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학 '시조, 나는 이렇게 읽고 썼다'
깜부기불을 위하여
박명숙
누군가 말했다. 글에도 정년이 있으면 좋겠다고. 동감이 다. 누가 내게 글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부추기거나 유혹하거나 명령하지 않았으니, 순전히 스스로 원해서 망태를 뒤 집어쓴 꼴이긴 하다. 그러니 어디 가서 시인입네 못하고, 시를 쓴다지만 쓰는 것이 과연 시라고 할 수 있는지도 장담할 수 없다. 무엇을 뇌까리는지 내지르는지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쓰는 건지, 면목 없는 글쓰기의 날들이 벌거벗은 길의 발등을 쇠스랑으로 찍으며 걷는 것처럼 따갑다. 차라리 시 읽기를 좋아하고 시인을 동경하며 행복한 독자로 살던 시간이 훨씬 의미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내 시는 늘 절반은 내가 쓰고 절반은 독자들이 쓰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 전에 쓴 세 편의 시를 불러내 마음을 덧대며 다시 읽는다.
어둠이 한밑천이다, 깜부기불은 여전히
잿더미 속 제 몸을 밑불로 삼는다
지금은 현무의 시간, 어둠을 더 벌어야 한다
거북이 등짝 같은 오랜 밤을 다독이고
실배암 눈빛 같은 불씨를 파묻으며
아직은 천길 아궁이, 어둠을 더 일궈야 한다
깜부기불 일렁인다, 어둠을 한밑천으로
꺼져가는 제 몸을 마중불로 삼는다
그믐에 불을 당겨서 초승을 일으킨다
-「깜부기불」 전문
깜부기불은 꺼져가는 불이다. 그러나 어둠을 막아내는 기억장치가 내장된 그믐 빛이다. 그믐을 거름으로 태어난 생명은 어둠에 익숙하다. 얼비치는 바깥 풍경과 감추어진 한쪽 풍경이 으늑하게 공존하는 어머니 치마 속 같은 세상. 서로 닿아 있던 빛과 어둠을 우리는 기억한다. 햇살의 꽁무 니와 그늘의 정수리는 서로의 이마를 부비면서 반은 물들 고반은 바랜다.
거북이 등짝만큼 실하게 묵은 밤은 실뱀의 눈빛 같은 불씨들을 쟁이고 돋우는 시간으론 그만이다. 불의 씨앗들이 푸른 눈을 뜨고 안간힘을 쓰는 천길 아궁이의 시간. 자궁처럼 깊어지지 않으면 밑불의 움을 틔울 수도 지킬 수도 없으므로, 아직은 어둠을 더 벌고 일구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깜부기불은 꺼져가는 제 몸을 마중불 삼아 세상에 첫불을 일으킨다. 그믐 없이 초승이 올 리 없듯, 밑불 한 잎도 그렇게 태어나는 것, 오래오래 다독인 밤이 새벽의 숨과 맥과 피에 뜨거운 부싯돌을 그을 수 있으리라.
모든 그을음과 어둠에 밑불을 붙이고 기꺼이 사위는 깜 부기불 같은 시, 그런 시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도랑치마 걷어 올리고
도랑물 건너가네
마른 땅 끌던 꿈
허리에다 동여매고
물살에 정강이 찧으며
고픈 봄날 건너가네
어머니와 어머니가
나를 끌고 건너가네
뻐꾸기도 울지 않는
징검돌 없는 봄날
도랑물 밀어 올리며
도랑치마로 건너가네
-「어머니와 어머니가」전문
어머니는 젊고 아름다웠다. 다알리아보다 마음이 붉었다. 장독대에서 장독 뚜껑을 열 때마다 흑요석빛 간장에 비치는 잘생긴 구름과 곧장 눈을 맞추곤 하던 초여름의 어머니, 내가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내 시 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이빨이 몽땅 빠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주신 것이니 가져가신 걸까.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누구도 홀로 설 수 없다는 걸 돌아가신 뒤에야 알았다. 평생 보지 않아도 좋으니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계시기만 하면 좋겠다. 두루마기 차림으로 아버지와 나란히 걸어가신 뒤로는 돌아오시지 않는 어머니. 그런데 아직도 내 시를 대신 써주신다. 죽은 당신의 손으로 살아 있는 내 손을 잡고 써주신다.
어머니는 내게 '어머니'를 물려주셨다. 그녀의 생을 생각하면 함부로 누군가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없고, 그녀의 슬픔을 생각하면 '나도 슬프다'라고 감히 말할 수 없다. 모든 곳에 있을 수 없는 신의 역할을 기꺼이 대행한 어머니. 위대한 자는 신이 아니라 신이 따를 수 없는 어머니이다.
지상의 모든 딸은 '어머니'가 되어 징검돌 없는 삶의 물살을 건넌다. 칼등 같은 물살에 정강이 찧으며 마른 봄날을 건너간다. 혼자선 건너지 못할 길을 '자식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예 건너고야 마는 것이다. 도랑치마 걷어 올리고 도랑물 건너간 어머니. 누군가의 딸이었거나 지어미였던 것도 다 잊어버렸으리라. 오직 '어머니'로만 살다 간 그녀. 보이지 않는 그 손을 난 여전히 끊어질 듯 잡고 있다.
마른 땅
깊숙하게
타는 뿔을 들이받는
여름날
수사슴 같은
아침 한때 소나기
마당을 갈아엎을 듯
땡볕이 뛰고 있다
- 「하지」 전문
'여름에 피는 은빛 꽃', '銀竹'을 유쾌하게 때려눕힌 당신의 말이다. 소나기에 대한 은유가 이리도 기막힐 수 있다니, 세상에 시인 아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나기 내리면 병원에 환자가 없어서 기분 좋다는 당신. 느닷없이 떼로 몰려와 창문을 두드리다가 가슴을 타고 내리는 빗물 환자들 앞에서 망연자실할 당신의 여름이 여전히 궁금한데, 그 소나기 가 오늘 이곳에도 내렸다. 목마른 마당 깊숙이 달아오른 은빛 뿔을 들이받는 한 무리 수사슴들 같은 소나기가. 댓살처럼 내리꽂히는 소나기를 맞으며 천지사방으로 뛰어오르는 땡볕의 풍경보다 더 청량한 여름 그림이 있을까. 천둥과 벽력을 넘어온 '찰나의 은빛 꽃들'이 축복과 은총처럼 피어난 하짓날 아침나절에 당신의 안부를 묻는다. 잘 계시는지.
작품들은 갈수록 서로 간의 개성과 경계가 희미하고 밋 밋해진다. 발상도 비유도 표현도 거기서 거기다. 식상하고 진부한 자기 세계와 표현을 복사하고 붙이고 하는 버릇과 한계를 넘지 못하고 풍뎅이 맴돌듯 단조롭거나 부박해지기 만 한다. 어설프게 흉내를 내는 4음보의 가락들이 제대로 숨이 붙기를 바라며, 시가 아무 맛도 나지 않기를 바라며 이제도 쓴다. 맹물 같고 맨밥같이.
(필자의 시선집 「찔레꽃 수제비」의 자전적 시론에서 일부를 옮겨옴.)
약력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맹물 같고 맨밥 같은」 외, 중앙시조대 상외수상.
- 《시조시학》 2024.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