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
양 오랑캐가 쳐들어 올 때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해야 한다.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
다.)’
4. 박해의 결과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병인박해는 멈추게 되었으나 이 기간 동안 교회는 기해와 병오박해 이후
재건되었던 모든 인적 물적 재원들을 모두 잃게 되었고 교회 조직은 완전히 무너졌다. 처형된 순교
자만도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과 남종삼 등을 비롯하여 8000여명으로 추정되
고 있다.
겨우 살아남은 교우들은 집과 모든 재산을 잃고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나갔고, 1876년 조선이 문호
를 개방함으로써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게 되었고 교회재건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순교자들의
피로 자란 한국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생기를 찾게 되었다. 1890년 제 8대 조선교구장 뮈
텔 주교는 시복 수속을 위해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치명일기>를 간행하였고, 여기에 수
록된 순교자 877명 가운데 24위가 1968년 복자품에,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Ⅵ. 신앙의 자유
1. 신교의 자유
(1)고종의 관용 정책
대원군 은퇴 이후 천주교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는 완화되었으니 고종은 천주교와 관련되어 치죄당한
관리들의 복권을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명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집권 후에도 외교 조약이 맺
어지는 1880년 후반까지는 사사로운 박해는 계속되었다. 청나라에 가있던 성직자들이 입국을 서두르
게 되었다.
1861년 조선에 와서 선교하다 병인박해 때 중국에 피신해 있던 리델 신부는 1868년 로마에서 조선
교구 제 6대 교구장에 임명되어 중국에서 조선 입국의 때를 기다리다가 1877년 9월 조선에 재입국하
여 1878년 1월에 체포되어 5개월 옥고를 치르고 만주로 추방되었다. 리델 주교의 추방은 일단 조선에
서의 성직자에 대한 생명의 위협이 사라진 것을 뜻한다.
(2) 문호 개방 정책과 신교자유
외국과의 문호 개방 정책이 굳어져 감에 따라 미국은 1882년 제물포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하
여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 체결. 프랑스 1886년 조약을 맺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불조
약 이후 비로소 상복을 벗고 신부복을 입을 수 있고, 개항지 내에서 선교사로서 보다는 외국인의 자
격으로서 여권만 있으면 어디든 자유로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신도들에게 이 조약으로 신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1895년 뮈뗄 주교와 고종
과의 만남 이후 병인박해 때 순교했던 이들의 신원(伸寃)이 있은 후부터 신도들의 종교적 자유가 어
느 정도 보장되었다. 법률적으로 신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은 1899년의 교민조약과 1904년의 선교조
약 체결 이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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