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1~12 나의 왕, 나의 하나님 2020. 6. 17
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1)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 여호와여 2)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오늘부터 시편 찬송을 함께 부릅니다. 악보는 영상에 올리고 참석하는 분들은 악보를 보시면 됩니다. 이 시편 찬송은 한글개역본이라서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만 곡조를 맞추어 따라 부르시거나 아니면 읽으셔도 됩니다. 시편본문을 그대로 곡조에 맞춘 겁니다. 이런 시편 찬송은 주로 종교개혁 때에 개혁교회에서 부르던 곡조입니다. 음이 단조롭지만 그 가사를 음미하기에는 단조로운 곳이 좋다고 봅니다. 오늘 시편 5편에도 표제어가 있습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입니다. 지난주에 본 시편 4편은 현악에 맞춘 노래인데 5편은 관악에 맞춘 노래라고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이 ‘개역개정’인데 전에 번역인 ‘개역한글’판에서는 “나의 심사(心思)를 통촉(洞燭)하소서!”로 되어 있습니다. 통촉(洞燭)이라는 말은 양찰(亮察)이라는 말의 높임말입니다. 양찰은 밝히 살펴달라는 말인데 왕에게 아뢸 때에는 통촉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왕이 직접 깊이 헤아려 달라는 간청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입니다. 왕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부르면서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자신의 심사를 헤아려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살펴주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주께서 살피시면 누가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살펴주시라고 간청하게 됩니까? 주께서 죄를 살피시면 누가 설수가 있겠습니까?(시130:3).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시편에서 경건한 자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처럼 의지할 데가 없어서 주님만 의지하는 자를 경건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경건한 자란 자기 죄를 깨닫고 주께 회개하는 자가 경건한 자입니다. 다윗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건한 자는 자기의 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지난주에 본 대로 의의 하나님을 믿기에 자기를 살펴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의를 믿고 있는 것을 살펴달라는 것이며 이런 의로 핍박받는 것에서 구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봉독” 다윗이 왕인데도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합니다. 기도를 하는데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아침부터 기도합니다.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어주실 것이기에 아침에 주께 기도하고 바란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왕의 모습입니까? 조선시대 섭정을 당하는 어린 왕의 모습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왕재 교육을 받았다고 하여도 어린 아이라면 상왕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아 세움을 입은 왕인데도 자기 힘을 사용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리는 아이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왕이란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왕이 권위를 가지고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이 나오면 구족(九族)을 멸하여서라도 왕위를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왕은 힘이 있어야 합니다. 왕의 힘을 가지려면 군사가 강해야 합니다. 돈이 많아야 합니다. 이런 힘을 가지려면 이웃 나라의 힘 있는 왕들의 딸들과 결혼하여 우호세력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힘을 가진 자를 세상은 왕이라고 합니다. 이런 힘이 있는 왕에게 사람들은 복종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왕이 없어도 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나라이기에 제사장만 있으면 되는 나라입니다. 제사로 유지되는 나라라는 말은 어린 양의 피 뿌림 안에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믿음이 없기에 왕을 세워달라고 사사시대 말기에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요청합니다. 사무엘이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알고 섭섭해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너를 버림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왕을 세워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운 왕이 사울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으로 폐하시고 어린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십니다. 이렇게 왕을 요구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어떤 왕을 세워야할지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17:14~20절입니다. “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이스라엘의 왕은 세상의 다른 왕들과 전혀 다른 왕이어야 합니다. 세상 왕의 힘이라는 것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가장 최소한만 허락합니다. 그러면서 왕위에 오르면 세상의 힘을 추구하지 말고 여호와의 율법을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자기 마음대로 통치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이미 헌법처럼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의 마음의 그의 형제위에 교만하지 않게 됩니다. 왕이 되어 백성들을 섬기고 교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왕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다윗이 처음에는 겸손합니다. 그러나 왕이 되어 점점 힘이 강해집니다. 이런 강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땅을 거의 차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군대도 강해지고 아내도 많아지고 은금도 많아집니다. 이럴 때에 겸손해 질 수가 없는 것이 죄인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럴 때에 행한 일이 간음하고 살인합니다. 그런데 그 죄를 알지 못합니다. 나단선지자의 책망으로 인하여 자신이 모태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 책망을 통하여 회개하고 용서를 받습니다. 용서를 받은 자는 이제부터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왕으로 믿고 부르게 됩니다.
본문 4~6절입니다. “봉독” 4~6절은 1~3절을 대비하여 봐야 합니다. 1~3절은 자신이 왕이지만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왕으로 의지하는 모습니다. 이에 반하여 4~6절은 악인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합니다. 여기서 악은 악인으로 번역해도 됩니다. 이러한 악인들은 오만하고, 거짓말 하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이며, 속이는 자가 됩니다. 이런 악인들은 주께서 싫어하시기에 멸망시키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악인의 삶입니까? 의인의 삶입니까? 악인은 자기의 힘을 키워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여야 하는 삶이란 날마다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삶이 됩니다. 물론 이 양식이 먹을 양식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양식이라고 하여도 이 양식을 날마다 받아먹어야 산다는 심령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의가 가득한 자들은 주의 의를 구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이 악한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이든 영적이든 간에 자기의 힘을 키우려고 하는 것은 악한 자가 되는 길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에너지를 가득 채워서 위력을 행사하고 싶은 것도 오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면 오만의 자리에 앉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힘을 빼주시는 것이 사랑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봉독” 주를 의지하고 주께 아침부터 기도하는 자(1~3)와 그렇지 않은 악한 자(4~6)를 대비한 후에 7절에서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겠다고 합니다.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예배하지 않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악인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힘을 의지하려고 계속하여 거짓말하고 속이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달리 자신은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예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할 수 있음이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남과 비교하여 자기를 자랑한다면 이것은 주의 풍성한 사람을 힘입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이 참석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믿음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의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봉독” 나의 원수라는 각주를 보면 ‘엎드려 나를 기다리는 자들을 인하여’입니다. 강도나 도적들이 덮쳐 삼키려고 엎드려 기다리는 자들이 원수입니다. 원수들로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여 달라고 합니다. 원수들이란 여호와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의를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는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입은 적이 없는 자들은 그 사랑을 입은 자들을 대적하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의 언행을 살펴서 고발하려는 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나의 의가 아닙니다. 나의 길이 아닙니다. 주의 의와 주의 길로 인도하여 달라고 하는 자가 믿는 자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봉독”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다는 말이 그 마음에 신실함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심중에 악하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매장을 하지 않고 돌무덤에 안치하는 무덤입니다. 그런 무덤 문이 열리면 시체 섞는 냄새밖에 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속이 이렇다는 말입니다. 그런 속에서 나오는 말로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여도 그것은 아첨하는 말에 불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난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셨습니다(사29:13, 막7:6).
바울사도는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이 시편의 말씀으로 유대인들도 다 죄인이라고 말합니다(롬3:13). 로마서 1장부터 하나님의 심판의 무엇인지를 말하면서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를 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 정죄와 심판이 합당함을 율법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의로 자기 의를 삼은 자들이 악인들이 됩니다. 이들이 시편에서 미리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오셔서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가 되는지 증거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19~24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오늘 본문의 해석과 같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봉독” 그들을 정죄하셔서 자기 꾀에 빠지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로마서 10;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로마서 3장에서 본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일에는 사람의 자랑거리가 다 날아가 버립니다(롬3:27). 그러나 자기 의를 챙기려고 하는 자들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허물로 된 더러운 옷인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쫓겨나는 것은 주님께서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허물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려짐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시32:1,2. 롬4:7,8).
본문 11~12절입니다. “봉독”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한다고 합니다. 누가 주께 피하여 들어가는 자들입니까? 자신의 의가 없기에 주님의 의만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미 닭이 새끼를 부를 때에 달려가는 병아리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피하여 들어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세리와 죄인과 창기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자들에게 줄 서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왕을 사람들이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왕이거나 창기이거나 간에 주의 의로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의 보호로 말미암야 영원히 외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영원한 즐거움입니까? 주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말은 주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복을 주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난리 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을 늘 일어나는 요란한 세상입니다. 그런 요란한 세상에서 평안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복은 은혜의 방패로 호위하는 겁닝다.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방패이며 상이라고 합니다. 그 방패와 상의 성취가 세상이 볼 때에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님이 우리의 영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나의 의가 됩니다. 당신의 나의 왕입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들은 주의 의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이 풍성한 사랑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