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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시험이란 : 페이라 스모스(명사), 페이라조(동사)이다. 시험에는 3종류가 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는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말씀하나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시험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즉 하나님은 어떤 시험을 하시기도 하시고 어떤 시험은 절대로 하지 않으시는 것을 우린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⓵유혹하다(tempt) : 유혹을 함으로 시험하는 것. “하나님은 시험하시지 않는다” 고 할 때의 시험이 바로 이 시험을 말함이다. 즉 하나님은 누구도 유혹하지 않으시고 유혹을 받지도 않으신다. 오직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여 시험하는 것이다.
⓶시험(test)이다 : 학교에서 시험을 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단계를 유월하여 넘어지지 않게 하시려고 시험을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기도원 가서나 말씀을 배우러가서 은혜를 받고 오면 꼭 시험이 온다고 하는 것이 이 시험인 것이다.
조그만 그릇의 율법에서 큰 그릇의 복음으로 넘어갔는지를 알아야 큰 은혜를 주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험인 것이다. 즉 그런 시험을 치루고 이겨야 내야만이 그 은혜와 말씀을 계속 붙들 수 있기 때문이다.
⓷시련(단련, trial)과 고난을 주시는 것도 시험이다. 그것은 우리를 강건하고 단단해지게 하기 위한 시험이다.
예수께서 시험받기 위하여 성령에 이끌리어(시험받기 위한 일) 산으로 가셨다고 하셨다. 이에서 성령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이고 그의 시험은 진리와 지식을 성령의 시험으로 가르는 시험인 것이다. 즉 예수께서 복음을 갖고 오셨기에 그 복음을 전의 것인 돌과(율법)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하여 율법의 떡덩이를 갖고 그 돌을 떡이 되게(먹는 것), 발에 돌이 부딪치지 않게 하는가의 시험인 것이다.
즉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그 시험이 없기에 우리는 진리에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에 이끌리다 : 시험은 자기 욕심 때문에 받는 것이다. 즉 말씀을 받을 때 우리가 진리로 받는지 육신의 욕심에 의하여 지식으로 받는지를 구분하여 심판(육을 죽여주시는 것)을 하기 위함이다. 이것도 모든 의를 이루는 것 중에 하나인데 성령이 시험을 통해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기 위하여 시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4:1에서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 받는 시험은 유혹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테스트를 위한 시험인 것이다. 실지로 감히 누가 하나님을 유혹해 떨어트릴 수 있다는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은 시험이 왔을 때 어떻게 이기는가를 보시려는 즉 그 아들의 삶이 하나님을 기뻐하시는(죽을 것이 죽고 살 것이 사는, 뜻을 이루는) 일을 감당하는 지를 보시려 함인 것이다.
눅4장에서,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을 입어 광야에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고 하셨다. 이는 원어 번역을 거꾸로 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면서 성령에게 이끌리다!“ 라고 해야 한다. 즉 우리가 성령에(말씀을 받으면) 이끌리면 마귀의 시험을 받게 된다. 즉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시키는 영광의 모습을 성령을 통하여 우리 삶에서 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이 없으면 진리와 비진리가 구분이 안 되어 그게 그거기에 영광을 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삶속에서 들어나야 되기에 그게 시험으로 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시험은 마태와 누가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런 시험을 당하셨기에 주옥같은 복음서의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즉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첫째 시험은 먹는 것이다. 즉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 그러나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핵심은 우리의 먹거리가 무엇이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 내게 절하라” 고 하는 것은, “나라에 임하옵시며!” 이다. 즉 산에 올라가는 것은 이 세상 나라를(겉 사람) 올라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속사람)로 올라가야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리다” 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시험하면, 마귀가 나를 시험하는 것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는 것도 있을뿐더러 더 큰 시험이 있으니 내가 아버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즉 마귀가(우리 육체인 겉 사람, 지식) 성산에서 뛰어 내리라 하니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고 하셨다.
즉 우린 지금 마귀가 와서 내게 시험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 내 스스로가 아버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할 때의 시험이 바로 마귀가 나를 시험하는 것이다.
즉 마귀의 시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처럼 된 것처럼 느껴지니깐, 내가 내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자리에 올라가겠다고, 할 때 그 보좌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시험인 것이다. 그러므로
먹거리의 시험은, 마귀가 하는 우리 육신을(욕심) 이용하여 떨어트리려는 시험인 것이다. 즉 말씀을 받을 때(성령시험이니) 겉사람을 내려놀은 사람은 진리로 온전히 받을 것이고 아직 못 내려놓은 사람은 자기 갖은 육만큼 말씀을 비 진리로 받게 된다는 것. 즉 육신의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니깐 우리가 육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구해야 하는 것이다 고 하는 것.
성전에서 떨어지라는 시험은, 예수 안에서도 아버지를 시험하라는 것. 종교인들은 전부 여기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큰 교회, 많은 헌금, 봉사 등이 하나님의 섬김으로 안다. 그게 전부 시험꺼리가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시험을 볼 때,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신 이유가 뭘까?
진리 안에서 진리와 비 진리를 들어내기 위하여 시험하는 것이고 그러나 예수께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이를 통하여 징조를 보여 주시는 것이다. 즉 너희도 예수를 따르면서 이런 징조를 보고 너희 앞길을 가라는 것.
눅4:3. “마귀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은 예수께 ‘너는 내 사랑하는 바로 그 아들이요. 내가 네 안에서 기뻐하노라’ 했는데 여기선 너는 하나의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가 하나님의 그 아들이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는 그런 시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 했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일 때 사람은 안드로포스가 아니라 호(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 우는 그 사람) 안드로 포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랑한다면 바로 자랑하는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 너는 사람은 떡으로만(생존, 육) 살 것이 아니다.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고 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깐 높은 산에 올라가 천하만국을 보이면서 마귀가 넌, 하나님의 아들이니깐 소리도 없이 이 모든 권세 영광을 주리라고 한다.
*이것은 네게 넘겨준 것이므로 : 이것은 원어 적으로 본뜻이 아니다. 본래는, 내게 준 것이 아니라 넘겨진 것이라는 것. 언제 넘겨졌냐? 우리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에 자랑으로 사는 순간에 넘겨져 있는 것이다.
어떤 단체에서는 창세에 아담이 흙(육체)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아담이 범죄 함으로 그 흙(육체)은 이미 뱀에게 먹으라고 했기에 그 때 우리의 육체가 뱀에게 넘어갔다고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도 죄인이 되었다는 원죄 론을 주장하는 곳도 있는데 그건 그 흙에 대하여 잘못 해석을 하여 막연히 뱀과 육체의 법을 혼동 했던 것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과거의 에덴동산에서의 원죄론 자인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은 나요, 에덴동산은 복음말씀으로 돌아온 내 심령을 말함이니 지금 내 안에서의 욕심과 탐심 때문으로 그런 행위를 했을 때의 죄를 마귀에게 넘겨졌다고 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적인 욕심에 거할 때 이미 마귀가 원하는 자가 된 것이고 그런 세상을 소유할 수 있는 권세를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탐심과 욕심으로 세상 것을 취하고 다 갖어 성공했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자는 바로 그게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에게 올려지는 영광인줄 알아야 한다. 즉 마귀의 종인 죄의 종이 되어 지는 것이다. 그런 마귀의 시험을 예수께서는 떨어지실 리가 없는 것. 그 답이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시는 것인데,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것이다. 그 마귀는 바로 우리 안에 죄(탐심)이기에 그를 섬기지 말고 오직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을 섬기라시는 말이다.
즉 예수에 대한 세 가지 시험은,
1)떡에 대한 시험은,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받으시옵고를 시험하시는 것으로, 그 시험에 대한 답은 “우리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것이니라 라는 것”이고
2)네가 나에게 절하면 천한만국을 주리라는 시험은, 나라에 임하시옵시고의 말씀을 시험하는 것이며, 그의 답은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것”이고
3)성전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를 시험하는 것이며 그 시험에서의 우리가 우리의 죄에게 해줄 답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셋의 핵심적인 시험은 앞으로 나오는 4복음말씀의 맥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돌로 떡 되게 하는 시험과, 돌이 발에 부딪치게 하지 않게 한다는 것의 시험은 그 돌은 모세가 받았던 돌비의(심비는 예수 그리스도로 받는 것) 말씀을 말하는 것으로 복음으로 오신 예수를 향해 그 율법을 온전케 하려 오신 예수께 이전의 율법을 갖고 그 율법을 그대로(문자, 육의 법) 행하라고 시험인 것이다.
돌은 진리인 우리 안에서는 살아 움직이지 않고 돌에 새겨진 그대로(문자) 돌아가라는 것. 즉 성경말씀은 보이는 문자 그대로 읽으면 우리에게 시험꺼리이다. 그 육으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문자로 기록하여(그림자로) 그 안에서 영적인 진리의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한 은혜인데 그것을 보이는 글자대로 사람들은 해석하고 그대로 행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게 바로 죄이고 이제 복음이 왔으니 신포주가 된 율법인 것이다.
즉 마귀의 예수에 대한 시험은, 돌과(마귀는 돌비로 살라는 것이고) 심비(예수는 심비에 새겨진대 살겠다는 것이고) 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문자적인 성경은 우리의 심비에(복음으로) 새겨지게 하지 않으면 항상 시험꺼리가 되기에 하루 빨리 심비에 새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거꾸로 성령을 통하여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야 만이 내 안에 심비에 새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이란 세상 시험처럼 내가 다음 단계로 유월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기에 하나님은 역시 당신의 피조물인 마귀도 사역자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라는 말씀도 내거 기분 좋고 은혜 받을 때만 하라는 거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져 가는 모든 섭리는 다 시험으로 인한 다음 단계로의 유월을 위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기에 비록 고난이 동반된 시험이 올망정 항상 감사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또 그것이 히브리서에서(10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위한 징계요 채찍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종교, 교리) 모세(율법)를 따라 홍해(죄악의 바다를 건너서, 율법의 물세례)를 건너서 광야로 넘어간다. 광야로 나왔으나 그러나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하고(율법이니깐 복음의 세계로 못 넘어감) 오직 여호수아(원어 번역은 초림예수의 뜻)를 통하여 모세의 지팡이(율법) 대신 법계를(문자가 아니라 복음의 심비로 새겨서) 앞세워 요단강을 건넌다. 그러나 여호수아인 그도 온전한 가나안을 이루지 못하고 날마다 전쟁을 하는 것이다.
즉 초림 예수는 십자가에 죽어야 하기에 우리가 복음 안에 들어왔지만 우리 안에는 여리고 성(율법, 육체)과 온갖 비 진리, 문자로 육으로 보는 교리들이 가나 안으로온 나의 진리의 심령과 싸우는(바리새인과 예수) 것이다. 서로 이기려고 말이다. 그러나 그 후에 예수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스도가 오셔 그 모든 비 진리를 물리치심으로 온전한 천국인 가나안(내 심령의 천국)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이는(출애굽부터 가나안) 또한 선지자 요한을 통하여 외치고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저 가는 길을 표현하여 놓은 말씀인데 요한은, 홍해를 물로 세례를 줌으로 건너게 하고 예수는 성령과 물을 통하여 요단강(세례)을 건너게 하였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여리고 성을 비롯하여 무수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니 유대인 바리새인, 제사장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예수께서는 그들과 전쟁(불)을 하셨던 것인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처음에 예수와 함께 십자가로(불세례) 나의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죽였었는데(가나안 도착) 다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그 때부터는 내가 스스로 법계를 심비에(그리스도를) 새겨 그 분과함께 가나안을 온전히 이루어 가야 하는데 그만 내가 그 불을 영원히 태워가야 했는데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그 불을 태우지 못한 것이다. 즉 우리의 정과 욕심은 한번 태우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태워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교만하여(초림예수만 믿음) 그리스도(십자가 불)로 태우지 못하니 다시 정과 욕심이 살아나는 것이다.
요한이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 모두를 예수에게로 인도했었다. 그러면 예수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갔으면 끝이겠나. 가나안 땅은 천국으로 그리스도가 인도하시는 땅인데 즉 그리스도가 내 안에 심비로 새겨져 나를 이끌어 가는 곳인데 우리는 그 부활의 성령인 그리스도를 모르고 예수만 믿으니(자기 복을 위해 성경을 문자대로 푸는 것, 기복예수) 우리가 변화가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와 함께(기적 이적의 육으로 보이는 우상인 예수) 나의 우상(기복의 예수)을 십자가에 함께 매달려 죽여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셔(비진리가 떠나고 진리만 남는 것) 나를 온전한 그의 나라인 성전으로 완성하여 가는 것이다. 그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께서 먼저 요한에게 할례를 받으시고 물에서(음부, 요단강 물) 올라오셔 사람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십자가로 죽으심으로 요단강을 건넘) 주시고(가나안 땅에 들어가셔서) 다시 그리스도로 오셔 가나안을 온전히 통과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징조로 보여 주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