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악마는 한국 사회에서 기존에 형성된 붉은 색에 대한 고정 관념을 철저히 파괴했다. 지금까지 붉은 색의 코드는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각인돼 왔다. 색깔 논쟁의 틈바구니에서 마르크시즘과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색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 색이 이제 ‘레드 콤플렉스’를 벗고 축제의 색, 열정과 격동의 색으로 변하고 있다. 금기시 해온 붉은 색의 이념이 탈색되면서 붉은 악마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붉은 악마가 그려진 티셔츠가 100만장 이상이나 팔려나가고 도시의 거리와 광장에는 붉은 색의 거대한 물결이 해일처럼 범람한다. 붉은 색은 이제 즐거움, 감동, 나눔, 어울림의 색으로 자리잡았다. 전쟁의 코드에서 피의 상징이 열정과 승리, 사랑, 천진성과 순수성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념의 색채에 가려져 있던 붉은 색은 월드컵이라는 스포츠 정신과 융합되고 승화돼 새로운 문화 코드로 정착하고 있는 것이다.
붉은 악마의 본격적인 형성에는 ‘Be the Reds’ 캠페인이 한 몫을 했다. 붉은 악마 운영진은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대회 때부터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되자”라는 구호를 앞세운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은 서포터스 문화가 일부 축구 마니아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운용진은 이 캠페인을 월드컵 공식 후원사인 KT에 제안했지만 재정 지원 규모도 적고 제약도 많아 무산됐다. 이 틈을 SK텔레콤이 노렸다. SK텔레콤은 ‘Be the Reds’가 찍힌 티셔츠 제작과 응원 기념 음반 제작에 드는 경비를 지원했다.
‘붉은 악마’ 응원 포맷에 전세계 ‘들썩’
대한민국이라는 함성과 박수가 이어지는 붉은 악마의 응원 포맷은 전국민이 따라하는 대표 작품이 됐다. 응원 도구로는 북을 비롯해 머플러·휴지·앰프 등 다양한 아이템을 사용하며, 조직력과 적극성 면에서 세계 어느 나라 서포터스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의 울트라닛폰, 중국의 추미도 같은 성격의 자생적 집단이지만 규모와 활동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勢)가 불어났다. 간헐적으로 몇몇 동호인들이 모여 대표팀을 응원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현재 10만명이 넘는 숫자를 과시하는 이 세력의 폭발력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사회 현상으로 보인다.
붉은 악마는 원래 비늘 돋친 몸매에 산양의 머리와 박쥐의 날개를 달고 있는 데다 꼬리도 갖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구미문화권에서 그러한 모습으로 형상화된 괴물의 모습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도깨비나 귀신 같은 모습으로 변신한다. 1999년 브라질과의 축구 경기 때부터 이러한 유럽 문화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토착 문화 코드가 첨가돼 한국적인 상징으로 정착된다. 치우천왕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쇠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괴물의 모습이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한족과 싸워 이긴 배달나라의 자우지 환웅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호랑이가 가미돼 새로운 캐릭터로 발전했다. 붉은 악마는 괴물의 모습에 영웅의 기상과 도깨비의 신비, 그리고 호랑이의 친근함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붉은 악마는 이렇게 서양과 중국과 한국의 이질적인 문화를 융합시킨 퓨전 코드다.
커머셜리즘은 불순한 내셔널리즘을 부추기고, 내셔널리즘은 코스모폴리티즘을 파기시켜 버린다. 심볼, 로고, 엠블럼, 격문, 깃발, 플래카드, 카드섹션, 티셔츠, 박수, 구호….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스스로 모여들었지만, 엄밀히 말해 자발적 공중이라 할 수 없다. 광고와 마케팅이 지배하는 상업주의가 동원하는 군중만이 있을 뿐이다. 목이 쉬도록 악을 쓰면서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모습은 너무나 식상하다. 애국심은 가슴 깊은 곳에서 뿜어 올라와야 한다. 쥐어짜는 게 아니다. 운집한 군중들의 무리들을 보여주면서 집단 흥분을 일으키는 애국심 마케팅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지나친 애국주의는 인류의 평화를 해치고 나라의 경제를 좀먹는다.
커머셜의 카메라는 더 이상 사람의 무리들을 망원렌즈로 잡아선 안된다. 미세한 근육의 떨림과 땀에 전 런닝웨어를 냉혹하게 줌인해 들어가야 한다. 광기에 들뜬 함성보다는 터질 듯한 심장의 고동과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에 더 바짝 다가서야 한다. 몰려다니는 군중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는 초점 잃은 카메라로 머물러선 곤란하다. 10분의 1초, 10분의 1mm의 차이로 승패가 갈리고 운명이 바뀌는 페어플레이의 격전장을 더 바짝 클로즈업할 것을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