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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2장13~23절
제목 : 예수님의 피신과 귀환
요셉은 천사의 지시에 따라 아내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헤롯의 끔찍한 영아 학살 속에서 목숨을 건지실 수 있었으며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요셉은 돌아와 나사렛에 정착했습니다.
1. 애굽으로의 피신(13~15절)
1)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애굽으로 피하라 하심(13절)
“[13]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그들은 동방박사들을 말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 까지 애굽에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일어나' 는 조금도 여유를 두지 말고 곧바로 행하라는 촉급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실로 유대인의 왕이요,
구원자로 오신 예수께서 유대 땅의 환영을 받지 못하시고(요 1:11),
마치 도망자의 모습으로 이방 땅에 급히 피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애굽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서 헤롯의 통치권밖에 있는 지역이며, 그 당시 약 100만명 정도의 유대인 집단이 군집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애굽 피난 역사는 오래 전부터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흉년으로 인해 아브라함(창 12:10)과 야곱(창 46:6)이 내려간 바 있으며, 솔로몬 사후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피난하였고(왕상11:40),
포로 시대에는 예레미야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이 애굽으로 갔습니다(렘 26:21-23;43:7).
특히 신구약 중간기 때는 시리아의 학정에 의해 애굽으로 많은 유대인이 내려가는 등 애굽은 유대인이 피난하기에 적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식구들은 쉽게 애굽에 이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애굽으로 간 것처럼,
돌아와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즉 그들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만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19, 20절),
애굽에서 인내하며 기다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한편 이 지시는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피난 길 뿐만 아니라,
피난 기간과 그 이후까지도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
2)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감(14절)
여기서 '일어나서' 는 주저함 없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취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마치 1:24처럼 요셉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실로 요셉은 그 밤에 출발하여 애굽의 변경까지 약 120km나 되는
먼 여행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완전한 믿음입니다(히 11:1, 6).
3)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었습니다(15절)
“[15]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헤롯이 죽기까자 거기 있었으니 -
헤롯은 추하고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비참히 죽어갔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헤롯의 죽음(B.C.4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지시를 고대하던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와 함께 '나사렛'(23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에서 체류하는 동안에 그곳에 살고 있던 동족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목수출신의 요셉은 애굽 생활 중에 쉽게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 이 말씀은 구약 성경 호세아 11:1절
말씀을 예수의 생애와 접목시키고 있습니다.
호세아11:1절 말씀은 보면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의 애굽 피난 사실을 11:1의 말씀과 일치 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호세아11:1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본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사건을 언급한 말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성령의 영감으로 그 사건을 예수께 적용시켰습니다.
즉 마태는 이스라엘(하나님의 자녀)의 역사가, 예수(하나님의 독생자)의 생애 속에서 재현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처럼 구속사 전개의 정점인 예수의 개인적 생애에
신.구약을 포함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역사가 다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한 것은 예수의 사역이 단순한 민족적 해방에 그친 모세의 사역을 넘어서 전 인류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는 신약에서 이스라엘의 원형으로 종종 나타납니다.
몇가지를 예시해 보면
(1)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시험(신 8:2, 3)-예수의 40일 금식 기도(4:2),
(2) 이스라엘은 열매 맺지 못한 포도나무(사5장)-예수는 참 포도나무(요15장),
(3)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장자(출4:22)-예수는 하나님의 맏아들(롬8:29;히 1:6),
(4) 이스라엘은 다윗의 골육(삼하5:1)-예수는 다윗의 자손(1:1) 등입니다. 또한 신약에서는 어디에서나 구약의 역사와 율법을 예언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예언의 성취'라는 말은 그것이 구약과 연결되어 구약의 예표의 실체(원형)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호11:1은 단순히 출애굽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있고,
그 사랑은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펼쳐진 계시,
즉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그려진 그림과 같은 전형적인 계시의 일부분을 제공했고, 마태는 그 계시의 '완전한 의미'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야 대망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민족적,
혈통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데서 결정됩니다.
2. 영아 살해(16~18절)
1)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두 살부터 그 아래를 다 죽이라함(16절)
“[16]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헤롯이...속은 줄을 알고 - 박사들이 자기에게로 오지 않고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헤롯은 박사들이 자신을 희롱한 사실로 여겼을 것입니다.
심히 노하여 -여기서 '노하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분노하다는 뜻으로서
그 당시 혜롯의 활화산 같이 꿇어 오르는 극렬한 분노를 예감케 해줍니다.
사람을 보내어...그 모든지경 안에 있는-헤롯의 칼날 같은 명령이 실행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사이는 약 8k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베들레헴은 조그마한 소도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지경에'는 베들레헴 뿐 아니라 베들레헴 근교의 한적한 오두막까지를 포함합니다.
사내 아이를...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 헤롯은 자기가 찾는 아이의 나이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장차 유대인의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모조리 살해하기 위해 살해 범위를 '2살 이하의 사내 아이'로 한정시켰습니다.
여기서 '두 살부터'는 '별이 나타난 때'(7절)에 근거하는 바,
이에 대한 견해는
(1) 아이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충분한 여유를 둔 것이다.
(2) 박사들이 예루살렘까지 근2년동안이나 걸려 도착했다.
(3) 박사들의 귀국 후 2년 만에 살해했다 등이 있는데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2살이하'란 말은 당시의 분노에 찬 상황으로 보아 넓게 6개월에서 20개월 사이까지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당시 살해된 유아의 수효에 대해 대단히 많았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학자도 있고 심지어 14,000명 정도로 추산하는 전승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이 조그마한 도시요 당시 주민이 1,2천명 정도였다는 점을 들어 단지 수십명 안팎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한 듯합니다.
그런데 헤롯의 이러한 잔인한 살상극은 '유대인의 왕'에 대한 영적 무지의 결과입니다.
즉 예수의 진상 도래는 로마 정복을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키 위해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헤롯은 살인마의 탈을 또 한 번 쓰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 사건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다루지 않고 있어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마크로비우스의 저서 '축제'에 보면 아구스도 황제가 '헤롯의 명령으로 시리아 지역의 두 살 이하 아이들이 살해 당할 때 그 속에 헤롯 자신의 아이도 포함되었다'하면서 '차라리 그의 아들이 되기보다 돼지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권능과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헤롯의 손에서 예수를 거뜬히 건져내셨고, 세상의 왕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에 대해서 가소로이 비웃고 계셨을 것입니다(시 2:1-6).
2) 이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언 하신 말씀입니다(17~18절)
“[17]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18]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마태복음에 예레미야라는 이름이 세 번 나오며(16:14;27:9), 그 밖에는 신약성경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라미에서 슬퍼하며...라헬이...애곡하는 - 예레미야가 이 예언(렘 31:15)을 선포한 시기(여호야김 통치 초기)를 고려해 볼 때(렘 30:1-33:26),
주전 586년에 멸망한 유다와 베냐민의 포로 장면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라헬은 야곱의 아내이자,
요셉과 베냐민의 모친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어머니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라마는 베냐민 지파 성읍이며(수 18:25),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 가까우며 벧엘로 가는 도중에 위치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 부근에 라헬의 무덤이 있는 셀사가 있었습니다(삼상10:2).
이러한 정황들을 익히 알고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바벧론 포수를 바라보며 라헬이 그녀의 무덤 속에서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포로가된 자손들, 즉 '그 자식'들이 끌려가는 모습(렘40:1,2)을 바라보면서 통곡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라마에서 에브라다(베들레헴)로 가는 도중에 자식이 없어 슬퍼했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로 인해 죽은 사실(창 35:19,20)을 포로됨에 비유하여 예레미야가 시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을 마태가 베들레헴 유아 학살 사건에다 관련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마태가 여기에서 바벧론 포로 장면을 연결시키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사건들의 초점은 베들레헴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어미들(라헬)이 흘리는 '눈물'에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바벧론 유수 때에는 다윗의 혈통에서 이어지던 왕권이 물러나고,
이방의 속박으로 인하여 흘리던 탄식의 '눈물'이,
또 다른 이방인(헤롯은 에돔인이었음)의 학정으로 살해된 베들레헴(다윗성이라고 불리우는, 삼상16:1) 아이들이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그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후손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림으로 오랜 포로 생활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언약해 주신 새 언약(26:28;렘 31:31-34)이 온 이스라엘에 선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귀환과 갈릴리 나사렛 정착(19~23절)
1)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하심(19~20절)
“[19]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20]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해롯이 죽은 후에 - 헤롯은 그의 통치 38년,
즉 로마 기원 750년(B.C.4년)에 70세의 나이로 병들어 죽었습니다.
한편 그의 최후를 기술한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따르면,
그는 내장이 썩고 벌레가 나며 악취와 경련이 끊이질 않아 백약이 무효하여 죽으니 그 모습은 잔인한 생각을 가진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의 죽음이었다 고 합니다.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현몽하여 - 이는 요셉에게 나타난 세번째 현몽인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관심과 역사가 아기 예수의 생명에 집중되어 있음이 엿보입니다.
한편 마태는 요셉이 3차 현몽 당시에도 여전히 애굽에 머물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으나, 애굽 체류 기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기록한 외경 '예수 유년기의 복음'에는 약 3년간 애굽에서 머물렀다고 전합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요셉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땅'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오직 20, 21절에서만 나오는 것으로서 6절의 '유대 땅'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 여기서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란 단순히 혜롯을 지칭하는 막연한 묘사입니다.
그런데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라는 복수 형태에 대하여 여러 견해들이 있습니다.
(1) 출 4:19을 인용한 것이다.
(2) 헤롯이 죽기 5일 전에 죽었던 그의 아들 안티파터가 이 학살에 가담하였다.
(3) '자들'이라는 복수대명사는 막연한 지칭일 수도 있고, 3인칭의 범주에 속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태가 바로 앞 구절에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한 호11:1을 인용하면서부터 이미 그의 머리 속에, 생애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모세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출4:19을 인용하였을 것입니다.
*출4: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다 죽었느니라”
2) 요셉이 일어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21절)
“[21]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요셉이 일어나...들어가니라 - 여기서도 요셉의 절대 순종이 돋보입니다. 아마 이때는 어둠을 틈타 행동해야 할 아무런 장애 요소가 없었기에 해가 있는 낮에 본국으로의 입국을 결행했을 것입니다.
실로 '밤에' 떠났던(14절) 그들이 낮에 돌아오게 된 것이야말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절대 의지를 일견 나타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이 됨(22절)
“[22]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아켈라오 - 헤롯 사후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헤롯이 관할했던 영토를 셋으로 분할하여,
아켈라오에게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주었고,
헤롯 빌립 1세에게는 바타네아와 트라코니티스를,
헤롯 안디바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각각 주어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아켈라오는 그의 부친과 다름없이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성장하여 로마 황제에게서 이스라엘의 분봉왕으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리고 만약 통치만 잘하면 '왕'의 칭호까지 부여받을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능한 통치자로 평가되어 A.D.6년에 폐위당하고 축출되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유대지방은 로마에서 직접 파견된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바로 그 무렵에 요셉은 식구들을 인솔하여 이스라엘 경내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 유대 사가(史家) 요세푸스에 의하면 아켈라오는 시이저로부터 분봉 왕으로 임명받기 전부터 잔혹한 살상을 저질렀다 합니다.
그 한 예로 그의 부친 헤롯이 죽기 전 자신이 성전에 세워 놓았던 금 독수리상을 훼손시켰던 유다와 맛디아라는 열렬한 애국자 둘을 살해한 적이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켈라오가 아직 즉위하기 전 유월절이 다가왔을 때,
여러 사람들이 이 두 순교자들을 위하여 애도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성전을 에워싸도록 하고서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요셉이 들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 아마도 그때 마태의 생각에는 요셉이 헤롯의 음모가 아니었다면 애굽으로 도피하기 직전에 머물렀던 베들레헴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했으며, 애굽에서 돌아올 때에도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린 메시야가 성장하기에 알맞은 곳은 예루살렘 성도(聖徒)
주변이지 '이방의 갈릴리'(4:15;사 9:1)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누가는 이곳 나사렛이 원래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눅1:26;2:4,39) 그들의 나사렛 정착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 현몽은 그가 받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현몽으로,
이때 받은 '지시'는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의미입니다.
4)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심(23절)
“[23]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나사렛 - '싹, 어린 순'이라는 뜻입니다.
갈릴리의 한 성읍으로 예루살렘 북쪽 약 90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비옥하지 못한 모래 땅, 주위의 산들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빈약한 성읍이었습니다. 이곳은 구약성경에도 외경에도 요세푸스의 고대사에도 나오지 않고,
여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실로 나사렛은 경멸받던(요1:46) 성읍의 하나였으나,
주후 4세기 이후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루려함이러라 - 본절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구절은 정확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오랜 세월을 두고 다음과 같은 여러 논쟁을 야기시켜왔습니다.
즉 (1) 구약 이외에 구전되어 오던 구절이거나 분실된 부분이다
(2) 나사렛의 뜻이 '싹'이므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사11:1)을 가리킨다.
(3) 나사렛의 어근은 나사르로서 '구별'을 뜻하므로 '나실인'(민6:2,8)에 관련된다. 위와 같은 견해들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보다 타당한 해석은 다음 경우입니다.
(4) '선지자'란 용어가 복수 형태인 것은 한 특정한 선지자가 '메시야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리라'라고 예언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가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시22:6-8,13;69:8,20,21;사11:1; 49:7;53:2,3,8;단9:6). 실제로 나사렛은 멸시당하던 곳이었으며(요7:41, 52),
심지어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조차 경멸당하던 곳이었습니다(요 1:46).
예수는 '나사렛 예수'라는 놀림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이단'(행24:5)으로 취급되었을 때의 이 '나사렛'이란 단어는 비방과 모욕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다윗의 왕통에서 나온 줄기였고,
조룽과 경멸을 받으며 비천한 환경에서 자란 왕이신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예수님은 불의와 공포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소동과 난리 속에서,
그리고 죽음과 공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할 구원자 메시아 예수는 걸음마를 떼고 말을 배우기도 전에 그 목에 현상금이 걸린 떠돌이 나그네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난리와 공포 속에 있는데 그 속에 있는 백성을 구원할 메시아가 평화롭게 등장할 수 없었나 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불의와 죽음의 공포 가운데 있는 우리를 건지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비참한 자리에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자리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의지합시다.
2) 예수님은 진정한 출애굽을 완성하십니다(13~15절).
예수님이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셨다가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오신 사건은 진정한 출애굽의 완성을 예언한 호세아 11장 1절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 전반에서 이스라엘의 실패와 반역이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성공하십니다(4장 1~11절).
내 삶에 진정한 출애굽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3) 예수님은 그늘지고 소망을 잃은 자리에 오셔서 빛과 생명을 주십니다(19~23절).
헤롯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가족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지만 하나님께서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 정착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으로 사시는 것은 이사야 9장 1~2에서 예언하고 있는 말씀처럼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 같은 중심지가 아닌 멸시와 천대를 받던 땅에 생명과 구원의 빛을 가져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고 물을 만큼(요한복음 1장 46절) 무시와 천대를 받는 시골 구석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자라심으로 오히려 나사렛은 가장 먼저 생명과 구원의 빛을 경험한 복된 땅이 되었습니다. 나사렛과 같은 우리 삶을 비추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양합시다.
기도
공동체-슬퍼하고 고통받는 우리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진정한 출애굽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열방-타지키스탄의 남성 노동인구의 절반과 키르기즈스탄 전체 노동인구의 20%가 해외에 나가서 일하고 있다. 대부분 무슬림인 이주 노동자들이 타국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도록