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긴 생머리를 하고 다니는 멋진 여자 분과 식사를 같이 할 때,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제 자기도 노래방에서 자신 있게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세련된 차림새에다 활동적으로 지역신문의 기자 일을 하는 모습에서 당연히 가무에도 능한 분으로 생각하였다.
주부들 대상의 컴퓨터 연수장에서 대중가요인 한영애의 ‘선창’을 들려 준적이 있었다. 이 곡을 듣고부터는 자기의 개성대로 노래방만의 독특한 분위기에 맞게 자신있게 부르고 잘 어울린다고 했다. 어쩌면 이 분은 노래방에서 선구자, 아 목동아, 칠갑산같은 고상한 노래만 불렀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 흔히 듣는 말 ‘자, 이제 한 잔씩들 합시다.’
고운봉이 부른 원곡은 나온 지 60년도 더 된 노래다.
다음을 클릭하면 일절을 바로 들을 수 있다.
웬만한 젊은이들도 이 노래를 한 번씩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오륙십대들의 노래방에서는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이 노래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한 번도 스스로 부른 기억은 없다.
자, 이제 한영애의 ‘선창’을 들어보자.
어떤가?
‘야, 좋은데! 새로운 맛이야 멋있어.’
‘뭐 이래! 트로트는 트로트답게 불러야지 영 맛이 나지 않아.’
아무래도 좋다. 틀린 것은 아니다. 나와 다를 뿐이다. 그런데 한영애의 ‘선창’을 듣고 부터는 대중가요만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누가 부르느냐? 누구와 만나느냐? 누가 가르치느냐? 에 따라서 전혀 정반대의 인식이 생성된다는 것을.
언젠가 선생님들과의 간담회 때이다. 엄숙한 회의장에 이 ‘선창’을 크게 틀어 놓았다. 다 듣고 난 뒤에 어떠냐고, 자신이 학생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고? 잘 가르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틀리게는 가르치지 말며, 선생님 때문에 그 과목을 또 공부를 학교를 싫어하게는 하지 말자고. 우리 학창시절에 영어 선생님이 좋아서 영어가 재미있고 수학선생님이 싫어서 수학공부 자체가 싫어하게 되지는 않았는지?
이제 장르를 바꾸어서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한번 들어보자.
동요답게 부르는 것은 귀에 익었을 것이니까 조수미와 나훈아가 부르는 ‘엄마야 누나야’ 를 감상하여 보자.
먼저 전통 트로트 가수 나훈아의 ‘엄마야 누나야’를.
이제 신이 내린 목소리라는 세계적인 성악가 소프라노 조수미의 ‘엄마야 누나야’를.
어떤 것이 좋은 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아니 좋고 싫음이 아니라 느낌의 차이라고 해야 겠다.
그러나 그 느낌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도 변하며 또 나이를 먹음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삼십 대까지만 해도 창이나 민요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채널을 즉각 돌려 버렸는데 사오십 부터는 싫지는 않았는지 그냥 보는 경우가 많았다. 언제부터인지 민요나 국악 또는 고전이 슬슬 좋아지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게 회귀본능인가?
아무튼 조수미와 나훈아, 이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한국사회에서는 우상이고 거목이다.
누구를 좋아하든 어떤 음악의 장르를 좋아하든 그것은 자유며 개인의 취향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호·불호(好不好)가 고정되고 불변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하고 흥얼거릴 때가 있을 거니까.
2010.3.28./이선생
첫댓글 지금은 나훈아의 '엄마야 누나야'가 더 좋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이것도 날궂이하는건가...
절대공감합니다
노래는 하는 사는 사람마다 다르니 듣는이의 취향따라 호불호가 다르듯 공부도 어떤선생님이 어떻게 가르쳤나에 따라학생의 성취도 다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