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망서원 현판 ~
▶ 소윤공(小尹公)의 후 돈재공(遯齋公)
공의 휘(諱)는 여해(汝諧) 자(字)는 중화(仲和) 호(號)는 돈재이시며 소윤공(乙珍)후 고정공(之英)의 아들이시다.
공은 1450년(세종 32년. 庚午)나주에서 태어나셔서 일곱 살에 소학(小學)을 두세번 읽고 배운 바를 어김없이 잘 실천하였다.
공은 점점 자라면서 자기의 몸을 닦는 학문에 힘썼는데 익히기 어려운 시가(詩歌)와 문장(文章)은 써 놓고 외우면서 깊은 깨달음을 채득했다.
한때는 친구들에게서 과거를 보아 명리(名利)와 출세를 도모하기를 권유도 받았으나 공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내 자신을 수양하고 인격을 갖춘 뒤에 남을 다스려야지 내 자신이 인격을 갖추지 못하고 편안히 있으면서 어찌 남을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셨다.
그리고 논어(論語)를 읽으면서 처음 학이(學而)편에 인불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란 글을 보시고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읽으시고 감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배워야 되는 근본 강령(綱領)이 여기에 있구나”하셨다.
이때 문헌공(文獻公-汝昌)께서 공이 학문에 뜻이 있음을 들으시고 편지를 보내 스승의 도움을 구하지 않겠는가 하시니, 공이 그 편지를 보고 깊이 감격하여 마침내 문헌공을 따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문하에 가서 처음부터 중용(中庸)을 배우게 되니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등 제현(諸賢)들과 같이 학문(學問)을 강마(講磨)하여 경사(經史)의 뜻을 깨달은 바가 많았으며 평소에도 닭이 울면 일찍 일어나 반드시 의관 정제하고 조용히 않아서 글을 읽고 점잖게 질서를 잘 지키니 사림(士林)에서 번갈아 가면서 공을 천거하였다.
이때 부모님 상(喪)을 당하여서 6년동안 시묘(侍墓)하고, 슬픔을 다하며 예(禮)를 갖추어 복을 마치고, 다시 스승의 문하(門下)에 가니 때에 점필재 선생께서는 한훤, 일두, 정열공 원개(貞烈公 元槩), 곽승화(郭承華), 이승언(李承彦)등과 같이 가천정사(伽川精舍)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계셨는데, 공이 스승을 뵈오니 선생께서는 공에게 상사(喪事)의 전후 예절을 잘 행했는지 물으시고 이내 여러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정생(鄭生)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잘 받들고 있다”고 칭찬하셨다. 1480년(성종 11년. 庚子) 봄에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니 그해 6월에는 전조(銓曹)에 효와 청렴으로 천거되어 삭주(朔州) 교수에 제수 되었으며 1484년(성종 18년)에는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승진되셨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셨다.
1498년(연산 4년. 戊午) 7월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김굉필, 정여창등 제현들이 다 멀리 귀양 가게 되었는데 공은 그때 풍질(風疾)로 집에서 요양중에 있다가 갑자기 이 소식을 듣고 소장(疏章)을 써서 장차 제현들을 신구(伸救)할려고 하였으나, 난세(亂世)라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세태(世態)가 안정되고 또 김굉필 선생이 유배지(流配地)를 평안도 희천(熙川)에서 전라도 순천(順天-昇平), 공의 집 가까운 곳으로 옮긴지라 공은 병중이지만 가마를 타고 김굉필을 찾아가 상소문(上疏文) 초(草)한 것을 보이고 김굉필을 구하려 하였으나 김굉필 선생이 그 상소문을 살펴보시고 안 된다고 하시며 만약 이 소장을 올리면 우리 동지들이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니 올리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공은 그 상소문을 불살라 버리고 어찌할 수가 없음을 알고 통곡하며 돌아와 객을 물리치고 두문불출하며 지내시면서 호(號)를 스스로 돈재(遯齋)라 하시었다.
만년에는 부시(賦詩) 한편을 남겨 놓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시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시면 술과 시(詩)를 벗하며 놀으시고, 날마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주문공(朱文公)의 무이구곡(武夷九曲)등의 시를 읊으시며 지내시다가 혹 먼저 가신 제현들 생각이 나시면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고 또 제현들이 세상을 버린 날을 맞을 때마다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고기반찬을 멀리하고 채소 반찬만 드셨다.
공은 1530년(중종 25년. 庚寅) 3월 19일 향년 81세로 본가에서 별세하셨다.
공의 문집(文集)이 있어 전하고 있으며 행장(行狀)은 문경공(文景公) 박충원(朴忠元)이 찬하고 후에 사림에서 공을 추모하여 하동악양(河東岳陽)의 덕은사(德隱祠)에 향사(享祀)하였다.
▶ 도연명[陶淵明]의 詩 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兮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奚추愴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가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童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것들이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影예예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 서원 안내문 화순춘양 ]
[ 서원 본전 화순춘양]
[ 해망서원 정문(외삼문 화순춘양) ]
[ 서원 사우(위패봉안소 화순춘양) ]
[ 전각 화순춘양]
[ 소윤공파 재각(화순도곡) ]
[ 묘역정화 중수비 화순도곡]
[ 오고정 사적비 화순도곡]
[ 병판공 장자 소윤공묘소(남양주시 진건면 배양리) ]
[ 공은 병판공(丙判公) 익(翊)의 자(字) 개성소윤 을부(乙富) ]
[ 고려 개성소윤공 휘 을진공 묘소 (화순도곡) ]
[ 선대 묘역 전경(화순도곡) ]
[ 소윤공후 돈재여해공 묘소 전경(화순도곡) ]
편집/ 松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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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혹 잘못 서술된 내용이 있을시 바로잡을 수 있도록 조언 구합니다.
위의 "돈재공"에 대한 글의 출처가 어디인지요? 혹 참고 자료가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혹 낙촌 박충원(駱村 朴忠元)선생의 "돈재공 행장(行狀)" 이외의 다른 자료도 참조하셨는지요?
방문을 감사 드리며
본문 자료출처는
하동정씨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먼저는 인사도 못 드렸네요. 이런, 큰 결례를 했습니다. 송구합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원주 원가 대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