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나무화장세계해
나무화장세계해南無華藏世界海에서 ‘나무’는 무슨 뜻일까요? 귀의한다는 말로 믿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즉 나무화장세계해는 화장세계해에 귀의한다는 말로 뒤에 계속 이어지는 현재설법노사나現在說法盧舍那 석가모니제여래釋迦牟尼諸如來 과거현재미래세過去現在未來世 시방일체제대성十方一切諸大聖까지 전체문장을 다 받아 그 모두에 귀의한다고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화장세계해에 계신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인 삼신불三身佛과 과거, 현재, 미래세에 걸친 많은 부처님과 시방 일체의 많은 대성大聖들 즉, 대 아라한, 큰 성자들을 모두 포함한 모든 거룩한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부처님과 함께 대성들, 즉 아라한이 화장세계에 상주하는데 그럼 ‘화장세계’가 무엇이겠습니까? 화장세계는 ‘연화장 세계’를 줄인 말로, 부처님 계신 땅, 정토세계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연화, 큰 연꽃으로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그 연꽃 속에는 없는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장藏’자는 ‘감출 장’ 자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장’ 자도 같은 글자로 우리가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불국토를 의미합니다.
연화장 세계의 전개
우리 중생들은 늘 연화장 세계를 꿈꾸고 있으나 이 사바세계가 곧 연화장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청정법계淸淨法界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님 아닌 것이 없으니 나 자신이 연화장 세계이고, 내 가정도 연화장 세계요, 내 이웃도 또한 연화장 세계입니다. 내가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온 천지가 다 연화장 세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연화장 세계가 끝도 없이 넓게 펼쳐져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다[海]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무궁무진하게 끝없이 펼쳐져 있는 연화장 세계이기에 ‘화장세계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연화장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지겠습니까?
첫째, 화장세계는 마음 열림의 공간이므로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둘째, 대승보살이 거듭거듭 쌓아온 실천의 결실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본래 연화장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연화장 세계, 정토의 한가운데 살고 있는데 우리 스스로 마음의 열림이 없고 대승보살의 실천행이 없어서 연화장 세계를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연화장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塵塵刹刹法王身 진진찰찰법왕신
온 세상이 부처님 몸 아님이 없네.
진진찰찰은 낱낱, 모든 존재, 티끌 하나하나, 끝도 없이 많은 존재,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 수많은 존재가 모두 법왕신입니다. 법왕은 부처님, 법왕신은 부처님의 몸을 말합니다. 그러니 진진찰찰법왕신이란 중생계의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밖의 모든 존재가 다 법왕의 존재, 진리의 분신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연화장 세계이며 모든 것이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 하니 이 얼마나 멋있고 희망적인 말입니까?
當體節全是 당체절전시
눈앞에 있는 것을 여의고 별도로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연화장 세계라고 하는 부처님 세계는 현장에 있고, 부처님의 분신인 내가 있는 우리 가정도 연화장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연화장 세계가 우리 가정, 내 몸, 내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신라시대 일연 스님이 몽골에게 침략 당한 후 민족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신화, 전설, 민담 등의 설화를 불교적 시각에서 엮어 놓은 책입니다. 그 중 네 번째 책인 <의해義解>에 있는 ‘사복불언蛇福不言’은 연화장 세계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신라 땅 만선북리萬善北里라는 곳에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사는 사복은 태어나 한동안 말을 못하고, 일어나지 못해 땅을 기어 다녀서 사람들이 사동蛇童, 또는 사복蛇福이라 불렀어요. 사동은 뱀처럼 기어 다니는 아이라는 뜻입니다.
사복이 열두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죽자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이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앉고 말문도 터지게 되었습니다. 사복은 그때 고선사高仙寺에 계신 원효 스님을 찾아가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어머니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스님과 제가 옛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으니 함께 장사지내지 않겠습니까?”
원효 스님은 말 못하던 아이가 말을 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 내용이 거창하여 더욱 놀랐습니다.
사복의 이야기를 들은 원효 스님이 사복의 집에 가서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태어나지 마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는 것이 괴롭다.”
원효 스님이 시신 앞에서 하는 법문을 들은 사복이, 과거전생에 고승이었던지, 그 법문을 듣고 말하였습니다.
“아이고 스님, 법문은 간단명료한 것이 좋습니다. ‘나고 죽는 것이 괴롭다.’라고 하면 될 것을 뭘 그리 길게 하십니까?”
이 말에 원효 스님은 “그래, 네 말이 맞다.”하고 사복과 함께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사복이 게송을 지어 말합니다.
“옛날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라나무 사이에서 열반하셨네. 지금 또한 그 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 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하며 띠풀을 한 주먹 거머쥐고 잡아당기니 그 풀뿌리가 빠진 흙 구멍 안에 칠보로 장식된 대단한 궁전이 보이는데 참으로 아름답고도 아름다웠습니다.
삼국유사 원문에는 ‘밝고 맑고 깨끗한 세계’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연화장 세계입니다.
연꽃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연화장 세계가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 세계입니다.
사복이 띠풀 사이로 찬란한 보배구슬로 장식된 으리으리한 궁전을 보고 어머니를 업은 채 그 속으로 들어가니 땅이 저절로 닫혀 버렸습니다. 연화장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지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도리
<화엄경>에서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가장 지고지순한 사상이 있습니다. 바로 사사무애입니다. 존재-존재, 사건-사건, 일-일을 사사事事라 합니다. 무애無碍는 걸림이 없다는 말입니다. 존재와 존재 간에 서로 걸림 없이 받아들이는 것, 존재와 존재끼리 잘 어울리는 것, 그가 내게 들어오고 내가 그에게 들어가는 것이 바로 사사무애입니다. 이러한 사사무애의 도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삼국유사에 실려 전해져 오는 사복불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사복이 어머니를 업고 연화장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났고 달리 해석을 더 해 놓은 곳도 없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사사무애의 도리에 대해 깊이 있게 사색을 해 봐야 합니다.
사복불언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사사무애의 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이 없는 세계, 어른과 아이가 차별 없이 함께 노니는 세계, 사바세계와 정토세계의 차별이 없어진 세계,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는 세계에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봤을 때 연화장 세계는 사사무애의 세계와 잘 어울리는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장애 없고 걸림 없이 잘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우리절(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은 대웅전의 법회와 동시에 연화법당에서는 어린이 법회가, 옥불보전에서는 청소년 법회가 열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어울리는 도량이고, 극락전에는 납골당이 있으니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어울리는 세계요, 모든 불자가 한자리에 참여해 남자와 여자 차별이 없는 세계가 펼쳐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사사무애의 세계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명예가 있든 없든, 남자든 여자든 아무 관계 없이 모든 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이 도량이 바로 연화장 세계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연화장 세계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연꽃을 한 번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자태도 아름답지만 그 성품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서로서로 걸림 없는 아름다움, 어울림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일심이문一心二門
그럼 사사무애의 걸림 없고 아름다운 세계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본래로 펼쳐져 있는 이 연화장 세계를 나의 세계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연화장 세계를 찾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一心二門 일심이문
한 마음에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 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하나입니다. 본래가 하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둘로 나누어져 버린 것입니다. 동대구 요금소를 통과하는 문은 하나인데 그 문을 나가면 서울과 부산으로 나누어집니다. 두 길은 처음에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출발하지만 갈수록 거리가 점점 멀어져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한 사람은 진여문으로 나갔고, 한 사람은 생멸문으로 나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생멸문으로 나간 사람은 고통 속에 허덕이고, 진여문으로 나간 사람은 행복 자체로 살게 됩니다.
진여문이란 말 그대로 참된 문, 진실의 문, 부처님의 문입니다. 이것은 행복의 문을 말합니다. 행복은 곧 밝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생멸문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중생의 문, 번뇌의 문, 불행의 문, 어둠의 문, 고통의 문을 말합니다. 똑같은 마음에서 출발했는데 어느 쪽의 문으로 가느냐에 따라 삶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 참 행복을 얻는 것이지요. 그 참 행복을 위해 생멸의 문에서 되돌아나와 진여문으로 들어가자는 말입니다.
생멸의 문은 중생의 문
생멸의 문은 괴로움의 문입니다. 진여문은 행복의 문입니다. 어느 문으로 통과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열쇠는 자신이 쥐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은 자기가 알아서 챙길 일입니다. 자기 마음을 다른 사람이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진여문으로 갈지, 생멸문으로 갈지에 대한 결정은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생멸문은 중생의 문입니다. 중생의 짓을 많이 하다 보면 생멸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것이 고통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짐승이라는 말은 음운학적으로 중생에서 즘생으로, 다시 짐승이 되는 변천과정을 거칩니다. 짐승이라는 말은 결국 중생에서 온 말입니다. 중생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려면 짐승의 모습을 보면 됩니다. 중생의 모습을 짐승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비근한 예로 우리절(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하늘법당에 큰 토끼 두 마리가 있었는데 두 마리 다 암토끼였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꼬물꼬물 거리는 토끼 새끼를 키우게 해주려고 수토끼 두 마리를 사 와서 넣어주기로 했어요. 그런데 수토끼인 줄 알고 사 온 토끼 중 한 마리가 암놈인 겁니다. 그러니까 원래 있던 암놈 두 마리에, 새로 온 암놈 한 마리까지 합쳐서 암놈은 모두 세 마리가 되고 수놈은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살도록 토끼 집에 넣어주면서 ‘분명히 암놈 중 한 놈은 탈이 나도 나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에 가보니 그 중 한 마리가 영 형편없이 되어 있는 겁니다. 혹시 토끼 껍데기 벗기는 거 보셨습니까? 말 그대로 토끼 껍데기 벗기듯이 목 줄기가 다 물어뜯겨 벗겨져 있었어요. 그래서 격리시키고 토끼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짐승이구나! 참으로 중생이구나!’
사람이라도 함부로 말하고 시기 질투하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멸의 문은 중생의 문으로, 중생이 짐승과 같은 짓을 하면 끊임없이 고통의 문, 고통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여의 문으로의 전환
우리 불자들은 적어도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고통 없이 살 수 있으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귀도 문, 눈도 문, 입도 문인 이 세 개의 생멸문을 늘 조심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결혼하려고 중매로 여자를 만났어요. 여자의 외모가 아주 출중해 마음에 들긴 했는데 몸에서 담배냄새가 나는 겁니다.
“저…, 혹시 담배 피우십니까?”
“아니요. 저는 담배 못 피워요.”
“그래요. 그럼 혹시 술은 마십니까?”
“무슨 말씀을요. 저는 밀밭 근처도 못 갑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 혹시 연애는 해보셨습니까?”
“아, 저는 남자의 ‘남’ 자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물었어요.
“그럼 지금까지 무슨 재미로 살았습니까?”
“이런 거짓말하는 재미로 살았지요.”
꽤 괜찮은 남자였는데 여자가 함부로 말하다 결국은 차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쨌든지 입 조심을 해야 합니다.
言出如箭 언출여전
不可輕發 불가경발
一入人耳 일입인이
有力難拔 유력난발
튀어나온 말은 화살과 같아서
함부로 내뱉지 말지니
사람의 귀에 한 번 들어가면
어떤 힘으로도 빼내기 어렵다.
생멸문에 들지 않고 진여문으로 나아가기 위해 첫째, 항상 말조심해 해야 합니다. 말은 만병의 근원이 될 수 있는데 불자들끼리라도 다른 사람의 신심까지 떨어뜨리는 말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업이 자신에게 국한되면 모르지만 함부로 말해 다른 사람의 신심까지 떨어지게 한 그 업은 어찌 감당하려고 하는지…….
둘째는 눈 조심을 해야 합니다. 봐도 봄 없이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인이 미장원에 가서 긴 머리를 잘라 단발머리를 만들어 왔어요. 그럴때 남편들은 대부분 한마디씩 합니다.
“왜 내 허락도 없이 머리를 잘랐어?”
남편이 성을 냈습니다.
“머리 좀 자르면 안 돼?”
“왜 맘대로 잘라?”
그러자 부인이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왜 내 허락도 없이 대머리가 되었어?”
若見他人非 약견타인비
自非却是左 자비각시좌
만약 남의 그릇됨을 보면,
그릇됨은 도리어 자신에게 있다.
절대 남에게 쓸데없이 말하지 마세요. 남의 허물을 지적하는 그 자체가 바로 자기 자신의 허물입니다. 남의 것을 보고 쓸데없는 헛소리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이 짧은 치마를 입고 왔든, 화장을 몇cm 두께로 하고 왔든, 머리를 감았든 안 감았든, 머리를 볶았든 어쨌든 남의 일을 그렇게 일일이 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자리가 바른지, 자기가 옳게 잘 사는지, 자기 모양새는 단정한지 그것부터 챙길 일이지 왜 남의 것을 보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겁니까? 그게 바로 생멸의 문을 여는 겁니다. 결국, 눈 조심하라는 얘깁니다.
봐도 봄이 없어야 전체를 보는 큰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귀를 조심해야 합니다.
중학교 다니는 똘순이라는 아주 예쁜 애가 있었어요. 치열이 고르지 않아도 뻐드렁니는 귀엽잖아요. 똘순이는 예쁜데다가 뻐드렁니 때문에 아주 귀엽기까지 했어요. 아이들은 그런 똘순이를 시샘하여,
“똘순이는 뻐드렁니~.” 하고 놀려댔어요.
속이 상한 똘순이는 집으로 와서 어머니를 원망하며 말했습니다.
“엄마, 왜 저를 뻐드렁니로 낳았어요? 창피해서 학교에 못 가겠어요! 아이들이 놀리잖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똘순이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 내가 너를 낳았을 때 이는 없었어.”
누가 허튼 얘기하거들랑 한마디 던지고 가버리든지, 들은 척도 하지 말고 지나가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귀를 조심하는 것입니다. 들어도 들은 바 없이 하는 겁니다.
無佛處急走過 무불처급주과
부처 없는 곳은 속히 지나가라.
귀와 눈과 입이 생멸의 문에 들지 않도록 잘 닫아야 합니다. 진여의 문으로만 통하도록 귀와 눈과 입을 열어둬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不用神仙眞秘訣 불용신선진비결
直敎枯木放花開 직교고목방화개
신선의 비결을 쓰지 않고도
고목으로 하여금 바로 꽃피게 한다.
과거습의 세월이 아무리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한마음 돌이키는 순간, 바로 진여문에 들며 앉은 자리에서 부처님 화신으로서 연화장 세계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목은 세월이 오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본래로 진여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선의 비결을 쓰지 않고도 고목에서 꽃을 피우듯 곧 부처를 이루고 연화장 세계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12불이 계시던 당시에 늘 와서 부처님 법문을 즐겨 듣던 원숭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숭이가 너무 가볍게 행동하고 말을 잘 옮기고 다닌 까닭에 부처님께서 원숭이에게 훈계하셨습니다.
“생멸문으로 통하는 그 눈을 닫아라. 그 입을 닫아라. 그 귀를 닫아라.”
그러자 원숭이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생멸의 눈, 생멸의 귀, 생멸의 입을 닫고 나서 성불했다고 합니다.
우리절(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대웅전 3층 큰법당 앞에 이 원숭이 보살상이 있습니다.
첫 번째 원숭이는 귀를 닫고 있어요. 어쨌든지 쓸데없는 소리 듣지 말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눈을 닫고 있는 원숭이입니다. 쓸데없는 것은 절대 보지 말라는 뜻이지요. 세 번째 원숭이는 입을 막고 있습니다. 입 닫고 귀 닫고 눈을 닫아라! 생멸의 문으로 통하는 눈, 귀, 입 모두 닫되 그 순간 진여의 문으로 통하는 각자의 진면목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여의 문을 활짝 열고
우리가 눈과 귀와 입을 항상 조심하면 성불도 하고 연화장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데, 조심하지 않고 생멸의 문을 훤하게 열어놓고 있으면 마구니가 되기 쉽습니다. 보살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모자랄 판에 마구니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연화장 세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연화장 세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장에 있는 것입니다. 중생의 고해에서 눈을 바로 떠 마음을 돌아보면 진여의 본능, 참마음의 본능이 살아 꿈틀대는 진여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까지의 정신의 결정체이다.
오늘 나의 정신이
내일의 모습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멸의 문을 뛰어넘어
진여의 문 들어나서기 원한다.
연화장 세계에서
수많은 부처님을 만나기 원한다.
나는 정법도량에서의 수행을 통하여
이 같은 일이 모두 성취될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