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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썼던 몇 번의 글들은 아이와 함께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느라 많이 힘들었어요. 쉽게 쓰는 글이 더욱 어렵더라구요. 이번엔 부모님과 나누는 글이기에 편하게 쓰겠습니다.^^
“우리 아이가 예술가로서 재능이 있을까요?”
지인들에게서 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저의 답변은 확고합니다. “몰라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음악이나 체육에서는 타고난 신체적 특성이 재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체계적 학습/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다다르기 힘든 한계도 분명하고요. 하지만 미술은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 천재는 낭만주의가 만들어낸 환상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재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러한 낭만주의적 환상을 걷어내는 것에 동의하신다면 시각예술은 소통의 방식으로서 존재하고, 특별한 장애가 있어 그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이상 작가의 생물학적 특성이 표현능력을 좌우하지 않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미술은 무슨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지 테크닉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는 거죠. 살아가면서 더 많은 지식과 사건경험과 감정경험을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축적하고, 그를 통해 이야기가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질 뿐아니라 이야기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서술형식의 힘도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술을 인생을 관통하며 완성되는 작업이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예술가가 되는 것일까?
개념예술처럼 지적 활동에 크게 의존하는 작품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은 취향의 영역입니다.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고갱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각자의 취향이 다른 것이지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거나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기본적으론 취향에 의존합니다. 대부분의 악기 연주가는 훌륭한 연주로부터 감동하여 음악을 시작하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연주를 어떤 연주가로부터도 들을 수 없었기에 스스로 연주를 합니다. 자신의 가슴에 표현하고 싶은 음악이 있고, 그 음악은 자신만이 표현할 수밖에 없기에 그것을 완성할 때까지 연습을 거듭합니다.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갈증이 심하면 노력을 쉴 수가 없습니다. 훌륭한 악기 연주가들의 연습량은 누가 강제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갈증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인정받고 성공한 후에도 계속되는 이유죠. 그림을 포함하여 무엇을 표현하는 것은 그러한 경우가 많습니다. 좋아하는 취향이 그렇게 발전하고 예술적 갈증이 심하면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취향이 무엇이냐에 따라 글이 될 수도 있고 음악이 될 수도 있고 미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이 나의 길이다’라고 느끼는 것은 언제쯤일까요?
어려서 쉽게 선택/결정 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제가 다녔던 대학 조소과에서 한 친구는 사진만 찍고 다녔어요. 선배들과 교수들로부터 ‘그럴 거면 사진과에 입학할 것이지 조소과엔 왜 들어왔냐’라는 핀잔을 듣곤 했죠. 그 친구는 졸업하면서 사진과 조각을 접목하였고 그 학번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동료 중에서 가장 늦게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고, 누구도 조각가로 살아갈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지만 말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술역사에서 찾아봐도 고흐의 예술은 30대에 완성 되었지만 칸딘스키는 나이 서른쯤에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취향이 발전하고 예술적 갈증에 의해 자신의 인생길을 결정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내 아이 인생길의 방향이 빨리 결정되면 참 좋겠지만, 조급하여 서둘렀다간 엉뚱한 길에서 헛수고만 할지도 모릅니다. 어렵지만 길게 보고 차분히 기다리는 게 정답이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저는 주변 지인들이 ‘저희 아이가 재능이 있나요?’라고 질문하면 두루뭉술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커가면서 시각예술이란 도구로 자신의 감정이나 이야기를 표현하는 걸 즐기는지, 예술적 갈증을 갖게 되는지 차분히 관찰해야겠죠. 게다가 아이의 그림을 보여주며 ‘재능이 보이지 않나요?’라고 하면 정말 저는 모릅니다. 결과물에서 보여주는 표현능력은 어찌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모든 아이는 천재다.
지난 5월에 아이들 전시를 준비하며 선생들은 “우리 공방엔 특별한 아이만 모였나? 모두 천재 같아”했습니다. 그 말은 과장이 아녔어요, 몇몇 아이들만 특별나지 않았고 모두가 제각기 독특한 예술적 색채를 드러냈습니다. 그 후 우연히 대학교 특강을 맡게 되었어요. 저희는 수업 마지막쯤 대학생들에게 우리 아이들 그림을 보여줄 계획이었죠. 통상적으로 미대생들은 사물을 보는 시각이나 표현하는 방법적 문제가 관념적으로 굳어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이들의 그림이 커다란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예상을 했던 거죠.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의 대부분은 수시로 합격한, 실기시험 없이 학교를 입학한 이들이었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수업방식을 단번에 이해하고 쫓아왔으며 몇 번의 수업 만에 놀라운 가능성을 보였어요. 저희 선생들은 또 한 번 혼란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관성에 젖은 미술학도가 아니었어요. 그 후 공방에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도 어김없이 저희를 놀라게 했습니다.
우연히 아이 대상 미술학원을 들러본 적이 있어요. 책상 위에서, 정해진 도화지 크기, 정해진 재료, 정해진 시간, 정해진 주제, 어른들 눈에 보기 좋은 그림을 그립니다. 저희가 어려서 느꼈던 갑갑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러한 학원에서 배운 아이들은 도화지를 꽉 채우고, 주제와 재료 등을 지정해 주어야 하고, 다루는 주제도 편향적입니다. 자신만의 예술적 색채를 한껏 펼치지 못합니다. 반면 그러한 교육을 거치지 않은 아이들의 그림은 어른 눈에는 어설퍼 보일지 몰라도 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자신만의 색채/방식이 뚜렷합니다. 대학교 특강에서 만난 학생들도 수시합격생들이라 미술실기 훈련을 받지 않았기에 자신만의 색채를 쉽게 뽑아냈던 것이었죠.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를 가졌지만, 모두가 다르게 생겼고 모두가 자신만의 느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대상을 그려도 제각기 다른 느낌의 그림이 나옵니다. 저희가 수업시간에 동료의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리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똑같이 따라 해도 제각기 다른 느낌이 나올 수밖에 없고, 제각기 다른 ‘자신만의 가치’를 스스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은 누구와 비교당할 수 없는 것이니 ‘따라 한다’라는 것은 결코 부정적일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따라 하는 과정을 통해 ‘누구도 나의 것을 가져가지 못한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든사람은 자신만의 예술적 색채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자신만이 지닌 예술적 색채의 가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존감이라는 ‘자기 존재의 가치’와도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은 이것을 쉽게 표출해 냅니다. 통념이 주워주는 관념의 옷 두께가 얇아 날것의 자신이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게 드러난 자신의 예술적 색채를 발전시키는 것, 더 깊은 곳에 있는 자신만의 것을 드러내는 것은 땅을 깊이 파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경도 넓혀야 합니다. 지름 1m 내에서 손으로 땅을 판 것과 1km 내에서 포크레인을 비롯한 온갖 도구를 동원해 파는 것은 다른 결과를 낳죠. 선생이 해야 할 일은 반경을 넓혀주는 겁니다. 아이의 시야를 넓혀주고, 관련 자료를 찾아 보여주고, 새로운 재료로 가능성을 넓혀주고, 때로는 달갑지 않은 낯선 방식으로 환기해주고......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예술적 색채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물론 학교 다니며 단체생활하면 분위기에 쓸려가곤 해요. 학교에서 어떠한 그림이 칭찬을 받고 많은 아이로부터 추앙받으면 대부분의 아이는 그 스타일을 쫓기 마련입니다. 다수와의 동일성을 거부하면 소외를 비롯한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본능적으로 사람은 다수의 특성에 동일화하려는 심리를 가졌습니다. 물론 다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 1%도 있습니다. 제 친구는 그들을 1% 또라이라 부르는데요, 다수는 그 1%를 또라이 취급하기 때문이고, 그 1%는 관성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색채로 바라봅니다. 그 시각이 매우 독특할 뿐 아니라 불합리한 문화적 습성에 젖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에겐 또라이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들이 세상에 거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예술가가 됩니다. 물론 그 1%가 아닌 예술가들도 많습니다. 예술이란 수없이 자신을 깨뜨려야만 하는 과정이기에, 다수에 동화 되었다가도 스스로 깨고 나오니까요.
우리 공방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얻어 나가는 걸까?
선생들은 가끔 그런 대화를 하곤 했습니다. “울 공방 아이 중에 누가 예술가가 될까?” 농담처럼 이런저런 예측을 던져보지만 늘 답은 없을 수밖에요. 그러다 보니 예술가의 길을 걷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이곳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얻어 나갔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들이 그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찾으면 아주 작은 차이일지라도 수업방식에 변화가 생길 테니 저희에겐 중요한 고민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자존감과 일맥상통하는 예술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자존감이란 ‘자기 존재 가치를 스스로 깨닫는 것’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누구와도 비교당할 수 없으니, 어쩌면 예술은 그것을 깨달으면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똑같은 눈, 코, 입을 지녔어도 각기 다른 얼굴인 것처럼, 동일 대상을 같은 재료로 그려도 제각기 다른 그림이 나올진대, 재료사용과 표현에 무한 자유를 주면 아이들은 엄청난 작품을 쏟아 냅니다. 취향이 다른 어른들은 제각기 좋아하는 그림을 달리 꼽겠지만, 애초에 그들은 우열의 비교를 허락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다름의 차이로서만 존재하는 그들은 끊임없는 자기구축을 통해 ‘완성에 가까워지는 여정’으로 존재할 뿐이죠. 고흐와 칸딘스키의 그림을 두고 우열을 가늠할 수 없는 것처럼, 취향은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닌, 차이의 수평선 상에 존재하고, 예술은 그 수평선 상에 구축된 가치입니다. 그리고 그 예술적 색채는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삶의 속도
고흐와 칸딘스키 얘기를 조금 더 해봅니다. 고흐가 칸딘스키보다 더 이른 나이에 예술을 완성했으니 더 훌륭한 예술가라 얘기할 수 있을까요? 고흐의 예술은 30대에 완성 되었고 칸딘스키는 나이 서른쯤에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예술세계를 더 빨리 찾고 완성했다 해서 ‘더 훌륭한’ ‘더 성공한’예술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고, 삶의 여정에서 다다르기만 하면 됩니다. 빨리 도착한다고 더 훌륭한 것도 아니고, 남보다 속도가 느리다고 자괴감을 느낄 이유도 없는 것이죠. 사람마다 삶의 속도가 다르고, 자신의 속도로 최선을 다하면 훌륭한 삶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예술의 가치
저는 스위스 여행길에 자코메티 전시관을 들렀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좋아했던 조각가의 작품을 직접 본다는 설렘에 들어섰으나, 직접 대한 그의 작품에선 별다른 감동이 없었습니다. 몇 개의 전시장을 지나 피곤해졌을 때 복도에 방치된 그림과 마주쳤어요. 자코메티 형제가 그린 것이었습니다. 전 그 그림이 너무도 좋아 복도에 주저앉은 채 세 시간을 넋 놓고 있었어요. 적어도 제게 있어선 자코메티보다 그 형제가 더 영향력 있는 예술가였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어느 작품이 더 훌륭하냐, 누가 더 성공한 예술가냐는 비교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술에 있어서 실패의 의미
헤이리 공방에서 아이들은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작품을 뽑아내고, 그 작품은 어느 누구와 비교당할 수 없는 가치라는 걸 느꼈으면 합니다. 자신이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다면,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지닌 가능성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선생들과 동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를 즐겁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사회는 비교와 경쟁이 도를 넘어섰고, 실수와 실패는 경쟁에서 나락 하는 처참한 결과로 다가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도 있고, 실패를 분석하여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체계를 정립하고 있겠지만, 실수와 실패를 받아들이는 감정은 ‘과도한 비교와 경쟁’에 비례하여 부정적일 수밖에 없죠.
대부분 예술가의 표현기법은 우연성에서 얻어집니다. 우연히 떨어진 물감 덩어리, 혹은 망쳐서 홧김에 그린 그림을 다음날 바라보다 발견하는 우연한 표현력...... 하지만 수많은 노력과 고민이 있었기에 그 ‘우연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된 것이고, 버려지는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서의 실력이 됩니다. 수없이 많은 실패와 실수를 쌓지 않고는 진정한 실력을 얻을 수 없는 게 예술의 세계입니다. 그 실수와 실패를 좌절과 고통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할 것이고 훌륭한 예술가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저희의 바람이 있다면, 이곳 공방에서 아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 ‘실패를 즐겁게 받아 들였’으면 합니다. 자신의 실패를 분석하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그를 통해 우연한 현상을 나의 실력으로 축적하는 과정은 무척 즐거우니까요. 사실 실패보다 더 무서운 건 타인들로부터 인정받은 성공입니다. 많은 칭찬으로 주목받은 후,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하여 실패한다는 것은 마치 1등에서 꼴등으로 하락하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래서 인정받은 스타일에 머무르고 싶어 하고 새롭고 과감한 시도를 거부하게 됩니다. 아무런 발전 없이 도태하는 지름길입니다. 실패하기 위해 시도하고, 그 과정을 즐기고, 결과에서 얻지는 우연성을 획득하는 것. 그렇게 하나씩 찾아내는 자신만의 가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긴 시간 동안의 거듭되는 경험을 통해 몸으로 기억하는 것. 저희 선생들이 공방에서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것입니다.
선생들이 바라는 것.
아이들은 공방에서 한 번쯤 자신만의 독특함을 보입니다.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고, 제대로 끌어내면 빙산이 드러나겠죠. 최초 드러난 일각은 별거 아닌 사소한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고, 때로 아이들 스스로는 망친 것이라며 더 건드리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선생들과 함께 그 빙산을 드러내는 작업을 함께 한다면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특별한 가치(예술적 색채)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부모님과 아이들 스스로 알겠지만, 선생들은 아이들의 작업에 제한을 두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작업을 자유롭게 진행하도록 환경을 마련해 줄 뿐이죠. 하지만 저희 선생들은 아이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자료와 재료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종종 어떠한 제안을 하죠. 아이들이 보여준 가능성을 더욱 크게 끌어내기 위해 유도하고 길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때론 귀찮고 하기 싫더라도 한 번쯤은 최선을 다해 시도해 본다면, 그리고 그 시도가 긴 시간 동안 축적된다면 엄청난 실력을 갖추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실력이란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자신만의 가치라는 것을 느낄 것이고요.
그리고 자신의 실력을 갖추는 시기가 빠르거나 늦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자신만의 특별한 가치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시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각자의 얼굴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과정과 시기가 각자 다를 뿐이죠. 오히려 쉽고 빠르게 터득하는 것이 더 좋지 못한 예도 있습니다. 쉽게 가진 이들은 그것의 가치를 잘 모르기에 쉽게 버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게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못 느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실패를 즐기는 겁니다. 실패를 분석하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실패하기 위해 시도하고, 그 과정을 즐기고, 결과에서 얻지는 우연성을 획득하고, 그 우연한 현상을 나의 실력으로 축적하는 과정. 이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하기 위해선 망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망쳤다고 상심한 그림에서 배워야 하고, 실패를 즐겁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물론 한국사회의 특성상 아이들과 부모님이 이러한 가치관을 여유롭게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남과 비교당하고 경쟁에서 두각을 못 드러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의심’하게 되었을 때, 절대 쓰러지지 않을 든든한 뿌리 한 조각을 이곳에서 얻어나갔으면. 남들과의 속도경쟁에서 낙오되었을 때, ‘그래도 괜찮아’하며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뚝심을 얻어나갔으면. 거듭된 실패로 지쳐 쓰러졌을 때 ‘괜찮아, 그래도 끝까지 한번 가보자’라는 자기 확신을 얻어나갔으면 합니다.
첫댓글 한승이와 홍담이라면 이 글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좀 무리일까요?^^;;;
철학적 깊이가 너무 대단한 글입니다.
읽고 또 읽어보네요.
제가 위로받는 이 느낌은 뭘까요 .
참 좋은 스승을 만난 아이들이 부럽습니다.
빠르거나 느리거나 각자의 생김새가 다른것처럼 과정과 시기가 각자 다를뿐.. 실패를 통해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그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것..
삶자체가 예술이었네요.
감사한 글입니다♡
좋은 잡지의 한 칼럼을 읽은 듯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