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에서 만난 고산 윤선도
김도솔
땅끝! 어디가 땅의 끝일까, 둥근 지구에도 땅의 끝은 있는 걸까, 땅끝마을이라는 묘한 매력과 정서에 이끌려 추석 연휴의 막차를 탔다. 코로나19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멈추게 하고 그 중심에 있는 인간의 움직임을 최소화했지만, 오랫동안 침체하여 있던 일상에서 1박 2일의 여행은 마음이 들뜨기에 충분했다. 무작정 해남 땅끝마을을 가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아침 일찍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에 땅끝전망대까지는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는 걸로 나왔지만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고 이래저래 도착하고 보니 2시가 넘었다. 땅끝, 여기가 과연 그렇게도 기대하고 마음 설레게 했던 땅끝이구나! 송호 마을 땅끝선착장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우리의 기대는 갈 길을 잃었다. 땅의 끝이라면 그렇지 바다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리고…… 오랜만에 하는 여행에 대한 설렘과 이끌림으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거기까지 밖에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차에서 내리자 조금은 낯선 풍경의 바다가 있고 커다란 여객선이 있고 비릿한 바닷냄새가 있다. 무언가 아쉬운 풍경, 조금은 당혹스런 눈길에 보길도라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서둘러 30분 간격으로 있는 보길도 행 승선권을 구입해 차를 타고 배에 오른다. 차로 배를 타는 것이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새로운 체험이 재미있기도 하다. 길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따라 오는 뱃길을 보며 이제야 우리가 하룻길을 달려 이 먼 남해 땅끝까지 와 있음을 실감한다. 노화도 산양항에 도착하여 이십여 분을 달리자 2008년에 개통된 보길대교가 노화도와 보길도를 연결해주고 있다. 오늘 묵을 장소로 차에서 검색한 예송리상록수림 근처 한옥 펜션을 찾아갔다. 추석 연휴의 막바지라 관광객들이 많이 빠진 그곳은 여느 시골집처럼 조용하고 아늑하다. 환갑은 넘었을 것 같은 여주인이 부리나케 마스크를 찾아 쓰고 반갑게 맞아준다.
보길도.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에 있는 섬. 완도 남서쪽에 있는 노화도에서 약 3.8km 떨어져 있다. 주위에는 노화도·소안도를 비롯한 큰 섬과 예작도·장사도 등의 작은 섬들이 있다. 최고봉인 적자봉(425m) 이외에 광대봉(311m)·망월봉(364m) 등 300m 내외의 산이 사방에 솟아 있으며, 중앙에 있는 좁은 저지는 농경지로 이용된다. 해안은 소규모의 만이 발달한 북동쪽을 제외하면 드나듦이 대체로 단조로우며, 암석해안이 대부분이다. 섬의 명칭은 섬 내에 명당자리가 있다는 뜻(十用十一口[甫吉])으로 보길도라 불렀다고 한다.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 속하며,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나무·팽나무 등 250여 종의 식물이 자라며, 예송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예송리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40호)과 예송리 감탕나무(천연기념물 제338호)가 있다. 주민은 대부분 어업과 농업을 겸하며, 농산물로 쌀·보리·콩·고구마·마늘·무 등이 생산된다. 특히 마늘·보리·쌀 등은 생산량이 많아 농협수매가 이루어진다. 연근해에서는 전복·도미·삼치·멸치 등이 잡히며, 다시마·전복·소라 등의 채취와 굴·미역·김 등의 양식이 이루어진다. 유물·유적으로 부용동 정원(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을 비롯하여 윤선도가 세운 세연정, 선백도 바위에 새겨진 송시열비, 보길나루에서 발견된 조개더미, 예송리에서 채집된 유경역자식석촉 등이 있다. 매년 음력 12월 30일 각 마을에서는 당제와 지신밟기를 하며, 큰 나무와 바위에 고사를 지내기도 하는 등 마을의 안녕과 무사고를 비는 풍습이 있다. 중앙의 저지대와 연안을 따라 취락이 분포하며, 북쪽 노화도와 마주한 간척지에 행정관서와 상가가 들어서 있다. 능선과 해안선을 따라 소도로가 동서 방향으로 나 있으며, 해남군 토말과 완도에서 각각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섬의 남동쪽에 중리·예송리 해수욕장이 있다. 면적 32.142㎢, 해안선 길이 56.9km, 인구 2,852(2016). 『다음백과』
짐을 풀고 예송갯돌해변으로 나가자 발밑에서 사그락거리는 갯돌소리가 이제야 여행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여유와 포만감으로 채워진다. 저녁노을을 밟으며 해변을 한 바퀴 돌아 천천히 바다를 호흡해 본다. 인터넷을 통해 내일 돌아볼 보길도의 자세한 정보를 검색하고 잠자리에 눕자 꿈결인 듯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하루의 피로를 녹여 어느새 잠이 들었다. 일출을 기대했지만 새벽 장지문 사이로 들리는 파도 소리와 아슴푸레한 빗소리에 다시 잠이 든다. 밤새 엷은 가랑비가 다녀가셨나 보다. 여기까지 왔으니 오늘은 고산 윤선도의 자취를 더듬어볼 작정으로 가지고 온 능이찌게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꾸렸다.
보길도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고산(孤山) 윤선도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는 1587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후사가 없었던 윤씨 종가에 입양되어 내려간 윤선도는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경사백가(經史百家)를 두루 읽고, 의약․복서(卜筮)․지리까지 광범위하게 공부한 그는 진사시에 합격했다. 서른이 되던 해에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반대파들의 반격을 받아 함경도 경천으로 유배의 길을 떠났으며, 1년 뒤에는 귀양지를 기장으로 옮겼다. 인조반정 이후 윤선도는 송시열과 함께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병자호란이 끝나면서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왕손을 비롯한 왕가사람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에 해남에 있던 윤선도는 급히 배를 타고 강화도로 가는데, 그때는 이미 강화도마저 함락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배를 돌려 귀향하는 길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의에 차 있는 그에게 서인들로부터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고생하고 있을 적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비난까지 빗발치듯 들려왔다. 그는 세상을 다시 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풍랑으로 인해 보길도에 온 윤선도는 섬의 아름다운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에 매혹되어 제주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기암절벽과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정착한 곳 일대를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과 닮았다 하여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정치 싸움에서 찌들고 멍든 마음을 이곳에서 풍류로써 달랬던 듯하다. 고산은 이곳에다 낙서재, 세연정, 곡수당, 동천석실 등 25개소의 정자와 대를 만들고 어부사시사, 오우가, 산중신곡 등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일행은 낙서재를 시작으로 오늘 하루 고산의 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1637년(인조 15년)에 보길도에 들어와서 1671년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낙서재의 위치는 보길도에서 가장 좋은 택지라고 한다. 처음에는 모옥(茅屋)으로 지어 살다가 그 뒤에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는데 후손들에 의해 와가(瓦家)로 바뀌었다. 그는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소리에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한다. 낙서재 마당에는 고산이 달구경 하던 귀암(龜巖)이 발견되어 남쪽의 소은병과 낙서재, 귀암의 축선이 확인되었다. 주변의 사당과 정자와 전사청을 둘러보고 조금 떨어진 곳에 고산의 아들 학관이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했다는 곡수당으로 갔다. 낙서재에서 흐른 물이 이곳 가까이에서 곡수(曲水)를 이룬다하여 곡수당으로 이름을 붙인 듯하다. 주변에 강학을 목적으로 지은 서재와 상연지와 하연지를 둘러보고, 코스모스와 개여뀌와 수크렁이 가득한 들판에 가을을 맡겨두고 동천석실로 향했다.
동천석실은 해발 100m 정도의 산 중턱에 있어 주차장이라 하기는 어설픈 길가에 차를 세우고 물 없는 개울을 건너 동백나무 숲이 우거진 돌길을 따라 올라간다. 깊은 산에 가면 가끔 느끼는 것이지만 한낮인데도 어두침침하니 눈에 뭔가 덮인 듯 뿌연 숲길을 20여 분 정도 올라가자 동천석실이 보인다. 동천(洞天)은 신선들의 거주처인 동천복지에서 연유된 이름으로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천석실은 낙서재가 바라다 보이는 산자락에 자리해 있다. 3,306㎡의 공간에 한 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그가 차를 마시며 시를 지었던 곳이다. 차 바위에는 지금도 찻상 다리를 고정할 수 있도록 몇 개의 구멍이 패여 있다. 그는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청별항, 격자봉, 곡수당, 낙서재, 당음계의 빼어난 절경을 내려다보며 시상을 떠올리고 다도를 즐겼다고 하니 과연 신선이 따로 없었겠다. 동천석실에서 약 20m 아래에 있는 정자형 침실은 고산이 추운 날에는 불을 때고 잠시 쉬었던 곳으로 2002년 발굴 조사 시 석열과 기둥자리, 온돌 등이 발굴되었는데 아궁이가 석축 아래 멀리 떨어져 있는 점이 특이한 구조다. 신정일의 『신택리지』 「전라도」편에 동천석실 근처의 반석에서 차를 달이면서 세월을 보낸 윤선도의 그 당시 풍경을 보자.
공은 이곳을 몹시 사랑하여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고 하고서 그 위에 집을 짓고 수시로 찾아와 놀았다. 이곳에 앉으면 온 골짜기가 내려다보이고 격자봉과는 나란히 마주하게 되며, 낙서재 건물이 환하게 펼쳐진다. 대체로 사건이 있으면 무민당과 기旗를 들어 서로 호응하기도 했다. 공은 때때로 암석을 더위잡고 산행하기도 했는데, 발걸음이 매우 경쾌하여 나이가 젊은 건각들도 따라가지 못했다.
동천석실을 내려와 오던 길에 봤던 세연정으로 다시 고산의 발길을 따라가 본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나면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동천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 세연정에 이르면 연못에 조그마한 배를 띄우고 아름다운 미희들을 줄지어 앉혀놓고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가 비치는 것을 감상했다 하니 가히 풍류 가인이라 하겠다. 바위틈에서 솟는 물을 막아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큰 바위와 소나무들을 옮겨놓았으며, 그 둘레에 정자를 세우고 세연정(洗然亭)이라 이름 지었다. 세연정에 도착하니 초록을 머금은 물빛에 수련이 가득하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커다란 자라 한 마리가 바위에 앉아 유유자적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세연정에 올라 잠시 고산의 눈길이 머물렀던 곳을 더듬으며 그때의 가인처럼 오우가를 읊어본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구나 좋고도 그칠 때가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 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윤선도, 오우가 전문」
ㅡ발췌『도전시조암송100편』알토란 북스
판석보는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로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다 한다.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판석보를 건너 세연지를 한 바퀴 돌면서 세연정의 빼어난 풍광에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본다. 윤선도의 5대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방문한 뒤 쓴 『보길도지』에 그가 세연정에서 지냈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일기가 청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했다. 학관(고산의 서자)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侍立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 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옥소암玉簫岩에서 춤을 추게도 했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七岩(세연지에 잠긴 바위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 서도(양쪽 연못 안에 있는 섬)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 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가문에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에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20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으니, 그의 작품 속 자연은 대부분 엄격한 유교의 세계관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거나,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토대로 풍족한 삶을 누렸기 때문이리라.
무작정 오게 된 땅끝에서 우연히 만난 고산 윤선도! 300여 년 전의 그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가 남긴 작품세계를 생각해 본다. 돌아오는 길 망끝 전망대에 서서, 때로는 살면서 이런 무작정도 필요하구나, 그렇지 않았으면 이 먼 땅끝 보길도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조선시대 3대 가인으로 일컬어지는 고산을 만날 수 있었을까, 자문하며 이번 여행의 의미를 부여 해 본다.
ㅡ문예지 『작가 사상』제1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