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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 경주 최 부잣집"하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대로 경주 교동에 소재해 있는 "교촌댁"을 일컫는다.
그러나 최 부잣집의 집안 내력을 사전에 인지하게 되면,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충의당(忠義堂)"을 먼저
찾아가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경주 최 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선으로부터 28세
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이다. 엄청난 재산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경주 최 부자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의 1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장군이다.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순국하니 그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평소의 생활도 청렴하였던 최진립은 이렇듯 일생을 장렬하게 마쳤다.
행정구역으로 울산광역시 두서면 활천리에 서 있는 경주최씨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묘지안내석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해 있는 최 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 최진립이 살았던 "충의당(忠義堂)"
"충의당(忠義堂)" 의 사랑채
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
되어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행랑채에 걸려있는 멋진 글씨의 현판과 안뜰에 둘러쳐진 담장.
현판의 글은 중용(中庸)의 신사명변(愼思明辨)을 인용하였다. -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기와담 사이의 문양들. 귀면(鬼面),천년(千年)의 미소.......
충의당의 사당
경주교동의 최 부잣집
대문과 행랑채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
본래 최 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1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는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현판.
최 부잣집의 가훈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용(中庸)과 의(義)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 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지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뼈에 심기 위한 듯,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조부(祖父) 최만희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친부(親父)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다.
퇴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유필(儒筆)의 품격(品格)이 드러난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글씨는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이며 높은 품위와 忠과 義의 가풍을 잇는 21세기 선비인 충의당(忠義堂) 주인
최채량(崔採亮)의 글씨다. 최채량(崔採亮)의 아호 역시 "어리석은 산" (愚山)이다.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되어있다.
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보리 고개를 이야기하던 시절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고 죽고 싶다던 시절에 쌀이란 백성들에게 하늘이었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
이런 곳간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
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
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면 동(東)으로 동해바다를 접하는 감포일대, 서(西)로 영천,남(南)으로 울산,북(北)으로는
포항을 포함하는 광대한 면적이다.
이렇듯 최 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에, 나머지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최 부잣집 안채 |
첫댓글 훌룡하신선조님 이시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