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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12장은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입니다.1)
마태복음 11장은 ‘불신앙과 신앙’에 관한 내용입니다.2)
‘메시아에 대한 다양한 반응’입니다.3)
2~19절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정체성’에 관한 내용입니다.4)
1.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하여 보내어 질문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에 “요한이 감옥 안에 그 크리스트의 일을 들은 때, 그가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보낸지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헤롯 왕의 모든 악을 책망한 까닭에 감옥 안에 갇힌 것입니다.5) 헤롯 왕이 그 동생의 아내를 취한 일로 요한이 감옥 안에 갇힌 것입니다. 요한이 바른말을 한 결과 헤롯 왕이 그를 감옥 안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감옥 안에 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 있잖습니까 그가 이런저런 일을 합니다’라고 보고하니까 요한이 감옥 안에 있으면서 생각합니다.
‘그를 메시아로 알았는데 그의 일은 메시아답지 않아’라고 생각되었고 그는 감옥 안에서 메시아의 일을 듣고서 제자들을 통하여 보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구원해 줄 것을 약속하셨고,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였는데 그 일은 자기 생각과 달랐거든요!
그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점은 구약시대의 왕처럼 정치적 메시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셔서 구원하실 것으로 예언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생각하였기를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 왕이 이 세상에 와서 메시아가 그들을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에게서 구원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런 메시아 관점을 유대인들이 다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에 약속하신 메시아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종으로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예언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위반에서 찌름을 받고 우리의 죄악들에서 부숨을 받으며, 우리 평화의 징계가 그 위에 있고, 그 상처에 고침을 받습니다(사 53:5).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을 텐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메시아가 온다면 그들을 정치적으로 구원해 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뛰어났으나 이 점에 다른 유대인들처럼 착각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로마와 전쟁해서 유대 민족을 해방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감옥에서 들으니 예수님이 그런 일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가 그에 말하기를, “오시는 자가 당신이신지 혹은 우리가 다른 자를 기다려야만(look for) 하는 것인지.”라고 하였습니다(마 11:3).
“오시는 자”라는 요한의 표현 속에 메시아의 함축이 들어 있습니다.6)
예수님의 사역의 제한된 외적 결과가 그에게 질문하게 하였습니다.7) 예수님의 사역이 요한의 생각이나 기대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 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십니다(마 11:4~6).
마태복음 11장 5절에 “눈먼 자들이 쳐다보고 절름거리는 자들이 걷고 나병에 걸린 자들이 깨끗하게 함을 받고, 청각장애인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자들이 좋은 소식을 전도함을 받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4~6은 ‘요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입니다.8)
예수님의 대답은 구원의 약속들이 성취된 것을 상기시킨 것입니다.9)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런 묘사는 주로 이사야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러한 내용이 전체적 의미로 암시된 것만 인용됩니다.10)
이사야 29장 18절에 “그날 안에 그 청각장애인들이 책의 말들을 듣고, 눈먼 자들(blind)의 눈이 볼 것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사 29:18).
이사야 35장 5~6절에 “눈먼 자들의 눈과 귀먹은 자들의 귀가 열리고. 그때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껑충 뛰고 언어장애인의 혀는 외치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 42장 7절에 “눈먼 사람들의 눈을 열기에(To open), 죄수를 감옥에서 암흑의 거주자들을 감금의 집에서 나오게 하기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2장 18절에 “청각장애인은 듣고 눈먼 자들은 바라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 61장 1절에 “야훼의 영(Spirit)이 나의 위에 있으니, 왜냐하면 야훼께서 나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음이니 겸손한 자들에게 소식을 가져오기 위해서라(to bring), 그가 나를 보내셨으니 마음의 깨뜨림을 받은 자들에 묶기 위해 포로로 잡힌 자들에 자유와 감금된 자들에 엶을 선언하기 위해서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난주에 살펴본 이사야 42장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종 메시아가 이러한 일을 할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기록된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적 메시아만 원했기에 예수님을 오시는 자로 이사야에 약속된 메시아로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42장에 예언된 것대로 이런 일을 행하심에 의해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셨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눈먼 자들을 쳐다보게 하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눈먼 자들이 쳐다보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어장애인과 청각장애인과 눈먼 자를 놓으셨고(출 4:11), 눈먼 자의 앞에 장애물을 주는 자가 절대 되지 않아야 합니다(레 19:14). 하나님께서는 눈먼 사람들의 눈을 여시는 분이십니다(시 146:8).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눈머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신 28:28). 눈먼 자가 흑암에 만지는 것처럼 정오에 만지는 자가 됩니다(신 28:29). 눈먼 자와 절름거리는 자는 장애인입니다(삼하 5:6~8).
그날에는 어두움으로부터 눈먼 사람들의 눈이 볼 것입니다(사 29:18). 그때 눈먼 자들의 눈이 열리고 청각장애인들의 귀가 열립니다(사 35:5).
하나님의 종 메시아께서는 눈먼 자들의 눈을 여실 것입니다(사 42:7). 그 암흑 안에 걷는(who walk) 그 백성이 큰 빛을 보았으며 죽음의 그늘의 땅 안에 거주하는 자들 위에 빛이 비치었습니다(사 9:2).
하나님께서 소경들을 그들이 모르는 길에 가게 만드십니다(사 42:16). 하나님께서는 눈먼 자들을 그들이 알지 못한 길 안에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먼 자들에게 보기에 바라보라고 하십니다(사 42:18). 눈먼 자는 하나님의 종이고 그 메신저인 이스라엘이었습니다(사 42:19). 그들은 눈멀고 눈이 존재하고 귀먹고 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사 43:8).
눈먼 자들의 눈이 본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사 29:18). 눈먼 자들이 쳐다보는 것은 예언된 때가 도달했다는 것입니다(사 35:5). 그는 눈먼 자들이 쳐다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종 메시아십니다(사 42:7). 눈먼 자들을 쳐다보게 하신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아로 오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절름거리는 자들을 걷게 하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절름거리는 자들이 걷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눈먼 것과 절름거리는 것은 쌍으로 나옵니다(레 21:18). 눈먼 자와 절름거리는 자를 함께 언급하신 것은 구약성경과 관련됩니다. 이사야는 그때 눈먼 자들의 눈이 열릴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사 35:5), 절름발이가 그 사슴과 같이 껑충 뛸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사 35:6).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태는 지금까지 절름발이들을 치료하신 것을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나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절름발이들을 치료하십니다(마 15:30~31, 21:14). 그의 치료 행위는 그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시다는 증거가 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걸린 자들을 깨끗이 하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나병에 걸린 자들이 깨끗하게 함을 받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병(癩病)에 걸린”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레프로스”인데, 영어로도 “leprous”는 “나병에 걸린”을 의미합니다. “나병”(leprosy)은 나균(癩菌)에 의해 감염되는 전염병으로 한자어로 “나병(癩病)”이고 우리말로는 “문둥병”이라고도 합니다. “나병”의 원인인 나균은 한센(Hansen)에 의해 발견됩니다. 나균(癩菌)은 나병(癩病)을 일으키는 세균(細菌)입니다.
세균(bacteria, 박테리아)은 생물체 가운데 가장 하등에 속하는 단세포(單細胞) 생물인데 발효나 부패 작용을 하여 생태계의 물질 순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다른 생물에 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중 나균은 나병을 일으킵니다.
나병에 걸리게 되면 피부가 부풀어 오르거나 딱지나 반점이 생깁니다. 나균에 감염(infection)되는 것은 감염된 사람에게 재앙입니다. 나병은 전염되니 이런 증세가 생기면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 제사장은 보고 그것이 나병으로 판단될 때 그를 ‘더럽다’라고 합니다. 나병은 더러운 병이니 제사장은 그를 ‘더럽다’라고 선언합니다(레 13:3).
더러운 나병은 ‘고치다’라는 말보다 “깨끗하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레위기 14장에는 나병 환자의 정화 날에 대하여 율법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癩病)에 걸린 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마 8:2~3).
그런데 성경에 나병으로 번역된 것은 오늘날의 나병과는 다른 것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악성 피부병인데 “나병”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자들을 듣게 하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귀먹은 자들이 듣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의 날 안에 그 귀먹은 자들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고(사 29:18), 그때 귀먹은 자들의 귀가 열릴 것입니다(사 35:5).
사람들이 예수님께 귀신들린 언어장애인 된 자를 데려왔고(마 9:32), 그 귀신이 쫓아냄을 받고 그 언어장애인이 말하게 되었습니다(마 9:33). 예수님께서는 언어장애인도 말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막 7:37, 9:25).
5)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을 일어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고 하는 도시로 제자들과 가셨습니다(룩 7:11).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왔는데 그는 독자고 과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녀를 보신 예수님께서 그녀에 대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룩 7:13).
그리고 접근하신 그가 관을 만지셨으나 그것을 운반하는 자들이 섰고, 그가 “청년아 내가 말하니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룩 7:14).
그 죽은 자가 일어나 앉았고 그가 말하기에 시작하였습니다(룩 7:15). 이 사건 이후에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하였습니다. “오시는 자가 당신이신지 다른 자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셨기를, “눈먼 자가 보며 절름발이가 걷고 나환자가 깨끗하고 청각장애인이 듣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룩 7:22).
6)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복음을 듣게 하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전도함을 받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오셔서 통치하시는 것과 관련되며(사 40:9~10), 하나님께서 왕으로 지배하시는 “좋은 소식”이 곧 “복음”입니다(사 52:7).
겸손한 자들에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를 기름 부으셨고(사 61:1), 기름 부음과 성령 충만으로 왕권과 왕국이 확립되었습니다(삼상 16:13).
따라서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왕국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듯이 메시아께서는 왕이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는 것은 이사야 61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마태복음 4장 14~17절, 23절 5장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겸손한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로 바꾸어 말씀하셨는데, “겸손한”이란 말이 그리스어로는 “가난한”이란 말로 번역된 까닭입니다.
돈이 없어 가난한 자든지 그 영(spirit)에 가난한 자든지 간에(마 5:3),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겸손하게 받는 것입니다(마 11:5).
그 영(spirit)에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받아들이니 복됩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가난하여도 그 영(spirit)에 교만하다면 예외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서 살아가는 자들은 교만한 자들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야 하고 살아가는 자들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잠언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만인데,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순종의 삶을 사는 믿음의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영(spirit)에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받아들이니 복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런 자들에게 복음이 좋은 소식이 전파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그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안심하였을 것입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려고 온 사람인데 지금 감옥에 갇혀 있었고 “오시는 자”가 예수님이 아니면 그는 다른 자의 길을 준비하여야 하는데 감옥에 갇혀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예수님이 바로 “오시는 자”라고 확신하고, 자신이 예수님의 길을 충분히 준비했다고 마음에 평화를 가졌을 것이고, 그는 이런 평안한 마음 가운데서 이후 칼에 그 목이 잘려서 죽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는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고 정의를 선포하다가 죽는 순교자가 됩니다.
7) 예수님 안에 실족하게 되지 아니하였다면 그는 복됩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에 “그리고 그는 복이 있으니(blessed), 내 안에 실족하게 함을 받지 아니한 자는 그러한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실족하게 하다”(offend)라고 번역된 단어(스칸달리조)는 발을 헛디뎌 넘어지게 된다(cause to stumble, make stumble)는 뜻입니다.
요한이 자기의 정치적 메시아 관점만 가지고 있으면 실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이 이러한 메시아 관점 때문에 실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게 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그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지닌 사람이면 그들을 충분히 로마 압제에서 건질 것이고 1등 민족으로 만들어서 잘 먹고 잘살게 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평생 굶어 죽지 않고 잘 먹고 잘살게 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정치적 메시아가 되기 위해 오지 않으셨고, 결국에는 그들 중에 많은 자가 실망하고 예수님을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예수님에,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그의 이유로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으며,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요한은 실족하지 않고 생애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였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질병들이 없으며 죽음이 없으며 가난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병들을 치료하시고 죽은 사람들을 되살리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이미 시작된 사실을 세례 요한에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7~10절에 “누구를 바라보기에 황야 안으로 나갔느냐,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것들 안에 입은 사람이냐? 너희가 예언자를 보았기에 나갔느냐, 예언자의 더욱 훌륭한 자라. ‘나의 심부름꾼을 파견하니 너의 길을 채비할 자라’고 기록된 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15절은 요한의 시대적인 중요성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11) 우리가 여기서 듣고 있는 것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12) 예수님께서는 요한에 대하여 질문하시고 답변하십니다.13)
요한은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갈대가 아닌 것을 뜻합니다(마 11:7).14) 요한의 메시지는 비타협적이며 대중 인기에 영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헤롯의 감옥에 갇혔는데 타협을 모르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15)
요한은 왕궁에 있는 부드러운 옷들을 입은 자가 아닙니다(마 11:8).16) 세례 요한은 그런 사람이 아니고 황야에서 고생한 사람이었습니다.17) 당시의 동전에는 갈대를 들고 있는 헤롯이 새겨져 있습니다.18)
그는 예언자가 아니라, 예언자보다 더욱더 훌륭한 자입니다(마 11:9). 요한은 그의 길을 준비하는 자였다는 점에서 예언자보다 더 훌륭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메시아의 길을 채비한 자며(마 11:10),19) 이것은 말라기 3장 1절의 성취입니다.
말라기 3장 1절에 “자 나의 메신저가 나의 앞에 길을 돌리고(prepare) 너희가 찾는 주가 그 궁전에 들어오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예언하신 것이 지금 성취된 것입니다.20) 요한은 메시아의 앞에 길을 준비한 것입니다.
요한을 시대의 전환점에 있는 매우 중요한 인물로 이렇게 나타낸 것은 동시에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확인하는 더욱 확실한 증거입니다.21)
하나님께서 그의 메신저를 보내시는 것은 출 23:20의 인용입니다.22)
마태복음 11장 11~15절에 “내가 말하니, 여자들의 출생한 자들 안에 세례를 베푸는 자 요한의 더 큰 자가 일으킴을 받지 아니하였으나 그 하늘의 그 왕국 안에 더 작은 자가 그보다 더 큰지라. 그렇지만 그 세례를 베푸는 자 요한의 그 날들에서부터 현재까지, 그 하늘의 그 왕국은 침입함을 받고 침입자는 손에 넣으니(lay hold of). 이는 모든 그 예언자들과 그 율법이 요한까지 예언하였음이고. 만일 너희가 받았기에 바란다면 그가 곧 오려고 하는 엘리야라. 귀를 가지는 자는 들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장 11~15절은 요한의 독특한 역할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23)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으킴을 받지 아니하였습니다(마 11:11). 여자의 출생한 자들 안에 세례를 베푸는 자 요한이 가장 큰 자인 것이나, 그 하늘의 그 왕국 안에 더 작은 자가 그보다 더 큽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앞에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자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메시아의 바로 앞에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먼 미래를 예언한 예언자들보다 더욱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눈으로 메시아를 직접 보았기에 예언자들보다 큰 사람입니다.
요한은 예전 질서의 절정이었습니다.24) 그러므로 요한은 구약시대의 그 어떤 예언자들보다 더 큰 자였습니다.
구약의 경륜이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서 종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25)
이것은 개인들 사이에서 대조가 아닌 시대들 사이에서 대조입니다.26)
그 세례를 베푸는 자 요한은 구약시대의 그 누구보다 더 큰 자였으나, 신약의 사람들에 비할 때 그 계시의 접촉에 있어 가장 작은 자입니다.27)
요한은 예전 시대에 속한 자며, 새로운 시대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28)
예전 질서에 속하는 사람들에서 요한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29) 그러나 그 하늘의 왕국 안에서 더 작은 자가 요한보다 더 큽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큽니다. 요한은 구약시대의 절정을 이룬 자나 그는 신약시대의 인물은 아닙니다. 요한은 구약시대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모든 성도는 요한보다 큰 특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믿었지만 우리는 오신 메시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우리가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세례를 베푸는 자 요한의 날들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왕국은 침입함을 받고 침입하는 자가 손에 넣습니다(마 11:12).
“침입하다”(비아조)는 “폭력”(violence)(비아)에서 나왔고, 영어로 “폭력을 경험하다(suffer)”, “힘이 있게 전진하다”로 번역됩니다. 이 용어는 긍정적인 진술로도 해석되고, 부정적인 진술로도 해석됩니다.
11장 12절은 침입당하는 천국이라는 부정적인 진술일 수 있습니다.30) 이렇게 수동태로 보면, “폭력을 경험하다”(suffer violence)를 뜻합니다.
반면 수동태로 번역하지 않고 “침입하다”로 번역한 해석도 있습니다. 이런 해석일 때, “힘이 있게 전진하다”(forcefully advance)를 뜻합니다.
이 동사(비아조)는 “뻗는다”라는 히브리어 동사(파라츠)를 번역하며 아브라함이 동서남북에 뻗을 것이라는 약속에 쓰인 말입니다(창 28:14). 마치 아브라함이 동서남북에 뻗듯 천국이 사방에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같은 동사가 “늘다”, “증가하다”라는 말(increase)로 번역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뻗어 나가는 것이며 또 늘어나며 증가하는 것입니다. 깨뜨리고 밖으로 나오는 폭발력으로 사람들이 죽기도 합니다(삼하 6:8). 천국은 이렇게 파열하는 폭탄처럼 힘이 있게 밖으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동태로 보고 천국이 침입받는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천국이 악의 세력들에 의해 박해와 반대라는 현실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입함을 받고 침입하는 자가 손에 넣습니다(하르파조).
천국이 이미 임했으나 아직 악의 세력들에게 침입을 당하고 있습니다. 만일 천국이 이미 임했으면 이제 박해와 폭력이 없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천국이 임했음에도 천국이 여전히 침입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왕국 때문에 감옥에 갇혀 곧 죽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게 되실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은 여전히 침입을 당하고 침입하는 자들이 손에 넣습니다. 천국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생깁니다.
모든 그 예언자들과 그 율법이 요한까지 예언하였음입니다(마 11:13).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구약성경의 예언적인 성격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구약성경은 예수님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입니다.
“예언자와 율법이 요한까지 예언하였다”라는 것을 율법이 폐해졌다고 잘못 이해하고도 바르게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는데(마 11:13), 율법이 폐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예언 성취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까지 예언의 시대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취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마 5:17). 율법이 성취된 까닭에 폐지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폐지하지 아니하다”와 “성취하다”라는 말은 양립합니다.
그들이 받기에 바랄 때, 그가 곧 오려고 하는 엘리야입니다(마 11:14). 이것은 말라기 4장 5~6절에서 예언되었습니다.
1) Donald A. Hagner, 『마태복음 1-13』, WBC 성경주석 33상, 채천석 옮김 (서울: 솔로몬, 1999), 507.
2) David L. Turner, 『BECNT 마태복음』, BECNT 성경주석, 배용덕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379.
3) R. T. France, 『NICNT 마태복음』, NICNT 성경주석, 권대영·황의무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9), 506.
4) Turner, 『BECNT 마태복음』, 382.
5) 박윤선, 『공관복음』, 성경주석 (서울: 영음사, 2012), 278.
6) France, 『NICNT 마태복음』, 512.
7) Turner, 『BECNT 마태복음』, 385.
8) Turner, 『BECNT 마태복음』, 385.
9) Turner, 『BECNT 마태복음』, 384.
10) Turner, 『BECNT 마태복음』, 385.
11) Turner, 『BECNT 마태복음』, 382.
12) Hagner, 『마태복음 1-13』, WBC 성경주석, 513.
13) Hagner, 『마태복음 1-13』, WBC 성경주석, 516.
14) Turner, 『BECNT 마태복음』, 387.
15) France, 『NICNT 마태복음』, 516.
16) Turner, 『BECNT 마태복음』, 387.
17) 박윤선, 『공관복음』, 281.
18) Hagner, 『마태복음 1-13』, WBC 성경주석, 517.
19) Turner, 『BECNT 마태복음』, 388.
20) France, 『NICNT 마태복음』, 517.
21) Hagner, 『마태복음 1-13』, WBC 성경주석, 518.
22) Craig L. Blomberg, 『마태·마가복음』,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 김용재·우성훈 옮김 (서울: CLC, 2010), 136.
23) Turner, 『BECNT 마태복음』, 388.
24) Hagner, 『마태복음 1-13』, WBC 성경주석, 518.
25) Matthew Henry, 『마태복음』, 매튜헨리주석전집 16권, 원광연 옮김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6), 401.
26) Hagner, 『마태복음 1-13』, WBC 성경주석, 518.
27) 박윤선, 『공관복음』, 282.
28) France, 『NICNT 마태복음』, 518.
29) Hagner, 『마태복음 1-13』, WBC 성경주석, 518.
30) Turner, 『BECNT 마태복음』,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