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외할머니(박분희)의 사진을 보면 외할머니의 선한 속마음까지도 전해져오는 듯하다. 1980년 5월 남북이산가족 상봉시, 화장실 가는 것도 참으며 TV 앞에서 혈육상봉의 애타는 모습을 몇날 며칠 눈물로 지켜본 외할머니는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외할머니의 측은지심 앞에 우리 가족은 고개가 숙여졌다. 어머님과 손자들에게까지 속옷 깊숙이 넣어 둔 용 돈을 꺼내 건네주신 외할머니.
나의 배우자가 첫아이 임신을 했을 때도 성남 모란시장에서 병아리 12마리를 사다가 닭이 몸에 좋으니 크거든 매달 한 마리씩 잡아먹으라 하셨다. 그런데 다 큰 닭을 도저히 잡을 수 없어 동네사람들 좋은 일만 시켰지만 우리는 외할머니의 지극한 정성을 잊지 못한다.
내 평생 기억에 외할머니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도 없고, 아무리 억울해도 욕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우리 어머니 역시 40대에 홀로 되어 4남매를 키우며 이 세상 갖은 풍파 겪으면서도 외할머니의 선하디 선한 마음씨를 빼어 닮았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며 고난을 겪는다. 고난 없이 희망도 없고 성공도 없다. 고 난과 환난을 희망의 밑거름으로 삼고 이겨내는 사람만이 희망이란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진선미를 최고로 꼽지만 그중에서도 우리 가족은 선(善)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선이야말로 조물주가 내린 최고의 선물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가계(家系)의 총자산이다.
우리 가족은 읍내에서 누구 하나 부럽지 않고 잘나가던 때가 있었지만 아버님 의 병세로 가계가 급속도로 기울어졌다. 이후 반세기 동안 세상 밑바닥 인생을 모 두 겪어야만 했다. 삶은 고달프지만 우리 형제들은 외할머니의 선한 맘씨를 이어 받아 이웃에 피해 가는 일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늘 자신들은 손해가 따르지만 그것이 마음 편히 사는 길이었고 진리였다.
외할머니의 선한 마음씨를 이어받은 어머니는 온갖 풍파를 다 겪었다. 그러나 어머님은 세상 누구보다 선한 마음으로 우리 자녀들을 돌보며 살아오셨다. 그 선 한 힘이 우리 가족이 만난 거센 폭풍을 뚫고 일어서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선은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최후의 단초 가 됨을 우리 가족은 반세기 이어지는 처절한 삶 속에서 깨우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